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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 동안 공무원 생활을 해온 A씨는 "지금의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관련 기사 : <충남경찰청, 개인 블로그까지 사찰 논란>)

지난 7월 25일 아침. A씨(52)는 평소처럼 출근을 위해 아파트 현관문을 열었다. 7~8명의 청장년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경찰청 보안과와 충남경찰청 보안수사대 직원들이라고 했다.

"압수수색 영장입니다. 협조해 주십시오."

'이유가 뭐냐'는 물음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느닷없는 상황에 눈앞이 깜깜했다. 그들은 안방과 거실 등을 오가며 책과 서랍을 뒤졌다. 한참을 이 잡듯 뒤지던 그들이 압수한 것은 단 하나, 컴퓨터 하드디스크였다.

같은 시간 그가 전에 일하던 충남도청 사무실과 모 시청 사무실에도 경찰 직원들이 들이닥쳤다. 대대적인 압수수색에 동료 공무원들은 사정 당국에서 뇌물수수 등 비위 혐의로 물증을 채증하기 위한 것으로 오해하기까지 했다. 

때 아닌 압수수색... '보안법 위반 혐의' 답변에 오히려 '담담'

경찰청 보안과가 지난 3일 공무원 A씨를 남북관계 등에 대한 인터넷 게시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게시,공개한 혐의(국가보안법 찬양고무)로 불구속 기소 의견으로 송치했다. 사진은 A씨의 해당 블로그 화면 갈무리.
 경찰청 보안과가 지난 3일 공무원 A씨를 남북관계 등에 대한 인터넷 게시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게시,공개한 혐의(국가보안법 찬양고무)로 불구속 기소 의견으로 송치했다. 사진은 A씨의 해당 블로그 화면 갈무리.

알고 보니 지난해 4월부터 자신의 블로그에 퍼다 나른 글이 찬양고무에 해당된단다. 오히려 담담해졌다. 경찰이 뭔가 잔뜩 오해를 한 모양이라고 단정했다. 시사문제에 대한 글을 여기저기서 퍼다 날랐지만 모두 인터넷 언론에 게재된 시사전문가들의 공개된 글이다. 직접 작성한 글은 단 한 건도 없다. 글을 쓴 사람들이 보안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거나 처벌을 받은 사실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어떻게 알았는지 한 기자가 연락을 해왔다. 정중히 취재를 거절했다.

"개인 블로그에 시사 관련 글을 모아 놓았는데 어떤 글이 왜 문제가 된다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별일 아닌 듯하니 공연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경찰도 내막을 들여다보면 '잘못 짚었다'고 깨달을 것으로 생각했다. 지난 9월 11일. 해당 시청에서는 그를 면사무소로 발령했다. 충남도 본청에서 시청으로 발령된 지 2개월 만의 일이다. '경찰의 단순 조사대상에 오른 것뿐인데 좌천성 인사라니...'

무너지는 낙관... '내사자' 신분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같은 달 말 경찰에서 출석요구서가 날아왔다. 변호사를 만나 상담했다. '기소될 일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내친김에 변호사를 선임했다.

그의 낙관은 경찰 첫 조사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경찰은 국내 사이트에 공개된 글이라도 블로그에 옮겨 공개하면 보안법에 저촉된다고 했다. '처음 알았고 북한을 찬양할 목적이 전혀 없었다'고 강변했지만 2차 조사(10월 20일) 때부터 그의 신분은 '피내사자'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바뀌었다.

수사관이 미리 죄를 만들어 놓고 몰고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사관 교체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경찰청 보안과 소속 수사관이 말했다.

"대검과도 충분한 협의와 사전 검토가 있었다. 100% 유죄다. 조사에 협조하면 반성문을 첨부해 신병만은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선처 의견을 낼 수 있다."

무혐의는 생각도 하지 말고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게 해 줄 테니 협조하라는 얘기였다. 이미 짜인 결과에 맞춰 기획수사를 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무죄를 장담하던 변호사도 기소를 피하기 어렵다고 말을 바꾼 후 사임했다.
 
사정도 해봤다.

"남의 글을 옮겨놓는 것만으로 죄가 되는 줄 몰랐습니다. 무지가 죄는 아니지 않습니까. 살려주세요."

사정도 해봤지만... 불구속 기소의견 검찰 송치

한 시민이 검찰 로고 옆을 지나가고 있다.
 한 시민이 검찰 로고 옆을 지나가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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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경찰은 지난 3일 A씨를 '불구속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경찰은 A씨가 인터넷 언론에 게재된 한호석 통일연구소장과 예정웅 재미교포의 글 전문을 퍼다 자신의 블로그에 게재해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혐의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인터넷 언론인 <자주민보>의 정세분석 기사를 퍼다 게시한 것도 혐의내용에 포함됐다.

경찰이 국가보안법 혐의를 적용한 대상 글은 모두 84건에 이른다. 글 제목을 보면 '그 많은 독극물 고엽제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위키리크스에 노출된 대북정책의 비밀' '3차 북미 고위급회담 합의문과 향후전망' 등이다.

"개인적 관심이 죄가 되다니요?"

자칭 보수주의자인 A씨는 지난해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사건을 접하며 '북한과의 지나친 긴장관계와 물리적 충돌만은 피하는 지혜가 국익을 위해 이롭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개인적 관심을 몇 안 되는 블로그 친구들과 함께 고민해 보자는 게 전부였다.    

"개인적 관심이 죄가 되다니요……. 취미생활에 보안 당국이 그토록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블로그까지 감시할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문제가 있는 글이었으면 퍼 나르지 못하도록 미리 계도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국제앰네스티(사면위원회)는 지난달 29일 '국가보안법, 안보의 이름으로 표현과 결사의 자유를 제약하다'란 이름의 보고서를 통해 "단순히 온라인상에 '친북' 게시물을 올렸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국가보안법을 적용받은 것으로 나타났다"며 "정치적 동기에 따라 국가보안법이 적용되고 있어 인권 침해 수준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공무원연금법에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공무원에게는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A씨는 난생처음 검찰 조사를 앞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태그:#국가보안법 , #찬양고무, #공무원, #블로그, #경찰청 보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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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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