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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뜰에서 본 경주박물관. 실물과 같은 크기, 모양의 석가탑과 다보탑이 좌우로 세워져 있다.
 뒤뜰에서 본 경주박물관. 실물과 같은 크기, 모양의 석가탑과 다보탑이 좌우로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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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시내로 간다. 물론 경주 시내는 걸어다니면서 답사를 해야 한다. 답사라는 말 자체가 발로 땅을 밟으면서(踏) 살피라(査)는 말 아닌가. 게다가 경주는 그리 넓지 않아서 도보 여행을 하는 데에 특별히 어려울 일도 없다. 

가장 먼저 방문할 곳은 말할 것도 없이 '국립 경주박물관'이다. 경주박물관은 1913년 경주유적보존회라는 단체가 조선 시대 경주부 관아 건물을 활용하여 연 진열관이 그 시초다. 그후 1926년 들어 진열관은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이 되었고, 1945년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출범한다.

관람객들에게 큰 인기를 끄는 삼화령 애기부처. 남산의 삼화령은 향가 <안민가>의 작가 충담사가 불공을 드리던 곳이다.
 관람객들에게 큰 인기를 끄는 삼화령 애기부처. 남산의 삼화령은 향가 <안민가>의 작가 충담사가 불공을 드리던 곳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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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국립박물관이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었다고해서 경주가 옛날부터 줄곧 소도시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천년' 역사의 나라 신라에서, 그것도 그 천년 세월 내내 한 나라의 서울 자리를 지켰던 경주다. '신라의 서울'과 지금의 경주를 맞비교하지 말라는 말이다.

삼국유사는 헌강왕(875∼886년 재위) 때에 '自京師至於海內(서울에서 바다 인근까지) 比屋連墻 無一草屋(집들의 담이 줄곧 이어져 있었는데 초가집은 한 채도 없었고) 笙歌不絶道路(악기와 노랫소리가 도로에서 끊이지 않았다)'라고 전한다.  


박물관 들어가자 마자 '에밀레종'이 반겨준다


국보 29호인 성덕대왕신종. 높이 3.658m의 이 종은 흔히 "에밀레종"이라 불린다. 국립경주박물관 도록은 이 종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빼어난 종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아름다운 종의 형태와 무늬, 심금을 울리는 종소리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국보 29호인 성덕대왕신종. 높이 3.658m의 이 종은 흔히 "에밀레종"이라 불린다. 국립경주박물관 도록은 이 종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빼어난 종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아름다운 종의 형태와 무늬, 심금을 울리는 종소리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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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나그네를 환영하는 것이 바로 성덕대왕신종이다. 이 국보 29호 종은 언제나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있는 곳을 알지 못하는 채로 박물관을 찾은 사람도 그 위치를 단숨에 알게 된다.

이 종은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구리 12만 근을 내놓으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경덕왕은 죽었고, 시작한 지 34년만인 771년(혜공왕 7)에 겨우 완성되었다. 높이 3.77m, 둘레 7m, 아래 두께 22cm, 위 두께 10cm, 무게 20∼ 22톤의 이 종은 현재 나라 안에 남아 있는 가장 큰 종이다.

흔히 '에밀레종'이라고 불리는 성덕대왕신종에는 애절한 설화가 따라다닌다. 설화는 종을 다 만들었을 때 소리가 나지 않아서 생겨났다. 그때 한 스님이 '며칠 전 시주를 할 게 없다던 그 집의 아이를 끓는 물에 집어놓고 새로 만들어야 소리가 난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꿈에 들었다고 말했다.

결국 일은 그렇게 진행되었다. 드디어 완성된 종을 치니 너무나 아름다운 소리가 나서 사람들의 귀가 멀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종이 울릴 때에 가끔 아이가 제 어머니를 찾아 흐느끼는 소리 "에밀레, 에밀레"가 섞여 있다는 것이었다.

에밀레종의 무늬
 에밀레종의 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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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성덕대왕신종의 명문(銘文)에는 '신종이 만들어지니 그 모습은 태산 같고, 소리는 용이 읊조리는 듯하여 하늘의 끝에서 땅속 마지막까지 울려퍼진다. 보는 이는 신기함을 느낄 것이요, 듣는 이는 복을 받으리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과연 종 앞에 서면, 누구나 온몸을 짜릿하게 뚫고 지나가는 신비로운 전율을 느끼게 된다. 마치 종이 울려 그 비범한 소리가 핏속까지 뼛속까지 흘러가는 것만 같다.

우선 20∼22톤이나 되는 쇠종이 비각의 천정에 매달려 있는 광경부터가 눈길을 끈다. 현대의 기술을 총동원해도 에밀레종이 매달려 있는 고리를 만들지 못한다고 하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꽃구름 속에서 무릎을 세우고 앉은 채로 두 손 모아 공양하고 있는 선인(仙人)의 모습을 아로새긴 비천상(飛天像)도 눈이 뚫어져라 쳐다보게 만든다. 그는 무엇을 빌고 있을까.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자 이 종을 만들기 시작했던 경덕왕의 마음을 대변하여 성덕왕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있을까.

고선사터 삼층석탑. 국보 38호. 원효가 머물렀던 고선사 터에 있던 이 탑은 1975년 절터가 댐에 수몰되면서 경주박물관 뒤뜰로 옮겨졌다.
 고선사터 삼층석탑. 국보 38호. 원효가 머물렀던 고선사 터에 있던 이 탑은 1975년 절터가 댐에 수몰되면서 경주박물관 뒤뜰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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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성덕대왕신종의 소리를 '듣는 이는 복을 받으리라'는 명문의 한 구절이 뇌리를 때린다. 여운이 3분이나 계속된다는 신종의 소리는 언제 들어볼 수 있으려나. 조선 시대에는 경주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정오, 삼경 그리고 급한 일이 발생했을 때 등 수시로 쳤다는데, 2004년 이후로는 종을 보호하기 위해 타종이 금지되었다고 하니, 언제나  이 종 소리를 들어볼 수 있을까. 도대체 어느 세월에 신종의 울림에 젖어 복을 받을 수 있으려나.


박물관 뒤편의 '머리 없는 불상들'


박물관 건물 뒤로 가면 볼 수 있는 고선사터 삼층석탑도 놓칠 수 없는 볼거리다. 국보 38호로, 1970년대에 물에 잠겨 덕동호라는 새 이름을 얻은 덕동마을의 고선사터에 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놓았다. 고선사는 원효가 주지로 있었던 절이므로, 이 탑은 그의 생전인 686년(신문왕 6)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탑 앞의 안내판은 이 탑이 '682년(신문왕 2)에 세워진 감은사 탑과 쌍둥이라 할 만큼 닮았다'고 해설해준다.

고선사터 석탑에서 박물관 건물을 따라 돌면 '머리 없는 불상'들이 나타난다. 모두 분황사 우물 속에서 건져 올린 석불들인데, 참혹한 모습으로 줄지어 세워져 있다. 마주치는 순간, 마음에 충격이 온다.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용장사 삼륜대좌불을 보면서 받았던 고통과 비장이 새삼 살아난다. '불상의 머리는 왜 없어졌을까?' 박물관이 세워놓은 안내판은 그 궁금증을 풀어준다.

(전략) 불상의 머리는 왜 없어진 것일까요? 그 원인으로 지진과 같은 자연 재해를 들 수 있습니다. 지진이 나면 받침대 위에 있던 불상이 굴러 떨어지는데, 가장 약한 부분인 목이 부러지기 쉽습니다. 또 몽고군의 침입, 왜란, 호란과 같은 전란(戰亂)에 의해 피해를 입기도 합니다.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시대에는 일부러 불상을 훼손한 적도 있습니다. (중략) 목불은 태워버렸고, 석불이나 금동불은 우물, 저수지, 바다에 던져버렸다고 합니다. 머리를 잘라 관청에 신고하기도 했습니다. (후략)

장항리 절터에서 나온 8세기 부처. 하반신이 없는 모습(250cm)으로 경주박물관 왼쪽 뜰에 놓여 있지만 본래는 전체가 480cm 높이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굴암 존본불과 표정, 신체, 옷 등에서 비슷하다고 한다. 석굴암 본존불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으니 경주박물관에서 대리 만족
 장항리 절터에서 나온 8세기 부처. 하반신이 없는 모습(250cm)으로 경주박물관 왼쪽 뜰에 놓여 있지만 본래는 전체가 480cm 높이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굴암 존본불과 표정, 신체, 옷 등에서 비슷하다고 한다. 석굴암 본존불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으니 경주박물관에서 대리 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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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본존불과 꼭 닮은 장항리 발굴 석불

목 없는 불상들 앞에서 잠깐 숙연해졌던 마음을 추스릴 수 있는 불상으로 옮겨갈 차례다. 하반신이 없어진 모습으로 장항리 절터에서 발견된 이 불상은 지금 남아 있는 크기만도 250cm를 헤아려, 아마 전신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면 전체 높이가 480c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480cm라면 사람 키높이의 대략 3배 정도 되는 크기이니 반파되지 않고 곱게 남아 있다면 정말 대단한 볼거리가 되었으리라.

게다가 이 상반신 불상은 원형이 거대했으리라는 추정 외에도 답사자의 호기심을 잔뜩 불러일으키는 요소를 가지고 있으므로, 경주박물관을 답사한 나그네라면 반드시 찾아뵈어야 한다. 만약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채 경주박물관을 떠났다가는 석굴암 답사 후 다시 박물관을 찾아야 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석굴암은 동아시아 최고의 불교 문화유산으로 꼽히는 명작이지만, 일반인은 고이 모셔져 있는 불상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게다가 사진 촬영도 금지되어 있다. 그런 상황에, 경주박물관의 장항리 석불과 석굴암 본존불이 아주 흡사하게 닮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찌 박물관 뜰을 가벼이 스쳐지나갈 것인가.

경주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8세기 장승얼굴 무늬 기와. 높이 16cm.
 경주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8세기 장승얼굴 무늬 기와. 높이 1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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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안으로 들어가서는 꼭 '이차돈 순교비'를 찾아보아야 한다. 실로 이차돈 순교비는 지금 보아도, 불교 신자가 아니면서 보아도, 그것이 지닌 현대적 아름다움은 눈이 시릴 지경이다. 모르고 보면 어느 누구도 그것이 766년(혜공왕 2) 무렵에 만들어진 아득한 옛날의 조각품이라고는 상상이 안 된다. 21세기의, 그것도 추상 미술을 추구하는 서양 계통의 조각가가 제작한 작품일 뿐이다. 그만큼 이차돈 순교비는 정말 초현대적인 작품이다.

이차돈 비. 마치 현대의 추상파 조각가가 만든 작품 같다.
 이차돈 비. 마치 현대의 추상파 조각가가 만든 작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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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 추상주의 기법의 이차돈 순교비

이차돈 추모 순교비는 육각 기둥으로 되어 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육신사에도 사당 앞에 여섯 명의 사육신을 상징하는 뜻에서 조악한 육각 비석을 1979년 건립해 놓았지만, 이차돈 순교비는 완벽한 조형미를 보여준다. 우리가 불교를 떠올릴 때 불상과 부도탑은 대체로 둥글고, 탑은 4면 아니던가. 이차돈 순교비의 6면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초현대적인 추상이다.

순교비의 앞면은 이차돈의 순교 현장을 양각(陽刻)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까지도 아주 추상적이다. 약간 허리를 굽혀 기도를 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인물 앞에는 잘린 머리가 놓여 있다. 머리 없이 목만 남은 인물은 하늘 높이 흰 피를 솟구치고 있다. 사방에는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있다.

순교비의 인물은 남자인데도 통치마를 입고 있다. 통치마의 허리 부분은 위에서 내려온 상의가 덮고 있다. 그래서 신라 복식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이차돈 순교비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한국역사연구회가 펴낸 <삼국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를 보면 '(삼국 사람들은) 처음에는 소매가 좁은 저고리와 가랑이의 통이 좁은 바지를 착용'하였는데 '점차 귀족층을 중심으로 소매가 길고 넓으며 자락이 긴 저고리와 통이 넓은 바지를 입는 형태로 변하였다'고 한다.

순교비의 나머지 다섯 면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마모가 심하여 일반인이 그것을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문가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다섯 면에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차돈의 순교 기록과 일치되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 글씨는 신필(神筆)로 추앙받았던 김생(711-791)의 솜씨라 한다.

<국립 경주 박물관> 도록

<립경주박물관> 도록
 <립경주박물관>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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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박물관이든 일반인이 그 안에 있는 전시물을 두루,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도록>이 필요하다. 집에 돌아와 천천히 <도록>을 감상하는 일, 그 자체가 진지한 역사여행자의 참된 답사 여정이다.

<국립 경주박물관> 도록은 고고관, 미술관, 안압지관, 옥외전시의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고고관은 다시 선사, 원삼국실, 신라 1, 2실, 국은기념실로, 미술관은 불교미술 1실, 2실, 금석문실, 황룡사실로 나뉘어서 꾸며졌다.

안압지관은 목제품, 기와와 전돌, 금속공예품, 칠, 금동불상, 철제품, 토도제품, 옥석, 골각, 기타로 세분되어 수록하고 있고, 옥외전시는 범종, 에밀레종, 석탑, 석등, 비석, 석불 등을 보여준다.

도록은 '피자' 크기 판형의 234쪽 완전 칼라 고급 책자다. 값은 3만원. 한 권으로 한 달은 충분히 즐길 수 있으니 피자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싸다. 박물관 정문 안 바로 오른쪽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서 구입할 수 있다.

신필 김생의 글씨

마곡사 대웅전(사진 위)과 그 현판.
 마곡사 대웅전(사진 위)과 그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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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돈 비에 김생의 글씨가 남아 있다고 하니, 김생의 글씨로 알려지고 있는 유명한 현판을 아니 살펴볼 수 없다.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번지에 있는 마곡사 대웅보전(보물 801호)의 현판이다.

물론 지금 남아 있는 현판 자체가 신라 당시의 것일 가능성은 없다. 나무로 된 물건의 원판이 그토록 곱게 남아서 전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차례 복각되어 전한다 하더라도 본래 글씨를 쓴 이가 김생이라는 설은 충분히 믿을 만도 하리라.

본래 마곡사는 의자왕 3년(643)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전한다. 그러므로 자장율사가 당대 최고의 명필이었던 김생의 글씨를 받아 현판을 만들어 걸었을 개연성은 농후하기 때문이다.

마곡사에는 대웅전 말고도 오층석탑(보물 799호), 대광보전(보물 802호), 심검당(충남 유형문화재 135호), 명부전(충남 문화재자료 64호), 천왕문(충남 문화재자료 62호), 해탈문(충남 문화재자료 66호) 등 볼 것들이 많다. 특히 봄에 가면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워 '춘(春)마곡'이라는 별칭까지 얻고 있다.



태그:#에밀레종, #고선사터, #이차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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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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