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예능계는 2000년대 중반부터 유례없는 호황기를 누려왔다. <무한도전>·<1박 2일>·<패밀리가 떴다>·<남자의 자격>·<런닝맨> 등 빅 히트 예능이 줄줄이 탄생하면서 폭 넓은 시청자층을 TV 앞으로 불러 모았고, 그 결과 웬만한 드라마보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수준까지 올라섰기 때문이다. 이 중심에 이경규·유재석·강호동·신동엽 등 당대의 톱 예능인들이 자리하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눈 여겨 볼 점은 이들이 모두 남자라는 사실이다. 예능계의 양적·질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여성 예능인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져 가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일까.

여성 예능인은 없는 '이상한 연예대상'

 29일 저녁 서울 여의도 MBC사옥에서 열린 MBC 방송연예대상 포토월에서 <세바퀴>의 개그우먼 박미선이 입장하고 있다.

29일 저녁 서울 여의도 MBC사옥에서 열린 MBC 방송연예대상 포토월에서 <세바퀴>의 개그우먼 박미선이 입장하고 있다. ⓒ 이정민


과거 여성 MC들은 예능계 라인업을 좌지우지할 만큼 막강한 인기를 누려왔다. 이경실·박미선·이영자·조혜련·정선희·송은이·박경림 등은 적게는 3개, 많게는 5~6개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여성 예능인 전성시대를 이끈 인물들이다. 이들은 <진실게임><콜럼버스 대탐험><여걸6> 등 방송사 간판 프로그램의 메인 MC 자리를 줄줄이 꿰차며 주중-주말 구분 없이 전방위적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현재 여성이 메인 MC인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안녕하세요>의 이영자, <해피투게더><우리 결혼했어요><세바퀴>의 박미선이 전부다. 대부분의 여성 예능인들은 고정 패널 수준으로 밀려나 있다. 과거의 영광에 비해 너무 초라한 현실이다.

'여성 에능인 기근 현상'은 각 방송사 연말 연예대상 시상식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쟁쟁한 후보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남자 MC들과는 달리 여성 MC는 별다른 이변조차 없었다. 이번에 KBS 연예대상 최우수상을 수상한 이영자는 2년 연속 같은 상의 주인공이 됐고, MBC 연예대상 최우수상을 수상한 박미선 역시 무려 5년 연속 수상이라는 진기록을 낳았다. 후보부터 수상자까지 지난 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는 남성 MC 집단이 앞서 언급한 당대 최고 MC군단들 뿐 아니라 유세윤·정형돈·노홍철·이수근·김병만·김준호 등 차세대 MC군을 대상 혹은 최우수상 후보로 올린 것과 대조되는 현상이다. 김미화·이경실·박경림 등이 여성 예능인으로서 연예대상을 수상했던 시절과도 비교된다. 갈수록 이들 간의 차이가 커져가고 있는 것이다.

 <2012 KBS 연예대상>에서 여자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이영자

<2012 KBS 연예대상>에서 여자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이영자 ⓒ KBS


거물급 여성 예능인 계보, 왜 끊겼나

그렇다면 왜 이렇게까지 여성 예능인의 퇴조현상이 심각해 진 것일까.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쓸 만한 인물'이 부재했다는데 있다. 2001년 박경림 이후, 방송계는 주목할만한 여성 MC를 찾아내지 못했다. 신봉선·김신영 등이 간간히 등장하기는 했지만 쉽게 메인 MC 자리로 올라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장영란·김나영·정주리 역시 고정패널 이상의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성미-이경실-박미선-이영자-정선희-박경림으로 이어진 거물급 여성 예능인의 계보가 끊어져 버린 것이다.

구심점이 없는 것도 문제였다. 남성 MC의 경우 30년 경력 이경규가 대내외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며 새로운 후배들을 끊임없이 추천, 발굴해냈다. 김용만·강호동·김구라·이윤석 등 직계는 물론이고 김국진·유재석·박명수·정형돈 등 방계에 이르기까지 남성 예능인 대부분은 이경규를 중심으로 넓고 강한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다. 이른바 '규라인'이 그것이다.

이에 비해 여성 예능인 중에는 이경규 같은 인물이 없다. 애초에 이성미·이경실이 이 역할을 해줬어야 했는데 이성미는 캐나다 이민, 이경실은 가정사로 인해 각각 중심에서 밀려났고 이들 대신 구심점이 됐어야 할 이영자·정선희·박경림 역시 각자의 이유로 낙마했다. 이처럼 굵직굵직한 존재감의 여성 예능인 대부분이 부침을 겪으면서 선후배간 '밀어 주고 끌어주는' 문화가 사라진 건 매우 아쉬운 일이다.

설상가상으로 2000년대 중반 '리얼 버라이어티' 붐은 여성 MC들의 설자리를 더욱 좁게 만들었다. 이 시기 '예능 대세' 유재석-강호동은 각각 <무한도전>, <1박 2일>으로 장시간의 야외 촬영, 현장에서 직접 깨지는 스타일의 예능을 트렌드화하며 집단 남성 MC 체제를 고착화 시켰다. 이러한 트렌드는 스튜디오 녹화와 토크에 강한 기존의 여성 MC들이 쉽게 적응하기 힘든 성질의 것이었다. 즉 개인적 인물난과 구심점의 부재, 트렌드의 변화라는 세 가지 악재 속에서 대부분의 여성 예능인들은 주변부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방송사와 예능인 모두의 노력 필요하다

 MBC <무한걸스> 멤버들

MBC 에브리원 <무한걸스> 멤버들 ⓒ MBC


현재 여성 예능인 집단의 부진은 구조적 문제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없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매우 비좁기 때문이다. 2012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박미선이 "더 많은 장르를 개발해 주셔서 우리가 일 할 수 있는 마당을 만들어 주시길 바란다"고 말한 부분을 방송 관계자들은 새겨 들을 필요가 있다.

비록 시청률 저조로 폐지되기는 했으나 <영웅호걸><청춘불패>같은 프로그램을 시도한 것은 매우 좋은 선택이었다. 단기적으로 다소 힘들 수도 있겠으나, 장기적으로 이런 프로그램의 제작은 다양한 여성 예능인을 발굴한다는 측면에서 후한 점수를 받을 만하다. 제작진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강점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이런 작품을 만드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

여성 예능인들 스스로 쇄신을 꾀할 필요도 있다. 트렌드를 쫓아가려는 노력 뿐 아니라 이미지 개선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이경실·김지선 등 최근의 여성 예능인들은 '줌마테이너'의 틀에 갇혀 너무 아줌마스러운, 오버스럽고 시끄러운 캐릭터만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굳이 이럴 필요는 없다. 박미선이 공중파와 케이블을 넘나들며 누구보다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이유는 대중이 기대하는 여성 예능인 본연의 깔끔하고 세련된 진행을 선보이기 때문이다. 먼저 변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제작되기 힘들다.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든다는 건 여성 예능인계에 크나큰 손실이다. 방송사와 예능인 모두의 처절한 고민과 노력이 있어야 편향된 현재의 예능계를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여성 예능인들이 다양한 캐릭터로 마음껏 웃고 떠들며 활동하는 시대, 그 때가 하루 빨리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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