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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우도로의 초대

며칠 전, 오랜 친구로부터 책자 하나를 건네 받았다. 우도에 있는 한 카페에서 출간한 무크지 (비정기간행물) 창간호였다. '카페에서 웬 무크지? 관광안내책자 같은 건가?' 하며 별 기대 없이 펼쳐본 '우도에서 노닐다'라는 이름의 이 무료책자는 손바닥을 펼쳐서 대보면 거의 가려질 정도로 자그마했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들은 찬찬히 음미해볼 거리가 많았다.
나는 이 조그만 카페에서 무크지를 만든 이유가 궁금해졌다.

"여행지로 우도를 찾고 또 이 카페에 들른 사람들이 시간에 쫓겨 풍경을 급하게 스캔하고 떠나는 모습이 안타까웠어요. 좀더 두터운 경험의 시간을 갖는다면 훨씬 여행이 풍요로워질 텐데, 하는 생각이 이 무크지를 낳았지요."

무크지 우도에서 노닐다 창간호
▲ 우도에서 노닐다 표지 무크지 우도에서 노닐다 창간호
ⓒ 진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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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카페 대표, 박신옥씨의 설명이다.

그래서일까. 책을 펼치자마자 우리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또 다른 우도로 빨려들어간다. 폭주하는 사륜오토바이에 귀앓이를 하는 우도의 길에 대한 연민, 가뿐하게 걸을 만한 일곱 가지의 산책로 제안, 떠돌이 개들, 해녀 '할망'(제주 방언으로 '할머니'란 뜻), 카페에서 자주 흘러나오는 음악, 해변에 버려진 부표들의 재활용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우리가 존재하는 유일한 시공간인 '지금, 여기'가 제게는 우도의 오늘이지요. 여행자는 먼 곳을 보는 사람들이고 그들이 당도한 여행지의 시공간은 항상 의식 속에서 어느 정도 붕 떠 있을 수밖에 없어요. 이 두 격차를 이어줄 소통의 다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박신옥씨의 설명이 이어졌다.

찬찬히 보아야만 말을 건네오는 것들

무크지에는 우도의 길을 소음이 심한 탈 것들이 아니라, 걷는 이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편집자들의 의지가 곳곳에 드러난다. 해안과 마을을 따라 순하게 구부러진 길들을 따라 '천천히, 혹은 찬찬히' 보아야만 말을 건네오는 것들에 주목하고 있다.

카페 문을 닫고 길을 나선다./ 바퀴들의 세상이 끝난 시간, 길은 어둠 속에서 나의 느린 발걸음과 함께 깨어 있다. 하루 종일 무례한 바퀴들의 굉음으로 몸살을 앓았던 길은 이제 오롯이 길만의 시간, 길만의 적막 속에서 스스로를 위무하고 있다./ (줄임) 몇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의 발소리와 소통할 수 있었다. '당신은 피곤하군요. 발을 끌고 가다시피 하네요. 조금만 더 가면 쇠물통언덕이니 거기서 다리쉼을 하세요. (줄임) 당신은 예전에도 왔지요? 물푸레나무를 닮은 당신의 걸음걸이가 기억 나요. 쇠머리오름까지 내처 걸으실 건가요?'/ 그러나 사람들은 이제 길을 바퀴의 속도를 보장해줄 만만한 바닥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길가에 핀 꽃양귀비와 금잔화 위에 잔뜩 먼지를 덮어씌우고 쏜살같이 질주할 뿐이다. 왜 이 섬의 눈개쑥부쟁이들은 육지의 쑥부쟁이들과 달리 키를 낮추고 옆으로 뻗어 가는지, 해안에 널브러진 부표의 고리 부분이 얼마나 다양한지, 걷다가 잠시 멈춰 고개만 숙이면 이네들의 표정을 읽을 수 있을 텐데. (줄임) 해가 떠 있는 동안 길은 카레이싱 코스나 마찬가지다.
- <밤산책> 중에서

천진항은 올레1-1코스의 시작점이자 끝점입니다. 햇볕이나 바람, 혹은 폭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섬을 에두른 길을 묵묵히 걷는 이들이 있습니다. 제주 곳곳에 걷고 싶은 길을 찾아낸 눈 밝은 이들의 마음 따라 놀멍쉬멍 우도를 두 발로 걷는 이들이지요. 이들에게는 총길이 16km이니, 소요 시간 4시간이니 하는 물리적인 정보가 중요하지 않겠지요. 시선이 머무는 장소마다 풀어 놓는 시간이 다르고 발걸음의 속도 또한 다를 테니까요. 이 아름다운 우도의 풍광에 스스로를 맞출 줄 아는 이들을 위해 몇 가지 산책 코스를 제안합니다.
- <걷는 이들을 위한 우도 지도> 중에서

또 센 바람과 파도에 떠밀려와 움푹 패이거나 한쪽이 깨진 채 해변에 널브러져 있는 부표들을 다른 모습으로 살려내는 이야기가 실려 있고, 우도에서 흔히 볼 수 있다는 경계심 많은 새, 가마우지에 관한 단상도 실려 있다.

무크지 우도에서 노닐다 창간호
▲ 우도의 가마우지들 무크지 우도에서 노닐다 창간호
ⓒ 진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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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의 동쪽 해안가에는 파도에 쓸려온 다양한 부표들이 있습니다. 파도와 바위에 시달려 여기저기 생채기가 나 있는 부표들은 우도의 경관을 해치는 골칫거리로 눈총을 받다가 결국엔 쓰레기 소각장으로 가겠지요. 쓸모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에 유난히 눈길을 오래 주는 카페의 일꾼들이 틈날 때마다 몇 개씩 부표들을 거둬들였습니다. 그것들에 붙어있는 해초와 굴껍데기를 떼어내고, 거친 표면을 사포로 매끈하게 다듬었습니다. (줄임) 진한 초록색으로 칠한 다음에 여러 모양의 입과 눈을 그려 넣었습니다. 개구리가 되었습니다. 담장옆, 잔디밭 등이 이 개구리들의 서식지가 되었지요. 귀 밝은 이들은 언제든지 와글거리는 이네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 <개구리합창단> 중에서

처음엔 가마우지들이 날개를 펼쳐든 채, 오래오래 현무암 바위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맑고 푸르고 깊은 우도의 바다를 향유하는 자세가 참 좋았다. (줄임) 바닷물 속에서 물고기를 잡아먹고 사는 녀석들치고는 깃털 방수 기능이 부족해서, 틈만 나면 날개를 펼쳐 들고 말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우도의 가마우지들> 중에서

'지금, 여기'를 담은 이야기

사람 사는 곳에 사람 사는 이야기가 빠질 수 있을까. 이 책 속에는 해녀들 사진이 여러 컷 있는데, 그저 무례한 호기심에 카메라를 들이대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서로 낯이 익고 말이 오가며 생긴 친근함으로 나온 것임을 짐작케 한다. 해녀들의 고된 노동에 던지는 시선이 따뜻하다.

아직 해가 가슴께에도 오르지 않은 이른 아침에 해녀들이 고래의 꼬리처럼 힘차게 두 발을 수면 위로 차올리면서 자맥질하는 모습과 다시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고 숨비소리를 내는 모습을 보면 저것보다 더 깊은 기도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 <샛길과 테라스의 대화> 중에서

무크지 우도에서 노닐다 창간호
▲ 해녀할망 무크지 우도에서 노닐다 창간호
ⓒ 진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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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꿈속에서나마 숨비소리 휘날리는 해녀로 살고 싶다.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는 돌고래의 그것처럼 바닷물에 밀착되어 유연한 움직임을 만들어낼 것이다. 나의 피돌기와 호흡은 바닷말과 성게와 문어와 전복 들을 중심으로 조절될 것이다. 민첩하고 거친 나의 노동은 나와 내 식솔의 밥과 삶의 도구들이 될 것이다.
- <해녀> 중에서

70쪽 남짓한 이 얇고 작은 책은 카페운영자이자 편집장인 박신옥씨가 언급한 대로 '지금, 여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은 섬, 우도의 이야기가 끊임없는 한 무크지도 호를 거듭해서 펴낼 것이라고 한다.

느리고 깊은 숨소리 같은 이런 소박한 책자가 세상의 많은 여행지의 한적한 카페에 하나 둘씩 생겨 났으면 한다.


태그:#무크지, #우도, #카페, #여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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