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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임 여사는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태어났다. 그녀는 1934년 개성 호수돈 여고를 졸업하고 의학공부까지 했다. 당시로써는 '인텔리 현대 여성'이었다. 김 여사는 그로부터 2년 뒤인 1936년 경성사범을 졸업한 교육자인 서정구 선생과 결혼해 1938년 태어난 딸 서영선을 포함해 슬하에 6남매를 뒀다.

그 후 서정구 선생은 해방 후에 교장과 장학사를 지내며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서정구-김덕임 부부는 자녀와 함께 단란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전쟁은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비극과 말 못 할 불행을 안겨다 주지만 특별히 이 다정다감한 부부의 딸, 당시 13세 소녀 서영선에게 닥친 삶의 비극은 너무 컸다.

1·4후퇴가 막 시작되던 1951년 1월 6일의 춥고 매몰찬 겨울. 6남매 엄마이자 30대 가정주부 김덕임 여사는 강화도 갑곳나루터에서 향토방위대라는 청년들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1살짜리 젖먹이 아들과 함께 뒤에서 쏘는 총에 맞아 죽었다. 그리고 그 추운 겨울날 그녀와 1살짜리 젖먹이 아들의 몸은 차디찬 겨울 바다에 던져졌다.

왜 이런 끔직한 일이 일어났을까

서영선씨가 강화에 세운 어머니 시비
 서영선씨가 강화에 세운 어머니 시비
ⓒ 서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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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약 열흘 전인 1950년 12월 27일 밤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전쟁 중이라 어수선한 분위기에서도 김덕임 여사는 6남매 자녀들과 단칸방에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전쟁 중 실종된 남편 걱정에 잠을 제대로 못 이룬지도 꽤 오래됐다.

그날 밤 집 밖에서 유난히 쿵쾅거리는 소리가 났다. 13살 소녀 서영선은 이상한 불안감에 몸을 바짝 움츠렸다. 그리고 곧 흙이 뭍은 신발을 신고 검은 복면을 한 장성한 남자 3명이 방문을 박차고 그들이 살던 단칸방으로 쳐들어왔다. 복면을 쓴 사람들은 조그만 단칸방 이곳저곳을 어지럽게 막 뒤졌다. 물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1살짜리 아기를 업고 불안하게 서 있는 서영선씨 어머니 김덕임 여사를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거칠게 끌고 나갔다. 김덕임씨는 복면 쓴 건장한 남성들에게 밖으로 끌려나가면서도 한겨울에 부모도 없이 차디찬 방안에 올망졸망 혼자 있는 다섯 아이들의 앞날을 걱정했지만 별수 없었다.

이날 강화도의 한 조그만 마을에서 이렇게 영문도 모르게 밤에 끌려나간 사람들은 김덕임 여사 같은 부녀자 15명을 포함해 모두 60명 정도였다. 복면을 쓴 남자들은 이들을 강화도에 한 양조장에 가뒀다가 며칠 뒤에 옛 곡물검사소 건물로 데려가 감금했다.

이들이 갇혀 있는 바닷가가 가까운 곡물검사소 건물은 웃풍이 심했다. 1월의 추운 겨울이었지만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난방은 물론 안 들어왔고 이불도 한 장 없었다. 화장실도 없었다. 이들이 갇혀있던 약 열흘 동안 이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들은 문자 그대로 춥고 배고픈 곳에서 열흘 동안 주먹밥 하나 먹지 못하고 기아상태로 고문을 받았다.

1살배기 아기가 배고프다고 아무리 울어도 엄마 김덕임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김덕임 여사는 그 와중에서도 한겨울에 다섯 아이들 혼자서 냉방에서 어떻게 지낼까를 걱정했다. 당시 자녀들의 나이는 14살·12살(서영선)·9살·6살·4살·1살. 이것이 곧 생지옥이 아닌가.

그래도 학살은 계속됐다

그 후 1951년 1·4후퇴부터 2월 말까지 강화 향토방위 특공대에 의해 강화 전역에서 민간인 학살이 벌어지고 1살배기 갓난아이부터 부녀자·노인까지 약 500~700명의 사람들이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개가 갯벌 나가면 사람 다리 하나 물고 올 정도'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이들이 학살당한 이유의 대부분은 이승만 정권이 서울을 비우고 도망간 사이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인민군을 돕는 '부역 활동'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럼 인민군이 총을 들이밀고 밥을 하라고 하는데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그것이 부역 행위였고 그래서 그들은 차디찬 겨울 그렇게 어린 자식들을 남겨두고 고문당하고 학살당해야 했다. 그리고 학살은 이른바 부역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에게까지도 자행됐다.

1950년 12월 말부터 전황이 나빠지자 강화우익특공대는 인민군을 따라 월북했거나 실종된 사람들의 가족을 강화읍내 양조장 건물에 잡아 가뒀던 것이다. 그래서 서영선씨 어머니 김덕임 여사도 그렇게 끌려간 후 학살됐다. 그리고 자녀들은 평생 '빨갱이 자식'이라는 연좌제의 쇠사슬에서 끊임없는 감시·불이익과 탄압을 겪으며 반세기 이상을 살아야 했다.

강화도는 휴전선이 가까운 지역. 갑자기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서영선씨 가족을 포함한 다수의 강화주민은 피난 갈 틈도 없었다. 그녀는 공부하던 학교에서 전쟁을 맞았다.

피난을 가지 못한 서영선씨 아버지는 지식인들을 그냥 두지 않았던 인공시절 인민군들의 총칼에 위협을 당했고, 어쩔 수 없이 부역을 했다. 그래야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그렇게 인공시절 3개월을 보낸 뒤 서영선씨 아버지 서정구 선생은 실종됐다. 그러자 9·28 수복을 맞으며 서영선씨 어머니와 6남매는 '빨갱이 가족'으로 몰렸던 것이다.

서영선씨는 어머니가 학살 전 곡물창고에 갇혀 있었을 때 면회 한 번 가보지 못하고 따뜻한 밥 한 끼 해드리지 못한 게 평생 지울 수 없는 한으로 남아 있다. 창고 앞까지 갔지만 가슴이 떨려서 돌아왔고, 검은 복면을 쓴 어른들이 무서워서 어머니를 다시 찾아가지 못했다고.

어머니와 1살배기 남동생이 한밤중 졸지에 끌려가 학살당하고 서영선씨를 포함 5남매는 고아가 됐다. 서영선씨 5남매를 큰집에 데리고 가시던 77세 할머니도 강화도 외포리고개에서 우익특공대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됐다.

전쟁은 이렇게 1살배기 아기도, 6남매의 엄마도, 77세의 할머니도 '빨갱이'라고 때려죽인 것이다. 한국의 사상가 함석헌(1901~1989)은 그의 글에서 "우리 민족은 착하고, 남을 괴롭힌 적도 없다"고 했지만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함석헌의 생각에 전혀 동의하지 않게 됐다.

끝나지 않은 참혹한 비극... '빨갱이 자식'

서영선 잔 강화유족회장
 서영선 잔 강화유족회장
ⓒ 서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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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 소녀 서영선씨가 14세 언니와 전쟁통에 동생 3남매를 키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녀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6살배기 여동생은 영양실조로 죽었고 서영선씨는 배고파 죽어가는 여동생의 모습을 그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또 어린 남동생은 경찰이 학교에 찾아온 뒤 '빨갱이 자식'이라고 해 학교에서 심한 왕따를 당했다. 그리고 집으로 오던 도중 의문사 당했다.

그 뒤 서영선씨와 언니, 그리고 동생들은 어쩔 수 없이 헤어져 친척집을 전전하거나 모르는 사람 집에서 먹고살기 위해 머슴처럼, 하인처럼 일해야 했다. 아래 동생은 보육원에 보내졌다. 자라는 동안 서영선씨와 그 남매들이 '빨갱이 자식'으로 불리며 지난 몇십 년 동안 연좌제로 얼마나 숱한 고생과 갖은 수모를 겪었는지 이 기사에 필설로 기록하기는 불가능하다.

나중에 연좌제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서영선씨가 목숨을 걸고 자기 어머니와 가족에게 총을 쏜 가해자들을 찾아 학살의 이유를 물어봤다. 그러자 "위에서 시켜서 안 하면 나도 빨갱이로 몰리니까 그저 죽였다"는 허망한 대답이 돌아왔다.

당시 우익치안대 일을 하던 한 사람은 서영선씨에게 "너희 아버지는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었다"고 했단다. 그러고 보니 서씨는 장학사였던 아버지가 선생을 발령내는 과정에서 일부 선생들의 미움을 사 빨갱이로 고발당한 게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서영선씨는 기자와의 인터뷰 중 "엄마가 복면 쓴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그날 밤, 너무 무서워서 '엄마!'라고 목 놓아 불러보지 못한 게 지금까지 천추의 한으로 남아요"라고 되풀이하며 울먹였다. 그녀 어머니와 1살배기 동생이 학살되기 전 갇혀있던 그 양조장은 지금도 강화도에 그대로 있다. 그래서 서영선씨는 그곳에 갈 때마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벅차오르는, 말 못할 슬픔 때문에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다고 한다.

당시 강화의 우익유격대들이 부녀자와 노인·어린아이를 바다로 내몰고 등 뒤에서 총을 쐈다. 이유는 '부역을 했다' 또는 '가족이 좌익이다'라는 것. 당시 강화 곳곳에선 이처럼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들이 죽었다. 그러나 학살의 실체와 진실은 최근까지 은폐돼 왔다.

"천대와 차별, 몇 푼 돈으로 풀어집니까"

지난 2008년 7월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는 "139명을 포함한 430여 명 이상의 강화(강화도·석모도·주문도) 지역 민간인들이 한국전쟁 기간 중 북한 점령 시기의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1951년 1·4후퇴를 전후한 시기에 '강화향토방위특공대'에 의해 특공대 본거지인 강화경찰서와 면지서 등으로 연행·구금되어 고문을 당한 뒤 갑곶나루·옥림리갯벌·월곶포구·돌모루포구·철산포구·온수리 사슬재·선원 대문고개·매음리 어류정 등지로 끌려가 집단학살 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이어 지난 2009년 3월에도 "강화(교동도) 지역 민간인 희생사건의 희생자로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모두 183명"이라며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지난해 7월, 서영선씨를 포함한 강화민간인학살사건 희생자 유족들은 진실위에서 이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한 후 3년 만에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지난 9일 서울중앙지법 민사32부(재판장 서창원)는 서영선씨 등 한국전쟁 당시 우익단체에 의해 학살된 피해자 자녀 등 유족 10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서씨 등 9명에게 "국가는 피해자 및 유족들에게 5억3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피해자에게 8000만 원, 피해자 배우자에게 4000만 원, 자녀에게 800만 원씩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당시 우익단체인 강화 향토방위특공대 등이 경찰의 지시 또는 묵인 방조하에 민간인들을 희생한 것이 인정된다"며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비무장 상태인 주민들을 총살했다, 그래서 국가는 이 사건희생자들과 유족들이 겪은 정신적 고통에 상응하는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이제 비로소 강화 민간인학살사건이 발생한 지 61년 만에 학살 책임이 국가에 있다는 것이 인정돼 유족들이 배상을 받게 된 것이다.

"그동안 말 못할 고통과 걱정 속에서 살았는데 뒤늦게나마 명예회복이 돼 기쁘고 반갑습니다. 어머니가 학살당했을 때가 1월이었는데 엄동설한에 온기 하나 없는 찬 시멘트 바닥에서 얼마나 고통의 나날을 보내셨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밥이 넘어가지 않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습니다.

저는 당시 너무 어리고 무서워서 굶주린 어머니에게 밥 한 끼라도 해다 드릴 생각도 못했습니다. 또 이불 한 장 없이 그 겨울 추위에 벌벌 떠는 어머니에게 따뜻한 옷도 갖다 드려야 한다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아, 이 천추의 이 한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지난 60년 동안 '빨갱이 자식'이라고 불리며 온갖 천대를 받으며 고아로 산 한 맺힌 억울함이 몇 푼 돈으로 풀어지기나 할까요? 그동안 겪은 말 못 할 고통과 아픔에 비하면 국가배상금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유족들과 항소 여부를 검토하고 있습니다."(서영선씨)

진실은 규명됐지만 가해자 반성은 없어

훼손된 유해매장 안내문. 화살표 한 부분에서 안내문이 찢겼다는 것을, 아래 동그라미 친 부분에서 도구로 안내문을 찌그러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훼손된 유해매장 안내문. 화살표 한 부분에서 안내문이 찢겼다는 것을, 아래 동그라미 친 부분에서 도구로 안내문을 찌그러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강화·강신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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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손되기 전 유해매장 안내문. 안내문에는 "이 장소는 1951년 한국전쟁 시기에 발생한 강화지역 집단학살 유해매장 추정지이므로 함부로 훼손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라고 적혀 있다(2009년 3월 작성).
 훼손되기 전 유해매장 안내문. 안내문에는 "이 장소는 1951년 한국전쟁 시기에 발생한 강화지역 집단학살 유해매장 추정지이므로 함부로 훼손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라고 적혀 있다(2009년 3월 작성).
ⓒ 강화·강신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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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진실위 안병욱 위원장은 이번 판결과 관련된 감회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가해자가 반인륜적 가해행위를 부인하거나 여전히 정당화하는 데도 사법부가 이런 판결을 통해서 가해행위를 인정해 준 것에 큰 의미를 둡니다. 그런데도 가해자는 여전히 반성하지 않고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지금도 강화에서는 민간인 유해가 묻힌 곳을 알리는 표지판이 훼손당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사회의 갈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사법부의 이번 판결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지난 4월 강화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집단학살 된 민간인 유해가 묻힌 곳을 알리는 표지판이 크게 훼손돼 유족들은 강화군청과 경찰에 범인들을 잡아줄 것을 요구했다. 강화군 길상면 산 중턱에 한국전쟁 당시 우익세력이 학살한 민간인 유해 매장지임을 알리는 높이 2m에 가로 1.2m 크기의 안내판이 크게 훼손됐던 것이다. 그 후 유족들의 항의로 강화군청에서 이 표지판을 새로 설치했지만, 즉시 훼손됐다. 지금도 안내판은 여전히 파손된 채 방치돼 있다.

'강화도 민간인 집단학살 희생지'라고 적힌 이 안내 표지판은 진실위에서 '1951년 1·4후퇴 당시 강화지역 주민 400여 명이 억울하게 집단학살 돼 암매장됐다'는 결정이 나온 뒤인 2008년 11월 세워졌다.

서영선씨는 당시 "진실위와 강화군청이 세운 시설물을 훼손한 것은 국가폭력 희생자와 그 가족의 가슴에 또다시 대못을 박는 행위"라며 "철저히 수사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할 것"이라고 했지만, 이 안내 표지판은 지금도 훼손된 채 그대로 방치돼 있다.

지금도 잠 못 이뤄

2012년 11월 14일 새누리당사 앞에서 중단된 과거청산 계속을 주장하며 1인시위를 하고 있는 서영선 전 강화유족회장 모습. 11월 9일 강화사건 1심 승소에도 불구하고, 미신청인 추가조사와 보배상을 위한 특별법제정을 주장하고 있다. 팔순이 다 되어가면서도 올해 들어 가장 춥다는 날, 매서운 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12시부터 1시까지 자리를 지키셨다.
 2012년 11월 14일 새누리당사 앞에서 중단된 과거청산 계속을 주장하며 1인시위를 하고 있는 서영선 전 강화유족회장 모습. 11월 9일 강화사건 1심 승소에도 불구하고, 미신청인 추가조사와 보배상을 위한 특별법제정을 주장하고 있다. 팔순이 다 되어가면서도 올해 들어 가장 춥다는 날, 매서운 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12시부터 1시까지 자리를 지키셨다.
ⓒ 신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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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선씨는 지금도 잠을 자다가 중간에 다시 깨면 잠들 수 없다고 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잠을 깬 순간부터 1951년 1월 추운 겨울밤 어머니가 잡혀가는 모습이 떠오르고, 그때 왜 나는 '엄마!' 를 부르지 못했나, 밥이라도 싸다 주지 못했나, 누구를 찾아가지 못했나 하는 생각이 막 나면서 속에서 금방 미칠 것 같은 열불이 납니다. 그러다가 '아니다. 나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 나는 병들면 안 된다. 나는 자야 한다'라며 억지로 잠을 청합니다. 갖은 병 때문에 고생하기도 하고 몸도 여기저기 아프지만, 할 일을 다 하고 죽어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서영선씨는 "남북 모두 한국전쟁의 피해자"라며 "기막힌 일이 얼마나 많았나, 그래서 우리 젊은이들이 역사적인 인식을 잘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전쟁기 학살은 학교 교과서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데, 전쟁의 역사를 올바로 알아서 앞으로는 절대 전쟁이 없는 세상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자 셋을 둔 그는 "제가 살았던 악몽 같은 세상을 손자들이 살지 않길 바란다"며 "그래서 이번 선거에서 우리가 대통령을 잘 뽑고, 동족끼리는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영선씨가 쓴 시를 끝으로 이 기사를 마무리한다.

침묵
                          서영선
지리산 봉우리
엄마의 젖무덤 같은
부드러운 능선
넘고 넘어 보아도 그 비극
간 데 없고 계곡에 흘렀던 핏빛
저녁 노을같이 물들고
사운대는 나뭇잎 육십일년 전의
그 비극 어이 모르는가
총성은 구름에 가리고
쏟아지는  노도에 말은
묻혀 버리는데
노고단 천왕봉은 침묵만 지키는구나


▲ 서영선 약력
- 서울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숙명여자대학교 사회교육원 문예창작과 수료. 1988년 순수문학 시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양천문인협회 회원
- 작품집: 시집 <하얀 눈위에 첫 발자국> 외 2권, <한(恨)과 슬픔은 세월의 두께만큼>(자서전)
- 수상 경력 : 영랑문학상·양천문학상·민족평화상·평생학습상
- 현재 강화 민간인희생자 유족회 회장·재경 유족회 고문·민간인학살명예회복을위한 범국민위원회 운영위원

[알림] 민간인 희생자 전국합동위령제
-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희생자 전국합동위령제와 삭발투쟁식행사가 아래와 같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의 참여와 지지를 요청 드립니다.
일 시 : 2012년 11월 20일(화) 오후 2시
장 소 :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주 관 :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전국유족회
후 원 : 조계종, 추모연대, 제주 4·3 평화공원, 노근리국제평화재단

-  전국합동위령제 주요 참석자 명단
▲ 문재인(민주통합당 대통령후보) 안철수(무소속 대통령후보) 자승스님(조계종 총무원장) 김원웅(전 국회통일외교통상부위원장) 안병욱(전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
▲ 참석예정자 : 전국 유족 300여 명, 이해찬, 이낙연, 인명진, 이정희, 심상정, 박원순. 임수경, 이부영, 박중기, 배은심, 전순옥, 추미애. 문병호, 이강실. 전창일, 김병태, 정병호,  최천택, 김명운. 배은심. 전태삼 등.
▲ 참가단체 : 진보연대, 유가협, 추모연대, 4월 혁명회, 4,9인혁재단, 항일독립운동협의회.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좋은어버이들, 새날희망연대, 평통사.역사정의실천연대.민주화기념사업회.박종철기념사업회.이한열기념사업회,학산윤윤기기념사업회, 제주 4·3평화공원, 노근리국제평화재단, 민변, 범국민위원회.
▲ 문 의 :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희생자 전국유족회 02-418-5252



태그:#서영선, #강화학살, #진실위, #위령제,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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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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