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귀여운 10대 소녀 앨리스와 기자의 외모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생전 처음으로 야구장에 가니 이상한 나라에 불시착한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두산 베어스와 LG 트윈스의 경기가 벌어진 지난 26일 저녁 잠실야구장을 찾았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두산베어스 응원석 쪽에 자리를 잡고, 멍하니 주변을 둘러봤다. 두산 베어스 로고와 선수 이름이 적힌 옷을 입고, 한 손에는 막대풍선, 한 손에는 간식을 든 채 분주히 이동하는 사람들 속에서 혼자 수첩과 카메라를 들고 앉아 있으니 무척 어색했다.

'막대풍선을 갖고 왔어야 했나? 간식도 안 챙겼는데....배고프면 어떡하지? 야구 규칙도 잘 모르는데, 과연 정신줄 놓지 않고 끝까지 볼 수 있을까?'

야구장 괜히 왔다 싶었는데...

경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온갖 걱정이 엄습했다. 급기야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지?'라는 회의가 들면서 '멘붕'(멘탈붕괴)이 올 뻔했다.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기대에 "치어리더를 취재해보라"는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지만, 막상 야구장에 도착하니 후회가 밀려들었다. 예능프로그램인 <천하무적 야구단>을 가끔 시청한 것을 제외하면 야구를 본 적이 없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야구장에 와서 취재를 한다고 했을까.

그러나 두산 베어스 치어리더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그 모든 고민과 후회는 사라졌다. 항상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선조의 말씀을 받들어 왔지만, 그녀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끔은 선조의 말씀이 틀릴 때도 있다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세상 어디에 저런 돌이 있으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두산 베어스 치어리더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두산 베어스 치어리더들. ⓒ 김경훈



5회까지 점수가 안 난 짠물 경기. 3대1의 스코어로 LG가 승리한 이날의 경기는 이미 관심 밖이었다. 경기 내내 치어리더들이 보여주는, 미끈하게 쭉 뻗은 팔다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춤사위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특히 치어리더들이 씨스타의 'Loving U'에 맞춰 춤출 때는 기자의 마음도 "정신 못 차릴 만큼" "두근두근 떨리는 게" 느껴졌다. 치어리더를 두고 '여신' 운운하는 기사들이 왜 쏟아져 나오는지, 또 하나의 갑작스런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었다.  

"먹어도, 먹어도 살이 빠지네요"

하지만 치어리더를 보고 '여신' '섹시' 등의 단어만 떠올린다면 큰 오산이다. 두산 베어스에 소속된 6년차 치어리더 박정아(25)씨는 치어리더가 "보기보다 훨씬 힘든 직업"이라고 강조한다.

"저희 팀은 6명이 교대로 뛰는데, 한 달에 적어도 15경기 이상은 소화해요. 인천과 목동까지 정도는 원정경기도 함께 가고요. 롯데나 기아처럼 연고지가 지방인 팀은 서울까지 원정을 오는데, 저희는 지방은 안 가니까 좀 낫죠. 경기가 없는 날에도 연습을 하니까 개인시간은 별로 없어요. 기본적으로 하루에 5시간 정도 연습해요. 체력적으로 워낙 힘드니까 먹어도, 먹어도 살이 빠지네요.(웃음)"

야구 시즌이 아닐 때는 농구 등 다른 스포츠 경기의 치어리더로 활동한다. 그녀는 타 종목 스포츠 경기와 비교했을 때 야구 치어리더의 가장 큰 특징으로 "야외에서 하는 것"을 꼽았다.

"농구처럼 실내에서 하는 스포츠는 관중과 상당히 거리가 있는데, 야구는 바로 앞에서 관중들의 호응과 환호를 받을 수 있어서 좋아요. 관중들과 함께 호흡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힘든 점은 야외에서 하니까,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아요. 준비 다 해놨는데 비가 오면 경기가 취소될 때도 있고, 날씨가 더울 때는 땀도 많이 나고 좀 힘들죠."

이날도 경기가 진행되는 내내 치어리더들은 짬짬이 부채질을 하며 땀을 식혔다. 그 모습은 '여신'보다는 땀 흘려 육체노동을 하는 '여성 노동자'에 가까워 보였다. 실제로 치어리더는 시즌 단위로 계약하는 계약직 노동자다.

 경기 틈틈이 부채질을 하며 땀을 식히는 두산 베어스 치어리더들의 모습. 왼쪽이 인터뷰에 응한 박정아씨.

경기 틈틈이 부채질을 하며 땀을 식히는 두산 베어스 치어리더들의 모습. 왼쪽이 인터뷰에 응한 박정아씨. ⓒ 김경훈



수입은 팀에 따라 월급을 주는 곳도 있고, 경기마다 수당을 주는 곳도 있다. 박정아씨는 "경력에 따라 수입이 다르다"며 자세한 수입 수준에 대해서는 대답을 꺼렸다. 2010년 11월 보도된 <스포츠조선> 기사에 따르면 베테랑 치어리더들의 월평균 수입은 150만 원에서 200만 원 정도라고 한다.

날씨 외에도 치어리더를 괴롭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하루살이와 짓궂은 관중들이다.

"여름이 다가올 때, 저녁 8시가 되면 하루살이들이 몰려 들어요. 그러면 단상이 하루살이 시체로 가득 차죠. 공연하다 보면 단상에 무릎 꿇고 할 때가 있는데, 벌레를 정말 싫어하는데도 공연 중이라 티를 안 내고 계속해야 돼요. 그리고 옛날만큼 추근거리는 관중들은 별로 없지만, 대놓고 치마 속을 찍는 분들이 가끔 계세요. 그럴 때도 공연 중이라 뭐라 할 수도 없고. 그런 게 좀 힘들죠."

여신? 계약직 여성 노동자

다른 치어리더들처럼 그녀 역시 지인의 소개로 이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서클 활동으로 치어리더를 하다가 외부 공연을 나갔어요. 거기서 치어리더 선배를 만나서 명함을 받고, 이 일을 시작하게 됐죠. 보통은 다 인맥으로 일을 시작해요."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야구 규칙도 잘 몰랐다"는 그녀지만, 이제는 두산 베어스에 대한 애정이 답변 하나하나에서 묻어난다.

"6월 초까지도 룰을 잘 모른 채로 공연을 했어요. 그런데 일을 계속 하다 보니 팀에 대한 애정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팀이 부진할 때 힘들죠. 원래 두산 베어스가 잘하는 팀인데 작년에 부진할 때는 좀 많이 힘들었어요."

그녀는 자신이 나오는 기사와 거기에 달린 댓글을 꼼꼼히 챙겨본다고 한다. "치어리더 관련 기사를 보면 어떤 기분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도 팀에 대한 애정이 드러난다.

"'여신'이니 뭐, 그런 기사 보면 기분은 좋은데, 기사에서 너무 과한 칭찬을 하면 댓글이 장난 아니더라고요. '못 생겼다' 이런 거.(웃음) 좋은 댓글보다는 안 좋은 댓글이 더 많은 거 같아요. 그래도 그런 것보다는 두산 욕하는 댓글이 더 기분 나쁘더라고요."

더운 날씨와 하루살이, 예의 없는 관중, 거기에 악플까지. 여러 어려움에도 그녀는 "열심히 준비한 공연이 관중들의 호응을 받을 때 보람을 느낀다"고 대답했다. "치어리더를 하고 싶으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다시 "쉽지 않은 직업"이라는 엄포(?)를 놓았다.

"예전에는 키 크고, 몸매 좋고 이런 걸 많이 봤죠. 물론 지금도 많이 봐요.(웃음) 그렇지만 지금은 내적인 조건, 자기 관리를 잘 하고, 팀에 대한 애정이 있고, 그런 게 더 중요해요. 이 일이 생각보다 정말 힘들 거든요. 저희가 그렇게 힘들게 굴리지도 않는데(웃음) 연습생들이 들어왔다가 금방 그만 두는 경우가 많아요.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만 생각하고 왔다가 포기하는 거죠. 그래서 일을 오래 열심히 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한 거 같아요."

다음엔 수첩 대신 막대풍선을 들리라

치어리더 박정아씨와의 짧은 인터뷰로 기자의 생애 첫 야구장 방문은 끝이 났다. 처음에는 야구팬들 속에서 어색함을 넘어선 불안함을 느꼈지만, 야구 경기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소리 높여 "최강 두산!"을 외치기도 했다.

야구의 '야' 자도 모르는 기자였지만, 선수들의 공 하나 타격 한 번에 울고 웃는 야구팬들과 선수들을 응원하는 치어리더들의 열기에 어느 순간 휩쓸렸다. 이전에는 느낀 적 없는, 묘하게 상쾌한 기분이었다.

다음에도 그 상쾌한 기분을 다시 느끼기 위해 가끔 야구장을 찾을 것 같다. 그때는 수첩과 카메라 대신 막대풍선과 간식을 들고, 가벼운 마음으로 야구경기를 관람할 듯하다. 아마 그때도 치어리더들의 화려한 춤사위를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겠지만, 그 뒤에서 치어리더들이 흘리는 땀방울 역시 놓치지 않을 생각이다.

두산 베어스 치어리더 박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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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15기 인턴기자. 2015.4~2018.9 금속노조 활동가. 2019.12~한겨레출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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