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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412호인 양동마을의 향단(이언적 주택) 담장에서 바라본 (양동마을 중) 거림의 일부 풍경. 양동마을은 들머리부터 하촌, 거림, 내곡의 세 촌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물 412호인 양동마을의 향단(이언적 주택) 담장에서 바라본 (양동마을 중) 거림의 일부 풍경. 양동마을은 들머리부터 하촌, 거림, 내곡의 세 촌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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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에서 경주로 간다. 포항은 동해 최대의 항구 도시, 경주는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 도시다. 아름답고 유서 깊은 길이 이어질 것 같은 예감에 몸을 떤다.

그러나 기대는 실망을 낳는다. 포항에서 경주로 가는 이 길에서 '서라벌'의 심상을 찾는 일은 아주 불가능하다. 온통 '철'의 느낌만 가득하다. 특히 세계문화유산인 양동마을 바로 앞을 어마어마한 고가도로가 지나가니 멀리서 찾아온 답사객들은 그저 말을 잃을 뿐이다.  

그렇다고 양동마을을 아니 들어갈 수도 없다. 마을 전체가 1984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고, 2010년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까지 지정된 곳 아닌가. 조선시대가 낳은 문화유산인 관계로 '서라벌'의 역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점이 좀 아쉽지만. 

경주 북쪽 설창산에 둘러싸인 양동마을은 경주손씨와 여강이씨 종가가 500여 년 동안 전통을 이어가며 살아온 곳으로, 우리나라 전통 민속마을 중에서 가장 큰 규모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반촌이다. 그래서 1992년에는 영국의 황태자도 이 마을을 방문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기도 이전에 영국 황태자까지 다녀간 우리나라 마을을 한국인인 내가 아직도 가보지 못했다는 것은, 어디 가서 말도 못 꺼낼 일이다.

'세계문화유산' 양동마을, 우리나라 반촌의 대표

양동마을 주차장에서 바라본 향단. 보물 412호인 향단은 중종이 이언적을 위해 지어준 99칸 주택으로 현재 56칸이 남아 있다.
 양동마을 주차장에서 바라본 향단. 보물 412호인 향단은 중종이 이언적을 위해 지어준 99칸 주택으로 현재 56칸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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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 정면 언덕 위에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향단(보물 412호)이다. 1543년 성종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이언적에게 모친의 병환을 잘 돌볼 수 있도록 이 집을 지어주었다.

그 외에도 양동마을에는 500년이 넘는 고색창연한 54호의 고와가(古瓦家)와, 이를 에워싸고 있는 고즈넉한 110여 호의 초가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답사자들은 보물 411호인 무첨당, 보물 442호인 관가정, 보물 1216호인 손소영정, 그리고 서백당 등 중요민속자료 12점 등을 둘러보며 마음만은 조선시대로 돌아가는 즐거움에 한껏 빠져들게 된다.

형산강을 오른쪽에 둔 채 계속 남하하면 어느덧 경주 시내로 들어선다. 용강네거리에서 좌향좌로 방향을 틀면 길은 소금강산 비탈을 왼쪽에 두고 이어진다. 그리고 금세 경주시청 건물이 90도로 오른쪽에 보이는 백률사 삼거리에 닿는다.

백률사는 이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올라가면 소금강산 정상의 거의 턱밑에 있다. 작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을 오른다. 등산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걱정까지 할 것은 없다. 산 정상 자체가 해발 296m에 불과한데다, 주차장에서 백률사까지는 도로 모양의 길이고, 백률사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도 100m나 될까 싶을 정도의 얕고 부드러운 능선이다.

백률사, 하늘을 날아온 이차돈의 목이 떨어진 곳

굴불사터 사면불
 굴불사터 사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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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률사로 오르는 길목 중간쯤에 '굴불사터 석조사면불상(보물 121호)'이라는 유명한 불상이 서 있다. 커다란 바위에 사면으로 새겨진 석불은 불교의 '사방정토'를 상징하는것으로, 흔히 신라에서는 동쪽에 약사여래, 서쪽에 아미타불, 남쪽에 석가모니불, 북쪽에 미륵불을 모셨다.

굴불사터의 사면불상 중 남쪽의 석가모니불은 좌우에서 시중을 드는 보살들이 함께 있는 삼존입상이다. 그런데 이곳 사면불은 북쪽의 불상이 특히 보기 드문 그림을 보여준다. 북쪽면에는 두 분의 불상이 새겨져 있는데, 그 중 한 분은 얼굴이 열하나에 팔이 여섯 달린 관세음보살상이다. 현지의 안내판에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라는 해설을 붙여 두었다.  

이 사방불은 757년에 인명과 지명을 중국식으로 바꾼 것으로 이름 높은 경덕왕 시절 작품으로 추정된다. 경덕왕이 하루는 백률사를 찾는 길에 이곳 땅속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스님이 경을 읽는 소리였다. 왕은 그곳을 팠다. 땅속에서사방으로 불상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솟아났다. 왕은 감동하여 당장 그 자리에 절을 지었다. 절에는 불(佛)상을 파낸[窟] 기념으로 절[寺]을 세웠다 하여 굴불사(窟佛寺)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굴불사터 4면석불... 경덕왕 때 작품

(사진, 위) 백률사 대웅전 안의 이차돈 초상 (아래) 백률사 전경
 (사진, 위) 백률사 대웅전 안의 이차돈 초상 (아래) 백률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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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률사는 절 자체로는 크게 볼 것이 없지만, 이차돈이 순교할 때에 그의 목이 하늘을 날아 이곳에 떨어졌다고 전해지는 이적(異蹟)의 현장이다.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차돈 순교비도 이곳에서 발굴되었다.

또 이곳에서는 현재 볼 수 있는 신라 최대의 금동불상인 금동약사여래입상도 발굴되었다. 국보 28호인 이 불상은 높이가 무려 179cm에 이른다. 이래저래 백률사는 한번쯤 꼭 답사할 만한 '신라 불교의 현장'이다.

신라인들은 이곳 백률사를 성심껏 찾았을 것이다. 사면석불도 보아야겠지만 무엇보다도 이곳이 백률사이기 때문이다. 이차돈 순교사의 생생한 현장인데 어찌 그들의 발길을 뜨겁게 끌어당기지 않았을 것인가. 순박한 백성들은 이차돈의 극락왕생을 빌며 백률사 오르는 길 이곳저곳에 돌탑도 쌓았으리라.

물론 지금 그 돌탑들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굴불사터에 사면불이 불쑥 솟아올랐듯이 언젠가는 소금강산 여기저기에 묻혀 있을 법한 신라인들의 문화유산이 찬란하게 재발견되는 날도 있을 법하다. '이차돈 순교비'가 출토되고 국보 28호 금동약사여래입상이 발굴된 것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신라인들이 이차돈을 기려 이곳에 엄청난 불사를 벌였을 개연성은 충분하지 아니한가.

이 작은 산에 어째서 소금강산이라는 큰 이름이 붙었을까

그 날이 오면 이 작은 산에 소금강산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이 붙은 까닭도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으리라. 정상에 서면 경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철따라 현란하게 변하는 산색(山色)이 너무나 곱기 때문에 금강산에 견줄 만하다 해서 소금강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나는 혼자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본다.

이차돈의 죽음은 당대의 순교였다. 신라인들은 그를 '어떤 것에도 깨어지지 않고, 모든 것을 다 깨뜨릴 수 있는' 금강에 견주었다. 자연적 경치도 아름답지만 그 정신은 더욱 눈부셨다. 그래서 금동약사여래입상과 사면석불 같은 위대한 불사들을 이차돈의 이적이 나타난 '작은' 산에 바쳤다. 그리고 불렀다. 소금강산!

소금강산 정상부의 예비군 '참'호. 소금강산과 같은 곳에서도 이런 것과 마주치는 기분은 '참'담하다.
 소금강산 정상부의 예비군 '참'호. 소금강산과 같은 곳에서도 이런 것과 마주치는 기분은 '참'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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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굴불사터 사면석불과 백률사를 보고 내려와 계속 산비탈을 타고 보문단지 쪽으로 나아가면 소금강산 자락에 있는 탈해왕릉과 경주이씨 시조 탄강지롤 보게 됩니다. 탈해왕릉과 경주이씨 탄강지가 소금강산에 있다는 사실도 이 산이 신라인들에게 평범한 야산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증거로 여겨집니다. 탈해왕릉과 경주이씨 탄강지는 다음 글에서 다루겠습니다.



태그:#탈해왕릉, #이차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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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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