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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6화에서 언급한 한국어를 하는 부랴트인 '재능'과 1, 3화에서 언급한 중학생 아이들 외에도 S와 나는 기차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여행길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마련이고 그 하나하나를 소중한 인연이라 생각하지만 기차에서 만난 인연들은 더욱 특별했다. 잠깐 스치는 것이 아니라 며칠을 먹고 자는 등 함께 생활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재능' 말고는 서로 말도 통하지 않지만 마음을 나누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두 화에 나누어 그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내 2층 침대에서 내려다본 기차 실내 풍경. 승객들의 생활 흔적이 엿보인다.
 내 2층 침대에서 내려다본 기차 실내 풍경. 승객들의 생활 흔적이 엿보인다.
ⓒ 예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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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기차를 타기 전 S와 나는 과연 어떤 차장을 만나게 될까 하고 조마조마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차량마다 두 명의 차장이 있는데 그들은 낮과 밤 교대근무를 하며 출발지에서 도착지까지 차량의 모든 것을 책임진다. 현지물정에 어두운 외국인으로서 우리의 여행 성공여부와 편의는 많은 부분이 차장에게 달려있다고 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이르쿠츠크로 가는 기차를 탄 시각은 밤 11시. 승객들은 피곤한지 기차를 타자마자 자기 침대를 만드는데 여념이 없었다. 우리는 플라츠카르트라고 불리는 3등석을 이용했다. 복도를 사이로 가로세로로 마주보는 2층 침대 3개가 쭉 이어져있는 구조였다. 2인실인 1등석, 4인실인 2등석보다 훨씬 저렴할 뿐 아니라 독립된 방이라 제한된 사람들하고만 지낼 수밖에 없는 1, 2등석에 비해 평범한 러시아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3등석이 더 재미있다고 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아무튼 2층 침대 위에는 짐을 놓을 수 있는 선반이 있어서, 거기서 매트리스를 꺼내 좌석에 펼쳐놓으면 침대가 된다. 그런데 S와 나의 침대 위 선반엔 매트리스 대신 산타클로스의 선물 보따리처럼 생긴 것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 안에 매트리스가 있나보다 하고 꽁꽁 묶인 보자기를 풀고 있을 때였다. 차장이 지나가다 우리를 발견하곤 짜증스런 러시아 말로 쏘아붙였다. 그리고 우리 손에서 보따리를 뺏어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좀 전에 검표를 하면서 러시아어를 못하는 외국인이라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하자 고개를 끄덕여주었으면서 말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산타클로스 보따리는 사용한 시트를 빨기 위해 모아둔 꾸러미였다. 차장이 가고 난 뒤 근처 사람들이 도와준 덕분에 맞은편 침대 위 선반에 놓여 있는 매트리스를 찾을 수 있었지만 이 무서운 차장과 잘 지낼 수 있을지, 앞으로의 여행이 걱정이었다. 그때 바쁜 일이 끝났던지 차장이 슬그머니 다가와 매트리스의 시트를 매만져주고 지나갔다.

그녀가 우리의 낮 차장 알렉산드라였다(우리가 잠자고 있는 동안 일하는 20대 남자와는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4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다음날 아침 가만히 살펴보니 우리에게만 쌀쌀맞게 군 것이 아니라 원래 성격이 그런 것 같았다. 웃는 일이 드물었고 모든 일에 툴툴대었다. 그러나 꾸밈없는 사람이 그렇듯, 속정은 깊었다.

처음 기차를 탈 때 기차여행에 대해 잘 몰랐던 S와 나는 우유나 과일 같은 상하기 쉬운 음식을 잔뜩 사가지고 탔다. 기차를 탄 뒤에야 마땅한 보관 장소가 없다는 걸 깨닫고 어쩔 줄 몰라 하다 차장의 방에서 냉장고를 발견하고 우리 음식을 모두 알렉산드라에게 맡겼다. 식사 때마다 바쁜 그녀를 찾아내 음식을 받고 맡기기를 반복하는 것이 번거롭긴 했지만 덕분에 인스턴트식품이나 통조림에 의존하는 다른 승객들에 비해 우리는 매일 신선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다른 승객들 몰래 음식을 건네는 알렉산드라의 태도와 매번 신선한 음식을 조달하는 우리를 의아해하는 주변 사람들의 눈에서 차장방의 냉장고는 원래 승객들이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S와 나는 감사의 표시로 그녀에게 팁을 쥐어주려고 했다. 하지만 러시아에선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만연해 돈이면 뭐든지 해결된다던 선배 여행자들의 말이 무색하게 그녀는 한사코 돈을 받으려 들지 않았다. 그 돈을 받으면 우리에게 상냥하게 대해야 하는데, 그걸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그리고 한결같은 무뚝뚝함으로 우리 음식을 내주었다.

S와 나는 외국인이라 기차에서 금세 유명해져 모두들 말을 걸러 한 번씩은 찾아오곤 했다. 그중에서는 술에 취해 약간 시비조로 구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런 그들도 알렉산드라에겐 꼼짝을 못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싶으면 그녀가 그들을 등짝을 세게 때리며 쫓아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녀 덩치의 두세 배쯤 되는 건장한 남자들이 그녀 눈치를 보는 모습은 너무나 우스꽝스러웠다. 그녀 몰래 다시 다가오려다가도 책을 보면서도 누가 떠드는지 다 아는 학교 선생님처럼 그녀가 그들을 보지도 않고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얌전해지는 것이었다.

차장은 그 임무와 권력에 걸맞게 객실과 비교가 되지 않는 안락한 사무실과 침실을 가지고 있었다. 넓은 침대와 책상, 냉장고 같은 전자기기들 그리고 샤워부스까지 갖춰져 있었다. 이런 방이 있다면 이 기차를 타고 전 세계를 도시 하나하나마다 정차해가며 영원히 여행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같은 구간을 반복해서 오가야 하는 차장은 그 안에서 무료하고 피곤해보였다.

노을을 받아 붉게 변한 자작나무숲. 이런 아름답고 신비로운 풍광도 계속 보면 무료함을 더할 뿐일까.
 노을을 받아 붉게 변한 자작나무숲. 이런 아름답고 신비로운 풍광도 계속 보면 무료함을 더할 뿐일까.
ⓒ 예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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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니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차장들의 제복은 정말 멋있다. 기차가 정차하면 길고 푸른 코트를 휘날리며 일제히 내려서서 승객들을 맞는다. 플랫폼에서 표를 검사해 표를 가진 사람만 안으로 들여보내기 때문이다.

우리의 첫 번째 기차구간의 목적지 이르쿠츠크. S와 나는 정복을 차려입은 알렉산드라를 뒤따라 내렸다. 오랜만에 딛는 땅에 적응하느라 조금 시간을 지체한 뒤 짐을 들고 역 출구로 향하려할 때였다. 알렉산드라가 우리 쪽을 바라보다 우리가 고개를 들자 재빨리 시선을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깐깐한 표정으로 새 승객을 맞고 있었다. 끊임없이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져야 하는 그녀는 어쩌면 우리와도 곧 헤어져야 하는 걸 알기에 모든 감정을 내어 보이지 않았던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딱딱한 첫인상 뒤에 엄마 같은 포근함을 아는 나는 오랫동안 웃으며 그녀에게 작별의 손 인사를 건넸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은 2012년 3월부터 한 달 동안 다녀왔습니다.



태그:#시베리아 횡단 열차, #국제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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