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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병영마을 돌담길. 설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강진 병영마을 돌담길. 설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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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이 다가왔다. 이맘때가 되면 어렸을 때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때 설날은 평소 먹지 못했던 맛있는 것을 많이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새 옷과 새 신발도 얻을 수 있었다. 설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이유다.

그 분위기가 그리워진다. 그때를 그려볼 수 있는 곳으로 간다. '남도답사 일번지' 강진의 병영면 도룡리에 있는 '와보랑께박물관'이다. 전라도 사투리와 함께 옛 생활용품을 모아놓은 생활유물전시관이다.

박물관 여기저기에 전라도 사투리를 적어놓은 목재판이 즐비하다. 사투리 목재판은 김성우 관장이 직접 써놓은 것이다. 사투리 쓰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갈수록 잊혀져가는 게 안타까워서 그랬단다.

와보랑께박물관에서 만나는 전라도 사투리 목재판. 가장 전라도다운 박물관이다.
 와보랑께박물관에서 만나는 전라도 사투리 목재판. 가장 전라도다운 박물관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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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 와보랑께박물관장(왼쪽)이 장작난로 앞에서 옛 냄비와 양은도시락에 얽힌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김성우 와보랑께박물관장(왼쪽)이 장작난로 앞에서 옛 냄비와 양은도시락에 얽힌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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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제. 학교에 근무할 땐디. 전라도 사투리를 오지게 쓰는 사람이 있었어. 첨엔 귀에 거슬렸제. 무지 듣기 거북하고. 그래서 사투리 좀 작-작 쓰라고 구박 많이 했네. 근디 듣다봉께 그렇게 정겹더라고. 우리 선조들의 살아온 모습이고. 그 시대도 들어있더랑께. 사투리에가."

김 관장의 얘기다. 그날 이후 김 관장은 전라도 사투리에 관심을 가졌다. 틈나는 대로 수집했다. 채록도 했다. 한번 와보랑께, 이리 뽀짝 와바야, 오매 사삭스렁거, 참말로 밸시럽네, 암시랑토 안하당께…. 아이들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르면서도 마냥 웃는다. 외지인들도 재밌어라 한다.

와보랑께박물관에서 만난 양은도시락. 옛 학창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와보랑께박물관에서 만난 양은도시락. 옛 학창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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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보랑께박물관에서 만난 미닫이가 달린 흑백텔레비전. 전원을 공급하자 화면이 고스란히 나온다.
 와보랑께박물관에서 만난 미닫이가 달린 흑백텔레비전. 전원을 공급하자 화면이 고스란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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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는 오래된 생활용품도 많다. 미닫이가 달린 흑백텔레비전은 지금도 화면이 나온다. 라디오도 있고 다이얼 전화기도 있다. 회갑이 넘은 김 관장이 학창시절 자취생활하면서 썼다는 석유곤로도 있다.

지금은 추억 속의 얘기가 돼버린 낡은 교과서와 양은도시락, 이발기도 보인다. 김 관장의 말대로 벼라별 꾸꿈스런 것들을 다 모태 놨다.

불과 30∼40년 전 우리 생활에서 긴요하게 쓰였던 물건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생활에서 밀려난 것들이다. 가난해서 불편했고, 불편해서 더 가슴 아리던 옛 추억을 더듬어볼 수 있는 시간창고다.

복원되고 있는 전라병영성. 옛날 호남 육군의 최고 지휘부였다.
 복원되고 있는 전라병영성. 옛날 호남 육군의 최고 지휘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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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성과 소나무. 아직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성곽길을 걸을 수 있다.
 병영성과 소나무. 아직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성곽길을 걸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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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말로 밸시런 와보랑께박물관에서 나와 전라병영성지(사적 제397호)로 간다. 성지는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2㎞ 가량 떨어져 있다. 조선태종 17년(1417) 초대 병마절도사였던 마천목(1358∼1431) 장군이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쌓았다. 고종 32년(1895) 갑오경장 때까지 제주도를 포함해 53주 6진을 총괄했다. 호남의 육군 최고 지휘부였다.

성의 규모도 대단했다. 성곽의 둘레가 1000m를 넘는다. 그 안에 옹성 12개, 포루 2개, 우물 9개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2층 누각의 남문과 동문, 북문도 있었다. 하지만 동학농민전쟁 때 불에 타 없어지고 성곽만 남았다. 현재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네덜란드 사람 핸드릭 하멜(1630∼1692)도 이 성에서 노동을 했다. 무역을 위해 일본으로 가다가 제주에서 표류한 하멜은 선원들과 함께 압송됐다. 조선에서 13년 동안 살았는데, 그 가운데 절반이 넘는 7년을 보냈다.

하멜보고서는 표류기간의 노임을 자신의 직장이었던 동인도회사에 청구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다. 여기에 당시 하멜 일행이 조선에서 체험한 일들이 생생히 기록돼 있다. 보고서가 출간되면서 동양의 작은 나라 조선이 유럽인들의 관심을 끌게 됐다. 하멜이 조선을 서양에 처음 소개하는 순간이었다.

풍차가 반기는 하멜기념공원 전경. '하멜표류기'의 저자 하멜의 강진 병영 생활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공원이다.
 풍차가 반기는 하멜기념공원 전경. '하멜표류기'의 저자 하멜의 강진 병영 생활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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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보고서 복제본. 하멜기념관에서 만날 수 있다.
 하멜보고서 복제본. 하멜기념관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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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의 흔적은 지척에 있는 하멜기념관에서 만난다. 네덜란드의 상징인 풍차가 서 있는 기념관에 하멜의 생애와 당시 소장 유물이 전시돼 있다. 하멜보고서도 복제품으로 볼 수 있다. 네덜란드의 생활문화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기념관의 주인공인 하멜에겐 이곳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을까. 오랜 시간 억류생활을 하고 동료들의 죽음까지 지켜봐야 했던 고난의 장소였을 것이다. 가슴 한켠이 먹먹해진다.

강진 병영마을 돌담길. 하멜의 영향을 받았는지 지그재그로 빗살무늬 형식을 띠고 있다.
 강진 병영마을 돌담길. 하멜의 영향을 받았는지 지그재그로 빗살무늬 형식을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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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수인산과 병영마을. 돌담길 거닐던 옛 추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마을이다.
 강진 수인산과 병영마을. 돌담길 거닐던 옛 추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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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의 발길은 기념관 옆 병영마을에서도 전해진다. 마을의 담장이 높고 빗살무늬 형식을 띠고 있다. 지그재그로 15도 가량 눕혀 촘촘하게 쌓고 그 다음 층에 엇갈려 쌓았다. 다른 지역과 달리 이색적이다. 마을사람들은 이 돌담의 형태가 하멜의 영향을 받았다며 하멜관련 유적으로 여기고 있다.

마을 풍경도 애틋하다. 투박한 돌담길이 멋스럽다. 어릴 적 친구를 불러내 고만고만한 어깨를 마주하고 돌아 나오던 추억의 공간 같다. 골목길도 넓고 길다. '한골목'으로 불린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병영교회 앞에 서 있는 800년 된 은행나무도 이채롭다. 병마절도사와 관련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하루는 절도사가 폭풍으로 부러진 은행나무 가지를 목침으로 만들어 쓰다가 병에 들었다. 그런데 꿈에 노인이 나타나 은행나무에 목침을 붙여주고 제사를 지내면 병이 낫는다고 했다. 실제 그렇게 했더니 병이 완전히 나았다는 것이다.

주민들이 해마다 음력 2월 보름이면 여기서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내는 것도 여기서 유래하고 있다. 마을도, 담장도 마치 흑백사진 속의 한 장면 같다. 가난해도 정겨웠던 그때 그 시절의 생활용품과 풍경을 고스란히 만날 수 있는 병영이다.

병영마을 돌담과 은행나무. 돌담과 어우러진 마을풍경이 어릴 적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병영마을 돌담과 은행나무. 돌담과 어우러진 마을풍경이 어릴 적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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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길
호남고속국도 동광주나들목에서 광주제2순환도로와 1번국도를 타고 나주로 간다. 나주에서 13번국도 타고 영암읍을 지나 청풍삼거리에서 오른쪽 장흥방면(835번지방도)으로 간다. 이 길로 돈맛재를 넘으면 옴천면이고 기알재를 넘으면 병영면이다. 와보랑께박물관은 여기서 장흥 방면으로 2㎞ 더 가야 한다.



태그:#병영마을, #와보랑께박물관, #하멜, #돌담, #병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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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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