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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지방 연못
▲ 명옥헌 천원지방 연못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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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안도현은 화암사를 가리켜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고 싶지 않은 곳"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아들에게도 가르쳐 주고 싶지 않은 은밀한 곳'이라는 사족을 붙여 추천해 주고 싶은 곳이 있다. 명옥헌이다. 그 중에서도 5월의 명옥헌. 그 명옥헌이 요즈음 녹색 치마로 갈아입고 단장에 여념이 없다. 이제 빨간 갑사저고리만 입으면 준비 끝.

수줍은 소녀의 미소를 연상케 하는 5월의 명옥헌이 더 좋은데 사람들은 명옥헌을 7월의 신부라 칭송한다. 7월이면 목 백일홍이 화사하게 피기 때문이다. 배롱나무 꽃이 명옥헌의 백미라는데 딴지를 걸고 싶은 생각은 없다. 목 백일홍이 흐드러지게 피는 7~8월 명옥헌은 꽃 대궐이다. 붉다 못해 핏빛이다. 이게 정자를 지은 선비의 취지와 개념을 달리하지 않나 하는 노파심이다.

정면 2칸 측면 2칸 단아한 모습이다.
▲ 식영정 정면 2칸 측면 2칸 단아한 모습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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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는 맛의 고장이며 누정(樓亭)의 보고다. 식영정, 취가정, 소산정 등 곳곳에 명소가 산재해 있고 면앙집, 송강집 등 한국 가사문학의 산실이다. 어디 이것뿐이랴, 소쇄원, 환벽당, 등 볼거리가 풍성하고 눈을 정화시켜 주는 곳이 많다. 소쇄원과 식영정이 남성적인 풍모를 갖추었다면 명옥헌은 다소곳한 여인의 체취가 풍긴다.

우리의 선조들은 당호를 지을 때 궁궐전당합각재헌루정원(宮闕殿堂閤閣齋軒樓亭園)이라는 질서를 존중했다. 이러한 관례에 따른다면 명옥헌은 식영정이나 소쇄원보다 한수 우위다. 원림도 여타의 원림(園林)과 달리 창덕궁 후원과 같은 격의 원림(苑林)이다. 하지만 이것에 개의할 필요는 없다. 후발 정자 주인들은 별로 내세울 게 없는 자신의 정자를 부각시키려고 각(閣)이나 당(堂)으로 지은 경우도 있다.

정면 2칸 측면 1칸 검소한 모습이다.
▲ 소쇄원 제월당 정면 2칸 측면 1칸 검소한 모습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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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500m 정도 걸어야 목적지에 닿는다. 소쇄원은 바로 코앞에 대형 주차장을 만들어 놓고 손님을 받느라 관광지화 되어버렸지만 명옥헌은 아직도 고즈넉한 풍치를 간직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명옥헌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다. 안도현 시인이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싶다는 화암사는 2km 정도 산길을 걸어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불편함이 옛 모습을 간직해 주었는지 모르겠다.

네모난 연목속의 둥그런 섬
▲ 명옥헌 네모난 연목속의 둥그런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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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림(苑林)을 마주하면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연못이다. 네모난 모양에 가운데는 둥그런 섬이 있다. 옛 사람들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고 생각했다.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이다. 명옥헌이 만들어질 당시 서양에서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했지만 이 땅의 선비들은 바다 끝으로 나가면 절벽이라고 생각했다.

연못 외곽으로 잘생긴 소나무가 하늘로 쭉쭉 뻗어 있고 연목 가장자리에는 배롱나무가 잘 가꾸어져 있다. 이 배롱나무가 꽃을 피우는 7월이면 명옥헌이 화사하게 꽃단장한 새색시가 된다. 이때쯤이면 전국의 사진가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룬다. 찾아오는 사진가들이야 뭐라 말할 수 없지만 그들이 보는 명옥헌은 피상적인 모습이다. 연못 가장자리에서 정자를 바라보는 모습은 아름다운 배롱나무 꽃이지 옛 사람들의 관점은 아니라는 것이다.

배롱나무꽃이 만발한 8월초 명옥헌
▲ 명옥헌 배롱나무꽃이 만발한 8월초 명옥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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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들과 정반대의 입장, 즉 정자에 앉아서 연못을 바라보아야 정자의 맛과 멋을 음미할 수 있다. 소쇄원도 마찬가지다. 명성을 듣고 찾아간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초라한 모습에 실망한다. 정자에 앉아 옛 사람들의 정취를 느껴보지 않았기 때문에 파생되는 가치의 혼란이다.

우리나라의 누정은 대부분 정면 2~3칸 측면 2칸 정도의 아담 사이즈다. 삼간두옥(三間斗屋)이라 해도 폄하가 아니다. 우리나라 정자의 진정한 가치는 건물의 규모나 건축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주변 경관을 음미할 때 비로소 그 깊은 맛과 멋을 발견할 수 있다.

명곡 오선생 유적비
▲ 명옥헌 명곡 오선생 유적비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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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을 지나 정자에 오르려니 '명곡오선생유적비'라는 비석이 앞길을 턱 막고 서있다. 너무 크다. 아무리 큰 것을 좋아한다지만 연못과 정자에 비해 비례가 맞지 않는 느낌이다. 이러한 문제는 식영정의 '송강 정철의 가사의 터'라는 비석도 마찬가지다. 조상에 대한 과공은 누가 된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는 것 같다.

뒤에서 바라본 명옥헌
▲ 명옥헌 뒤에서 바라본 명옥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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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에 올라 연못을 바라보니 가히 일품이다. 시상이 떠오르고 한시 한수를 읊어보고 싶은 욕망이 불끈 솟는다. 벗이 옆에 있다면 술을 쳐주고 권주가를 불러주고픈 충동이 스멀거린다. 옛사람들의 풍류가 바로 이랬으리라 생각하니 완전 감동이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삼고(三顧)라는 편액이 시야에 들어온다. 유비가 제갈공명을 모신 삼고초려(三顧草廬) 고사에서 따온 말이다.

3고 편액
▲ 명옥헌 3고 편액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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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헌은 오희도를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 오이정이 지은 정자다. 잠깐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때는 후금이 굴기하던 1600년대 초. 대륙의 지각변동을 감지한 광해가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치던 시대. 31살 늦깎이로 진사시에 합격한 오이도는 아버지 나라로 떠받들던 명나라를 멀리한 광해의 외교정책에 회의를 느끼고 낙향하여 은거했다.

임진왜란 때 은혜를 입은 명나라를 멀리하는 것은 배은망덕이라는 소신이었다. 이러한 신념은 비단 오이도뿐만이 아니라 당시 주류사회를 이끌던 서인 사대부들의 공통된 인식이었고 병자호란 시 맨주먹으로 척화를 부르짖다 임금이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라는 치욕을 당했다. 삼배구고두가 뭔가. 세 번 절하고 절할 때마다 머리를 세 번 땅에 찧는 것을 말한다. '맨땅에 헤딩'의 원조다. 해양세력이 퇴조하고 대륙세력이 굴기하는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조가 반정하기 전,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하여 전국을 돌 때 이곳에 들렀고 등극 후, 사람을 보내 조정에 나오기를 종용했다. 인조의 정책이 수구 보수로 회귀한 것을 확인한 오이도는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하였으나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쿠데타 세력에 협조한 그의 행적은 후세의 사가들이 평가할 일이다.

편액
▲ 명옥헌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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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를 벗어나 오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계곡에 물이 졸졸 흐른다. 송강 정철의 넷째 아들 정홍명은 '차가운 물이 흘러내리는데 흐르는 물소리는 마치 옥이 부서지는 소리 같아 듣는 이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더러움이 사라지고 청명한 기운이 스며들어 온다'고 명옥헌기(鳴玉軒記)에서 읊었다. 범인(凡人)의 귀에는 그저 졸졸거리는 소리로 들리는데 역시 멋쟁이들이다.

바위에 새겨진 명옥헌 글씨. 우암 송시열 글씨로 전해져 온다.
▲ 명옥헌 바위에 새겨진 명옥헌 글씨. 우암 송시열 글씨로 전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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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평평한 마당바위가 나온다. 바위에 자리를 깔고 앉아 부채를 펴들고 시 한 수 읊었던 옛 선인들의 풍류가 떠오르는 바위다. 그 바위에 명옥헌이라는 큰 글씨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삼고(三顧)와 함께 송시열의 글씨라 전해져 온다.

우암 계축(癸丑)이라 하면 1673년(현종14년)으로 송시열이 좌의정으로 있던 우암의 전성기다. 송강정 정철, 면앙정 송순, 식영정 임억령이 그러하듯이 남도의 누정 주인들은 서인-노론과 맥이 닿아 있다. 하니, 노론의 좌장 송시열이 당연 들렀을 것이다.

녹음이 우거지고 있다. 5월의 소녀가 부른다. 콘크리트 숲을 벗어나 떠나자.

덧붙이는 글 | 기획기사 ‘한국의 아름다운 숲’이 게재되고 있습니다. 그에 걸맞는 날에 올렸으면 좋겠습니다.



태그:#명옥헌, #소쇄원, #식영정, #담양, #가사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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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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