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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 활동을 하면서 소비자운동에 참여한 지 20여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동안 여러 곳에서 주부, 직장인, 청소년, 어르신들에게 '소비자 교육', '신용교육', '신용카드 교육' 같은 것을 했습니다. 가장 인기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신용카드의 실체를 밝히는 강의였습니다.

신용카드에는 '신용'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을 뿐 실제로는 빚을 내는 '부채카드'입니다. 신용을 현금처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신용을 근거로 돈을 빌릴 수 있는 카드인 것입니다. 물론 신용카드 포인트 같은 것이 있어서 마치 신용을 현금처럼 쓸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기도 하지요.

신용카드 회사의 '신용' 프레임에 갇혀 자신의 신용을 담보로 수입보다 많은 지출을 하며 카드를 마구 긁었던 사람들 중엔 '신용불량자'가 된 이들이 많습니다. 이분들이 신용카드를 많이 쓴 것은 정부가 국민들에게 신용카드 사용을 적극 권장한 탓도 있고, 카드 회사들이 국민들의 눈을 속여 장사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느슨하게 만들어 준 탓도 큽니다.

가계부채가 급증하고 개인 신용불량자가 늘어나면서 신용카드 사용에 대한 '경고'가 이어지고 신용카드 사용에 대한 경각심이 생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카드 사용액이 확 줄어들지는 않고 있습니다. 다만, 과거엔 매년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신용카드 매출액이 주춤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여신금융협회가 지난 6월 내놓은 '2013년 5월 카드승인실적' 분석자료에 따르면 지난 달 신용카드 승액금액은 38조6000억 원으로 전년동기 대비 2.4% 증가하는 데 그쳤다고 합니다. 신용카드 승인금액의 전년동기 대비 증가율은 지난 3월 4.8%를 기록한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추세라고 합니다.

5월의 전체 카드 승인금액은 총 46조6000억 원으로 전년동기 대비 3.6% 증가했지만, 역대 최저의 증가율을 기록했던 지난 2월(3.4%)에 이어 두 번째로 낮은 증가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학등록금 신용카드 대신 매월 분납하면 된다

유치원 수업 장면
 유치원 수업 장면
ⓒ 이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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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매년 신용카드 사용을 부추기는 언론 기사가 쏟아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대학등록금 납부 때입니다. 이 시기가 되면 대한민국 언론들이 '대학등록금 신용카드 납부가 안 되는 학교들이 수두룩하고 학부모들이 불편을 겪는다'는 기사를 쏟아냅니다.

대학등록금 신용카드 납부가 당장은 편리해 선호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지만, 할부 이자를 부담하는 학부모도 손해고, 신용카드 수수료를 부담해야 하는 대학도 손해입니다. 부모에게는 이자를 챙기고 대학에서는 수수료를 챙기는, 신용카드 회사만 꿩먹고 알먹는 장사지요.

이런 기사가 쏟아질 때 확인해봤더니, '여신전문금융협회'가 전국 대학들의 등록금 신용카드 납부 실태를 조사하여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주요 언론들은 보도자료를 받아서 기사를 쏟아내더군요. 대학등록금은 결코 신용카드 납부가 대안이 아닙니다. 서울시립대 수준으로 대학등록금을 낮추고 유치원이나 학원비처럼 매월 납부할 수 있도록 제도를 고치면 되는 일입니다.

대학등록금을 납부하는 봄에 이어 또 한 번 신용카드 사용을 부추기는 언론 기사가 쏟아지는 때가 있는데 매년 가을에 접어드는 바로 이 무렵입니다. 이때는 국회발 자료가 쏟아집니다. 바로 정기국회와 국정감사를 앞둔 시점에 '신용카드 안 되는 대학, 유치원' 등을 지적하는 보도자료를 내보내는 국회의원이 꼭 있습니다.


매년 신용카드사 나팔수 노릇하는 국회의원과 기자

5일 보도를 보니 올해도 민주당 국회의원이 신용카드 결제가 안 되는 유치원이 80%가 넘는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한 모양입니다. 국회의원의 실태 조사결과와 언론보도를 요약해보면, 유치원을 보내는 학부모들은 매월 꼬박꼬박 교육비를 내야 하는데 사정이 생겨서 그 달에 낼 수 없으면 신용카드로 납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치원비는 대학등록금과 달리 대부분 이미 분납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매월 내는 교육비를 신용카드로 납부한다고 해도 학부모의 경제적 어려움 개선엔 전혀 도움되지 않습니다. 신용카드로 내라고 하는 것보다는 유치원 교육비 납부를 2~3개월 유예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만약 6개월 혹은 12개월로 장기간 분납 납부를 해야 할 만큼 어려운 상황이라면,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또 신용카드의 높은 할부 이자를 부담하는 것보다 은행권에서 낮은 이자로 대출을 받는 것이 훨씬 바람직한 방안입니다.

물론 유치원 납입금 중에는 매달 내는 교육비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목돈을 내야하는 입학 관련 비용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신용카드로 내라고 권장하는 것도 바람직한 해법은 아닙니다. 한꺼번에 목돈을 내는 것이 학부모들에게 부담이 된다면 매월 내는 교육비처럼 분할 납부를 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면 됩니다.

"목돈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신용카드 사용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은 카드회사의 상술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유치원 교육비, 각종 납부금을 신용카드로 내면 당장 학부모는 할부 이자를 부담해야 합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유치원 입장에서는 신용카드 수수료도 학부모가 내는 납입금에 포함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신용카드 회사가 꿩먹고 알먹는 동안, 학부모는 할부 이자와 신용카드 수수료를 모두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상식으로 납득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교육비를 받는 유치원이 있다면, 그것은 신용카드 결제로 해결할 일이 아니라 교육당국이 나서야 할 일입니다. 교육당국은 원칙을 세워 학부모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정책을 만들어야 합니다.

예컨대 대학등록금이나 유치원 교육비 실태를 정확하게 조사해 표준원가와 같은 개념을 도입하여 터무니없이 많은 교육비를 받는 대학이나 유치원에 정부 지원을 중단하면 그만입니다. 우리나라 대학과 유치원 중에 정부지원금 없이 운영될 수 있는 곳은 한 곳도 없습니다.

아울러 입학 시기에 한꺼번에 납부하는 비용이 학부모들에게 부담이 된다면, 신용카드를 사용하도록 할 것이 아니라 이자부담 없이 매월 나누어 낼 수 있도록 제도를 고쳐야 합니다. 국회의원이 신용카드 단말기 설치 실태만 조사해서 발표할 것이 아니라 학부모에게 도움이 되도록 제도를 고쳐야 하는 것이죠.

1년에 2~3번씩 국회의원이나 언론사 기자들이 신용카드회사 대변인 노릇을 하는 것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신용카드의 실체를 잘 모르는 분들이 신용카드의 '편리성'에만 주목하여, 때만 되면 국민을 모두 빚쟁이로 만드는 정책을 확대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참 기가막힐 노릇입니다.

국회의원님들, 언론사 기자님들, 제발 공부 좀 합시다! 신용카드 소비를 늘리는 것이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니시지요. 대학등록금도, 유치원 납부금도 신용카드로 결제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쉽고 간단한 해결책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의원님, 기자분들, 신용카드사 나팔수 노릇은 제발 올해로 끝내주세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신용카드, #유치원비, #대학등록금,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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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YMCA 사무총장으로 일하며 대안교육, 주민자치, 시민운동, 소비자운동, 자연의학, 공동체 운동에 관심 많음.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하며 2월 22일상(2007), 뉴스게릴라상(2008)수상, 시민기자 명예의 숲 으뜸상(2009. 10), 시민기자 명예의 숲 오름상(2013..2)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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