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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등이 호국불교의 차원에서 세운 절 원원사터에 남은 쌍탑. 탑에 새겨진 조각이 사진으로도 두드러지게 눈에 들어온다.
 김유신 등이 호국불교의 차원에서 세운 절 원원사터에 남은 쌍탑. 탑에 새겨진 조각이 사진으로도 두드러지게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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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공항, 태화, 불국사… 울산에서 경주로 올라가는 7번 도로가 언제나 복잡한 까닭을 설명해주는 단어들이다. 하지만 치술령과 언양 쪽으로 둘러서 가야 하는 35번 도로에 견주면, 복잡하기는 해도 시간이 절반밖에 걸리지 않으니 자동차들은 7번 도로로 몰린다.

옛날에도 그랬다. 왜구들도 이 길로 신라에 쳐들어왔다.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50년(박혁거세 8년), 기원후 14년(남해왕 11년)에 벌써 왜구가 쳐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남해왕 때의 왜구는 "병선 100여 척을 보내 민가를 약탈"했을 지경이니 그 규모가 대단했다.

원원사터 석탑에 새겨져 있는 아름다운 조각들
 원원사터 석탑에 새겨져 있는 아름다운 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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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신라는 이 길에 성을 쌓았다. <삼국사기>는 722년에 "모벌군성(毛伐郡城)을 쌓아 일본의 침입로를 막았다"고 기록한다. <삼국유사>도 같은 해에 "처음으로 모화군(毛火郡)에 관문(關門)을 쌓았는데 지금의 모화촌(毛火村)으로 경주 동남쪽 경계에 속한다. 이것은 곧 왜를 막는 요새가 되기도 했다. 둘레는 6792보(步) 5척(尺), 여기에 쓰인 인부는 3만 9262명, 감독한 사람은 각간 원진이었다"고 전한다.

왜구들이 신라의 서울로 쳐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했던 바로 그 '관문'에 쌓았던 관문성은 현재 사적 48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는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와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두산리 사이를 이은 산성이지만, 지금은 가운데 허리가 잘렸다. 7번 도로가 범인이다.

관문성은 직접 답사하지 않더라도 원원사터는 꼭 가봐야 한다. 모화역 부근에서 '모화불고기단지' 이정표를 찾아 동쪽 산속으로 들어가면 원원사에 닿는다. 이 길은 좌우로 불고기 식당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탓에, 멀쩡하던 나그네도 갑자기 배가 잔뜩 고파지는 진입로다.

특이하게도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원원사 쌍탑

원원사터 쌍탑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신라 때 축조된 것이라는 말도 있으나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사실은 아닌 듯.
 원원사터 쌍탑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신라 때 축조된 것이라는 말도 있으나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사실은 아닌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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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는 우리가 원원사를 찾아보아야 하는 까닭을 설명해준다.

신라의 서울 동남쪽 20여 리 되는 곳에 원원사(遠願寺)가 있으니 세상에서는 이 절이 안혜 등 네 대덕(大德)이 김유신 등과 함께 발원하여 세운 것으로 전한다.

김유신이 세운 절이라는데 어찌 아니 가볼 것인가. 원원사는 어떤 절이었을까? 첫째, 김유신 등이 세웠다. 둘째, 왜구의 침입로인 관문성 근처에 위치한다. 셋째, 신라가 불교의 힘을 빌어 당나라를 물리치려고 사천왕사를 창건하던 무렵의 절이다. 종합하면, 원원사는 호국 불교와 김유신이 낳은 작품이다.
 
괘릉
 괘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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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遠] 소원(願)을 빌기 위해 세운 절[寺]' 원원사, 과연 무엇을 빌었을까? 김유신 등이 나라의 안녕과 백성들의 평안, 나아가 삼국통일을 기원하여 세운 원원사 터에는 지금도 두 탑이 남아 있다. 뒷날 새로 지어진 사찰 뒤편의 높은 언덕에 동서로 나란히 서 있는 쌍탑은 빼어난 수준의 사천왕상과 십이지신상을 자랑한다. 사천왕상은 사방을 지키고, 십이지신상은 열두 방위를 수호하는 형세다. 탑에 십이지신상을 새기는 일은 드물다.

탑 앞 안내판은 각각 7m 높이인 이 쌍탑이 보물 1429호로 지정된 까닭을 잘 설명해준다. 원원사 쌍탑은 "기단과 탑신에 있는 뛰어난 조각으로 유명"한데 "이들 조각들의 섬세하고 유려함은 다른 석탑에서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답사자가 원원사 쌍탑에서 유심히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간단명료하게 말해주는 해설이다.

괘릉 무인석. 아라비아인들이 당시 신라에 일상적으로 출입했다는 기록이 사실임을 잘 증언해준다.
 괘릉 무인석. 아라비아인들이 당시 신라에 일상적으로 출입했다는 기록이 사실임을 잘 증언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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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원사에서 돌아나와 경주 쪽을 향해 조금 북향하면 오른쪽에 사적 26호인 괘릉으로 안내하는 이정표가 서 있다. 경주 시내에서 12km 떨어진 괘릉(掛陵)은 원성왕(785∼798년 재위)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묘를 쓸 때 물이 많아 나오는 바람에 왕의 관을 땅에 바로 묻지 못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걸어서[掛] 묻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

안내판은 이 무덤이 "둘레돌, 십이지신상, 난간, 석물 등 모든 면에서 신라 능묘 중 가장 완비된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조각 수법도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말해준다. 또 "무인석이 서역인(西域人)의 얼굴 모습이어서 눈길을 끈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안내판이 아니라도 괘릉은 보는 순간 첫눈에 반하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입구에 당도하여 괘릉 쪽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삼면의 솔숲이 강렬한 녹향을 풍기면서 사람을 흡입한다. 흔히 우리나라를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였다 하는데, 이곳 괘릉은 삼면이 소나무 향기로 가득하다.

과연 아름다운 괘릉

괘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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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의 설명 그대로, 서역인의 얼굴과 신체를 한 무인석 또한 단연 눈길을 사로잡는 볼거리다. 곱슬머리에 코가 우뚝하고 눈이 깊숙한 무인석은 서역인을 영락없이 재현해냈다. 처용을 아라비아인으로 보는 학설도 있지만, 신라가 서역인들과 활발히 무역을 하였다는 사실은 이곳 괘릉의 무인석만 보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무덤을 향해 조금 더 들어가면 이번에는 웃음꽃이 활짝 핀 돌사자들이 답사자를 맞이한다. 안내판은 "두 마리씩 나누어 마주보고 있는 돌사자는 동남쪽과 서북쪽의 것이 정면을 지키고, 서남쪽과 동북쪽의 것은 각각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려 남쪽과 북쪽을 지키게 하는 기발한 배치 방법을 사용하였다"면서 "네 마리의 사자는 모두 자신감이 넘치는 웃음을 머금고 있으며, 특히 북쪽을 지키는 사자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고 설명한다.

괘릉의 돌사자
 괘릉의 돌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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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유적이나 문화재의 현장을 찾았을 때에는 안내판의 내용부터 꼼꼼하게 읽는 것이 기본이다. 문화재청이나 전문가의 안목이 드러나는 안내판이므로, 일반 답사자에게 핵심 내용을 알려준다.

이곳 괘릉에서도 안내판의 해설에 따라 무인석을 둘러보고, 돌사자의 표정도 살펴본다. 과연 그들의 웃음은 너무나 천진난만하여 저런 얼굴로도 왕릉을 지킬 수 있을까, 문득 의심스럽다. 하지만 안내판은 "이들(보물 1427호인 무인석, 문인석, 돌사자) 석조물들은 괘릉 봉토 주위의 12지신상과 더불어 8세기말 신라인의 문화적 독창성과 예술적 감각을 웅변하여 주는 걸작"이라는 결론을 내려준다. 일반인들이 혹시 가질지도 모르는 의심을 사전에 예방하려는 배려적 해설인 셈이다.

원성왕의 대표 업적
원성왕은 재위 4년(788) 봄, 처음으로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벼슬을 주는 관리 선발제도를 시행하였다. 독서삼품과는 논어, 예기 등등의 책에 통달한 수준에 따라 인재를 삼 등급으로 나누어 관리로 임용했다. 그 이전까지 활쏘기만으로 관리를 선발하였던 것에 견주면 이는 세상을 바꾼 개혁이었다.

또 왕은 재위 6년(790) 벽골제를 증축하였다. 삼국사기는 16대 흘해왕(310∼356) 때 '처음으로 벽골제에 물을 대기 시작하였다. 둑의 길이가 1천 8백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저수지로 추정되는 벽골제는 지금의 김제시 부량면에 있으므로 처음 축조한 왕은 신라의 임금이 아니었다. 거대한 연못을 만들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주인공은 백제 11대 임금 비류왕(304∼344)이었다. 때는 그의 재위 27년인 330년.
괘릉의 주인인 원성왕은 왕위에 앉게 된 과정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진 임금이다. <삼국사기>는 그 전말을 이렇게 전한다.

혜공왕(765∼780) 말년에 반란이 일어나 왕과 왕비가 죽었다. 상대등 김양상이 앞장서서 반란을 제압했다. 김양상의 동생인 이찬 김경신도 반란 진압에 큰 공을 세웠다. 김양상이 선덕왕이 되면서(780년) 경신에게 상대등 자리가 주어졌다.

5년 뒤 선덕이 아들 없이 죽었다. 신하들은 선덕왕의 족질 주원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그런데 서울 북쪽 20리 되는 곳에 살던 주원은 마침 내린 큰 비로 알천이 넘치는 바람에 궁궐에 오지 못했다.

누군가가 "임금 지위는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 폭우가 내리는 것은 하늘이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왕의 아우로서,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통을 가졌다"고 말했다. 결국 경신이 왕위를 잇게 되었다. 얼마 후 비가 그치니 백성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끝내 그림자를 보여주지 않은 무영탑(無影塔)

남편이 탑을 완성하기를 기다리다 지쳐 죽은 아사녀의 전설이 깃든 석가탑. 이 탑이 영지 물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면 남편이 돌아온다는 말을 믿고 아사녀는 죽을 때까지 기다렸으니 끝내 무영탑은 그림자를 물에 비추지 않았다.
 남편이 탑을 완성하기를 기다리다 지쳐 죽은 아사녀의 전설이 깃든 석가탑. 이 탑이 영지 물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면 남편이 돌아온다는 말을 믿고 아사녀는 죽을 때까지 기다렸으니 끝내 무영탑은 그림자를 물에 비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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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릉에서 나와 신호등이 있는 지점에서 7번 도로를 건너면 들판 안으로 들어가는 1차선 찻길이 펼쳐진다. 슬픈 전설을 간직한 영지로 가는 길이다.

영지(影池)보다 먼저 유형문화재 204호인 석불좌상이 나타난다. 석불은 도로에 바짝 붙어 있지만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집 한 채인 작은 암자도 가로수들이 숨겨버렸다. 석불은 심하게 마멸된 탓인지, 아니면 미완성이라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다. 그 탓에 보물 지정을 받지 못하고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영지와 석불좌상에 서린 전설만은 유형문화재 등급이 아니다. 삼국 시대 최고의 석공인 아사달이 신라까지 와서 석가탑 제작에 매달려 있는 중에 그의 아내가 영지에 몸을 던져 죽음을 선택한 비화의 전설 아닌가.

남편을 기다리다 못한 아사녀는 백제를 떠나 불국사로 찾아온다. 그러나 탑이 완성되기 이전에는 여자의 출입을 제한하는 금기 때문에 그녀는 남편을 만날 수 없었다. 그때 어떤 승려가 아사녀에게 말했다.

"저 아래에 연못이 있는데, 지성으로 빌면 탑의 그림자가 비칠 것이오, 그러면 남편도 볼 수 있소."

아사녀는 연못으로 달려가 내내 빌었다. 하지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탑은 물에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아사녀는 고향으로 돌아갈 힘도 잃었고, 못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그 후, 탑을 완성한 아사달은 아내를 만나려고 연못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그는 울면서 못 주위를 배회한다. 그때 아내의 모습이 앞산의 바윗돌 위에 떠올랐다. 아내의 얼굴은 흡사 부처님의 모습과도 같았다. 아사달은 바위에 아내를 새기기 시작했다.

그 이후 사람들은 아사녀가 탑의 그림자[影]를 기다린 못[池]에 영지(影池)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그림자[影]를 비추지 않은[無] 석가탑에도 무영탑(無影塔)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빈처>의 작가 현진건도 1938년 장편소설 <무영탑>을 발표한다. 소설은 아사달이 아내를 따라 영지에 몸을 던지는 것으로 끝난다.

아사녀가 빠져 죽은 영지에 노을이 가득하다.
 아사녀가 빠져 죽은 영지에 노을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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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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