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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20일 오후 4시 50분]

MBC구성작가협의회는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로 방송통신위위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PD수첩 해고 작가들의 복직을 요구했다.
 MBC구성작가협의회는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로 방송통신위위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PD수첩 해고 작가들의 복직을 요구했다.
ⓒ 강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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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잠시, 김재철 사장님께 쓰는 게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다, 말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분을 모르거든요. 워낙 유명하신 분이고 작가들의 피켓에도 등장하실 만큼 '친근한' 얼굴이지만, 한 번도 직접 뵌 적은 없습니다. '모르는 분'이다 보니, 그 분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들이 나올 때마다 '원래 그런 분'이겠거니, 생각하곤 했습니다. PD, 기자들이 그토록 뵙고 싶어도 뵐 수 없다는 사장님이, 하물며 일면식도 없는 일개 무명작가의 글을 읽어봐주실 리가 없지요.

무엇보다, 한 방송사의 사장님이나 되시는 분이, 체신 떨어지게 '이런 졸렬한 짓'까지 하셨을 거라고는 믿고 싶지 않습니다. 더욱이 기자 출신이시니, 작가들이 하는 역할도, 그 중요성도 모르실 테고요. 그래선지 다들 말하더군요. 이번 PD수첩 작가 전원 해고는 당신이 'PD수첩 죽이기'를 위해 기획하신 또 하나의 '작품'이라고.

그래서 백종문 편성제작본부장님, 제가 '아는 분'인 당신께 이 편지를 씁니다. 그간 네 번의 긴 성명서, 수십 개의 피켓과 구호로 이미 많은 말씀을 드렸지요. 수십 명 유명 드라마·예능 작가님들의 성토 메시지도 보셨을 겁니다. 그게 다 당신에겐 '소 귀에 경 읽기'였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오늘은 목에 힘을 빼고, 조곤조곤 제 개인적인 단상을 좀 전해드릴까 합니다.

전체 방송작가들의 '적'이 된 사나이

그러고 보니 본부장님을 가까이에서 뵌 지도 오래되었군요. 언젠가 한번 10여 미터 전방에서 지나가시는 것을 본 적은 있으나, 미처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반가운 척 다가가 인사를 드릴까, 아님 모른 척 지나갈까, 고민하다가 그만 타이밍을 놓쳐버렸지요. 아마도 그전처럼 방긋 웃으며 인사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때도 이미 한창 당신이 휘두른 '칼'에 PD수첩이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던 때였으니까요.

게다가 '이런 사태'까지 벌어졌으니, 요즘 작가들은 모였다 하면 어쩔 수 없이 당신에 대한 성토를 쏟아내고는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한 선배가, 아주 오래전 당신에 대한 '기억' 한 자락을 꺼내놓더군요.

무슨 일인가로 PD들이 파업을 할 때 당시 국장이 보조 작가들에게 돈을 줄 수 없다는 방침을 내리자 당신이 노발대발 국장실을 찾아가 따지셨다지요. "PD들이 월급 못 받는 건 그렇다 쳐도 보조 작가들에게 일을 시켰으면 돈을 줘야지 안 준다는 게 말이 되느냐. 창피한 줄 알라"고. 그 결과 보조 작가들이 돈을 받게 되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 같은 얘기였지요.

곧이어 여기저기서 당신에 대한 '우호적인' 기억들이 보태어졌고, 이어 이야기는 "'원래 안 그랬던 분'이 왜 저렇게 변했을까"에 초점이 모아졌습니다. 이런 저런 추정들이 나왔지만, 그 깊은 뜻을 우리가 다 알 순 없지요. 대신, 저도 당신에 대해 오래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기억 한 자락을 꺼내보렵니다.

내 기억 속의 그 남자 - '멋진 PD' 백종문

오래전, 제가 PD수첩의 보조 작가로 방송계에 입문한 지 갓 1년이 안 되던 무렵입니다. PD수첩이 하고 싶어 MBC에 들어왔는데, 막상 해보니 너무나 고되어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노동환경이 어떻게 PD수첩 같은 프로그램에 있을 수 있나, 배신감과 분노로 치를 떨 때였지요. 이 일을 계속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깊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그때 당신이 PD로 발령받아 왔고, 얼마 안 되어 한 팀으로 '장기 이식' 아이템을 진행하게 됐습니다. 제목이 "인철이의 선물"이었는데, 혹 기억하실런지요. 열두 살짜리 남자 아이가 교통사고로 실려 왔고, 결국 뇌사 판정을 받았지요.

내내 애끓는 오열을 멈추지 않던 부모는 기진맥진한 몸으로 어려운 결단을 내렸습니다. 인철이의 자그마한 몸에서 적출된 장기들이 어른 다섯 생명을 살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내내 제작진도 함께 목이 메었습니다. 알고 보니 인철이는 저 남쪽 지방 낙도의 찢어지게 가난한 집 아이였지요.

먹먹한 가슴을 뒤로 하고, 프로그램 절반에 담길 장기이식법 개정 내용과 관련해 회의하던 자리. 순간, 당신의 명쾌한 한 마디가 일개 보조 작가로 멍하게 듣고 있던 저의 가슴을 때렸습니다.

"장기는 그 속성상 가난한 사람의 몸에서 돈 많은 사람들의 몸으로 흘러가게 돼 있어. 그걸 막는 것이 장기이식법의 관건이지."

정말이지, 그때의 충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 PD수첩의 관점이란 이런 거구나. 이런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방송을 만드는구나.'

그 순간 저는 진심으로 PD수첩이란 프로그램에 매료됐고, PD수첩을 만드는 사람들이 멋져보였습니다. '이 고된 시간들을 견뎌내고 무럭무럭 자라서, 꼭 PD수첩 작가가 돼야지' 하고 마음을 다잡기도 했지요. 명쾌한 관점으로 거침없이 취재를 계속해가던 그때 당신의 모습은 참으로 '샤프'해 보였고, 내 기억 속에 당신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아는 '멋진 PD'로 각인되었습니다.

저를 '작가'로 키웠던 8할은 바로 당신 같은 멋진 PD들과 멋진 작가들의 수많은 '어록'이었습니다. 그 어록들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감수성과 PD수첩의 관점을 배웠습니다. 부자인 사람보다 가난한 사람 쪽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쪽보다 당하는 사람의 편에서, 속이려는 사람보다 속는 사람 입장에서, 윗사람들의 공허한 명분보다 단 한 사람의 억울한 피해자가 없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무엇보다 인간적이고 상식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프로그램에 담아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와 같은 '어록'들이 면면히 계승되어 'PD수첩의 사람들'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 가르침 속에 성장한 멋진 PD들과 작가들이 PD수첩의 22년 역사를 차곡차곡 쌓아왔을 것입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당신도 분명, 그 '역사' 중 한 명이었습니다.

당신의 칼에 쓰러지는 'PD수첩의 사람들'

170일간 진행된 MBC노조 파업이 끝난 뒤 사측이 '분위기 쇄신'을 이유로 PD수첩 작가 6명을 전원 해고시킨 가운데, 지난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MBC 사옥 앞에서 한국방송작가협회 소속 작가들이 결의대회를 열고 PD수첩 작가의 해고사태를 규탄하며 원상복귀를 요구하고 있다.
 170일간 진행된 MBC노조 파업이 끝난 뒤 사측이 '분위기 쇄신'을 이유로 PD수첩 작가 6명을 전원 해고시킨 가운데, 지난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MBC 사옥 앞에서 한국방송작가협회 소속 작가들이 결의대회를 열고 PD수첩 작가의 해고사태를 규탄하며 원상복귀를 요구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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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부터, 그런 'PD수첩의 사람들'이 하나둘 칼을 맞고 쓰러져갑니다. 칼을 휘두른 사람이 당신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믿기지 않았습니다. 이우환 PD 소식을 들었을 땐 더욱 아연해졌지요. 13년 전 당신과 공동으로 '인철이의 선물'을 만들었던 또 한 명의 '멋진 PD' 말입니다. 정권이 불편해할 아이템을, '위'에서 취재중단 지시를 내렸는데도 강행하자 난데없이 용인의 드라마 세트 관리인으로 보내버리셨다지요. 돌아온 후에도 계속 '반항'하자 결국 이번 파업 기간에 대기발령 징계를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그 칼이, 수많은 PD들을 치고 또 쳐낸 당신의 그 칼이, 마침내 작가들에게까지 날아왔군요. 한두 명도 아닌 6명 전원의 '목'을 한꺼번에 날리셨지요. 그 중에 제가 가장 '멋진 작가'로 생각하는 정재홍 선배가 있습니다. 그 힘들고 고된 PD수첩을 12년간이나 해오셨다는 이유만으로도 후배 작가들의 존경을 받는 분입니다. PD수첩 역사의 절반 넘는 기간을 일하시는 동안, PD수첩에 혹여 흠이라도 될까 은행대출 한 번 받지 않으실 정도로 명예와 강직함을 지켜 오신 분이지요.

요 몇 년간 재홍 선배가 '위'에서 하지 말라는 정권 비판적인 아이템들을 끈질기게 들이밀었다지요. 재홍 선배답습니다. 팀장이 기획안을 찢어 날리는데도 차곡차곡 주워 예의 바르게 다시 가져왔더라지요. 역시 재홍 선배답습니다. 요즘 같은 분위기에 그리 하면 찍힐 걸 뻔히 알면서도, 12년간 지켜왔던 PD수첩의 관점과 신념을 버리지 못하는 재홍 선배가 그리도 두려우셨나요. 선배에게 '배운 대로' 하는 후배 작가들이 그리도 미우셨던가요.

당신 말대로 작가 세계에 '종신 작가'라는 개념은 없기에 그분도 언젠가 PD수첩을 떠나시게 되겠지요. 그러나 떠날 때 떠나더라도 그 뒷모습은 멋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다는 박수 속에서, 고맙다는 예우를 다해서, 보내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의무가 PD수첩엔 있습니다. 씹던 껌 버리듯이, 입다 만 옷가지를 버리듯이, 이렇게는 아니지요. PD수첩에서 청춘을 바친 '12년'이라는 세월은 마땅히 존경하고 감사해야 할 역사이지, '분위기 쇄신을 위해 갈아치워야 할' 낡은 커튼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해고된 작가들 전원 복귀, 우선적이고도 간단한 '해법'입니다

십수 년간 내 기억 속 깊이 각인돼있던 당신의 빛나는 어록은 요 몇 달간 새로운 어록들로 '갈아치워졌습니다'. PD수첩이 '쇄신(이라 해놓고 '개조'로 읽겠습니다)' 대상이라고 하셨지요. 22년간 변함없던 PD수첩의 관점은 갑자기 '정치 편향적'인 것이 돼버렸구요. 대한민국 전 작가들의 분노가 부글부글 끓든 말든 대체작가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도 하셨습니다.

백종문 본부장님. 그 사이 당신에 대한 충격과 배신감도 많이 무디어졌습니다. 십수 년 사이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후배 PD들과 작가들의 존경과 신망을 잃은 대신 '정권의 부역자'라는 오명을 쓰면서까지 당신이 얻으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혹은 어쩌면 처음부터 '원래 그런 분'이셨는지, 저는 더 이상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원래 내일(8월 21일)로 예정돼 있던, 파업 복귀 후 PD수첩 첫 방송이 무산되었다는 소식엔 가슴이 먹먹합니다. 당신은 대내외적으로 그 책임이 작가들에게 있는 양 흘리셨지요. 작가들과 PD들은 분하고 억울한데, 그 뒤에서 당신은 웃고 계신가요. 끝내 원하는 바를 이루어 기쁘신가요. PD수첩 결방 소식에 박수치는 소수의 '윗분'들에게 잘했다 칭찬을 들으셨는지요.

이 말이 억울하시다면, 하루빨리 PD수첩 정상화를 원한다는 당신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우선 해고된 작가들을 모두 제자리로 돌려보내십시오. 끝내 그 작가들이 두렵고 미우시거든, 눈에 흙이 들어가도 두고 못 보겠거든, PD와 작가들의 의사를 존중하여 예의와 성의를 다해 정상적인 논의과정을 거치십시오.

그 결과 모아지는 의견이 피디와 작가 모두를 납득시킨다면 작가들 스스로 명예롭게 거취를 결정할 것입니다. 그것이 현재 전체 방송작가들의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PD수첩을 정상화하는 가장 우선적이고도 '간단한' 해법입니다.

마지막으로 백종문 본부장님. 당신을 포함해 수많은 PD, 작가들의 노고가 쌓여 만든 PD수첩 22년 역사란, 한두 명의 칼로 쉽게 훼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권리가 당신에겐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이제 그만 손에 든 칼을 내려놓아주십시오.

덧붙이는 글 | * 김은희 시민기자는 2005년부터 2008년까지 PD수첩 작가로 활동하며 '광우병', '김용철과 삼성', '핵심은 이재용이다'편 등을 집필했습니다. 현재는 MBC스페셜을 집필 중입니다. 이 글은 <미디어오늘>에도 중복게재되었습니다.



태그:#PD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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