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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농제 제사상. 나무로 만든 돼지가 웃고 있다.
 시농제 제사상. 나무로 만든 돼지가 웃고 있다.
ⓒ 김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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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세차 단기 4346년 계사년 삼월 스무사흗날, 농부들이 하늘과 땅의 신들께 고하나이다. 저희는 오늘 이곳에서 씨앗을 뿌리고, 우리의 손으로 물을 줘 새싹을 틔우고 열매를 키우는 작은 텃밭농사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올해 키우는 작물 한 포기 한 포기가 풍성하게 자라도록 강한 생명력을 주시고 땀 흘린 노력의 대가가 풍성한 결실로 이어지도록 보살펴주옵소서."

지난 24일 토요일 오후 1시, 서울 문래동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철공소 옥상에 풍성한 제사상이 차려졌다. 문래동 예술가마을과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 모여 가꾸는 공동텃밭이 자리 잡은 150여 평의 옥상이다. 2011년 5월 처음 이곳에 텃밭이 조성된 뒤 세 번째 봄이다.

봄볕이 하도 좋아 따뜻함에 떠밀리듯 하나 둘 올라온 사람들이 모여 어느덧 텃밭이 붐볐다. 오랜만에 만나 서로 안부를 묻던 주부들, 새로 짠 상자화분에 담은 흙을 여기저기 들쑤시던 철공소 아저씨들, 고양이를 쫓아 쏜살같이 뛰어다니던 꼬마들 모두 제사상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시농제에 참여한 주민들이 절을 하고 있다.
 시농제에 참여한 주민들이 절을 하고 있다.
ⓒ 김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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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문을 읽는 이는 '텃밭 대장님'으로 통하는 최영식 (59)씨. 정성껏 준비한 축문을 품에서 꺼내 읽기 시작하자 사방이 조용해졌다. 따사로운 봄볕이 눈꺼풀에 내려앉고 귀 기울이면 축축한 흙 아래서 씨앗이 기지개 켜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 오후. 겨우내 사람 발길이 끊긴 사이 옥상을 접수해 평화롭게 지내던 고양이 두 마리는 떠들썩한 분위기에 낭패를 당한 듯 구석에 숨어 숨을 죽이고 이 광경을 지켜봤다. 

고양이들은 알는지 모르겠지만, 이날 제사는 한해 농사를 시작하는 날 풍년을 기원하며 천지신명께 바치는 '시농제'다.

축문 낭독이 끝나자 모인 사람들이 차례로 나가 절을 올렸다. 남자 농사꾼, 여자 농사꾼, 문래동 어르신들과 입주 예술가들, 현재 진행 중인 2회 옥상농부학교 수강생들까지. 차례차례 나가 엎드려 절하는 사이 웃는 돼지머리 앞에 놓인 돈 통이 가득 찼다.

옥상텃밭에서 보낸 봄여름가을겨울

나는 작년 이맘때 처음 문래동을 찾았다. 그 무렵 열린 1회 문래동 '옥상농부학교' 졸업생이니, 올해로 2년차 도시농부인 셈이다.

2011년 봄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난 뒤, 내 마음은 자꾸 외할머니가 농사를 짓고 계신 해남 땅끝마을 근처를 맴돌았다. 녹색당에 가입해 생애 처음 정치 활동이라는 것에 참여하면서도 마음은 끈덕지게 더 구체적이고 손에 잡히는 것, 이를테면 외할머니의 흙 묻은 손 쪽으로 향했다. 당장 도시를 떠날 수 없다면 아주 조금이라도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할 때 옥상농부학교를 알게 됐다.

작년 봄의 풍성한 텃밭.
 작년 봄의 풍성한 텃밭.
ⓒ 김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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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찾아온 문래동에서 작년 한해 나는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옥상 위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순환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상자와 주머니화분 속에서 작물들은 쑥쑥 자랐다. 봄이면 폭발하듯 자라는 초록색 잎채소들을 솎아 샐러드를 해먹거나 밥에 넣어 비벼 먹었고 여름에는 감자와 가지, 가을에는 갓 캐낸 꿀처럼 달콤한 고구마를 맛볼 수 있었다.

일 년 동안 내게 매주 화요일은 '텃밭 가는 날'이었다. 요일마다 텃밭에 들러 물을 주는 사람이 정해져 있는데 내가 화요일 물당번이었던 것이다. 칼퇴근을 하고 헐레벌떡 옥상에 뛰어 올라가면 나와 이인일조로 물당번을 담당한 '텃밭 언니'가 먼저 와서 둘둘 말린 호스를 풀고 있었다. 옥상 끝에서 끝까지, 구석구석 주의를 기울여 물을 주면서 우리는 일주일 동안 있던 일을 정신없이 이야기했다.

텃밭의 작물들이 계절에 따라 바뀌는 사이, 어느 화요일에 언니는 물을 주면서 펑펑 울기도 했고 어느 날 나는 더 늦기 전에 꿈을 찾아 회사를 그만뒀다. 우리가 속삭이고 하소연하고 결심을 내릴 때 텃밭의 작물들은 안 듣는 척 다 듣고 있었고 심지어 미묘한 떨림으로 공기에 파동을 일으켜 거기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어김없이 봄은 왔고 또 한해 농사가 시작되었다

한해의 농사가 시작하는 날. 옥상텃밭에 사람들이 모여 음식을 나누는 풍경.
 한해의 농사가 시작하는 날. 옥상텃밭에 사람들이 모여 음식을 나누는 풍경.
ⓒ 김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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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가 끝나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햇볕을 쬐며 음식을 나눠먹었다. 메뉴는 보쌈과 주먹밥. 저마다 손에 들고 온 먹을거리가 합해져 식탁은 풍성했다. 작년에 농부학교 신입생이었던 나와 텃밭 언니는 어느덧 선배가 되어 주먹밥을 준비했다.

씨감자를 심는 모습.
 씨감자를 심는 모습.
ⓒ 김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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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들썩하게 먹고 마신 뒤, 씨감자를 심는 것으로 문래도시텃밭의 올 한해 공식적인 농사가 시작되었다. 맹렬하게 파닥거리는 지렁이만 봐도 소스라치던 (지렁이라면 모름지기 비온 다음 날 도로 위에 나온 아이들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는 줄만 알았지 보통 컨디션일 때 그렇게 빠르게 날아다닐 줄은...) 나도 1년차 농부의 면모를 벗고 올해는 좀더 의젓하게 농사일을 배워볼 작정이다.

"하늘과 땅의 신이시여. 자그마한 텃밭농사로 여기 모인 공동체에 생태적인 삶의 소중함을 아는 지혜를 주시고 저희들의 작은 시작이 널리 퍼지기를 기원합니다. 한 잔의 술을 바치오니 흠향하여 주옵소서."

축문의 마지막 구절처럼, 텃밭은 자그마하지만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한다. 신선한 채소, 텃밭에 물을 준 뒤 옥상에서 바라보는 석양,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의 즐거움은 일상을 풍요롭게 만든다.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동네를 향한 관심으로 번지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느리게, 세상을 바라보는 각도를 움직여놓는다.

따뜻한 봄날, 향긋한 흙 내음과 떠들썩한 수다가 그리운 분들, 문래동 옥상텃밭으로 마실 나오시길. 어김없이 봄은 왔고 또 한해 농사가 시작되었다.


태그:#시농제, #문래도시텃밭, #옥상농부학교, #도시농부, #문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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