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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소가 도대체 어디야?

박대소로 추정되는 곳
 박대소로 추정되는 곳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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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어암리 인봉 탑신당 앞에서 다시 출발한다. 박대천에 놓인 다리를 건너 하류로 내려간다. 어제 우리를 위해 애를 썼던 이희영씨와 작별한다. 길은 박대천 제방을 따라 하류로 계속 이어진다. 박대천은 산 사이 좁은 골짜기를 굽이쳐 흐른다. 그렇기 때문에 물가로 아주 좁게 논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길가에는 최근에 지어진 펜션만 가끔 보인다.

그런데 옥화구곡 중 제9경 박대소를 찾을 수 없다. 자료에는 신선봉에서 서북쪽으로 1㎞ 하류에 있다고 적혀 있다. 나는 물가에 절벽이 있고, 소가 깊어 보이는 곳을 박대소로 추정한다. 박대소는 넓고 큰 물웅덩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박대소 근방에서 다시 다리를 건너니 작은 마을이 보인다. 마을 이름을 알고 싶으나 사람을 만날 수 없다. 길 주변 박대천 쪽으로는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보리수와 살구
 보리수와 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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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거의 다니지 않고 수풀마저 무성하니, 이곳이 바로 조류와 어류 그리고 파충류의 천국이다. '길은 외줄기 남도 삼 백리'라는 박목월의 시구가 생각난다. 길을 따라 계속 내려가니 마을이 나온다. 어암리 새터다. 이곳에서 우리는 보리수와 살구 맛을 볼 수 있었다. 마을 주변에 잘 익은 살구와 보리수가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6월의 보리수,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다. 살구는 부드럽지만 과육이 적고 당도가 좀 떨어지는 편이다.    

삼인교를 건너 청천 땅 구만동천으로

삼인교를 건너 청천 땅 귀만리 삼인동으로 들어서니 학포(學圃) 노선생 유허비가 우릴 맞는다. 내용을 보니 교하노씨인 학포공 노정한(盧定漢: 1615-1679)이 광해군 때 이곳 삼인동에 터를 잡았고, 그 후손이 번창해 대성을 이루었다고 적혀 있다. 삼인동에서 길은 귀만리 원귀만으로 이어진다. 중간에 청천과 속리산을 잇는 37번 국도와 만난 다음 오리골 들을 지나간다.

귀만리 석장승
 귀만리 석장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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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지난 1980년 수해 때 물난리가 났던 곳으로 비교적 너른 들이 펼쳐져 있다. 귀만리 마을 입구에 이르자 큰 느티나무와 석장승이 보인다. 느티나무는 늘 보던 것이라 식상하고, 돌로 만든 장승이 눈에 띈다. 두 기가 나란히 서 있는데, 하나에는 천하대장군이라고 쓰여 있다. 그렇다면 다른 하나는 말할 것도 없이 지하여장군이다. 그런데 이들 두 장승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천하대장군은 상대적으로 크고 얼굴 표정이 근엄하다. 이에 비해 지하여장군은 키가 작고 얼굴에 살짝 미소를 품고 있다. 1950년대 세웠다고 하는데, 꽤나 오래된 것처럼 보인다. 장승이 길의 왼쪽에 있다면, 길 오른쪽 암벽에는 구만동천(龜灣洞天)과 만포정(晩浦亭)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글씨를 쓴 지가 그리 오래돼 보이지 않고, 잘 쓴 글씨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주는 의미는 대단하다.

귀만리 돌거북이상
 귀만리 돌거북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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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만동천은 거북이 사는 물굽이 동네라는 뜻이다. 박대천 깊은 물에 상서로운 거북이가 살고 있으니 동네가 잘 될 수 밖에. 거북이는 십장생 가운데 하나로 예로부터 무병장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거북이의 느린 삶처럼 여유로운 마음으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만들겠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그런 의지를 담아 마을 입구에 거북이상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만포정은 늦게 찾아온 물가 정자라는 뜻으로, 귀만리(歸晩里)라는 마을 이름과 연결되는 것 같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 마을이 길지라는 것을 깨닫고 퇴임 후 돌아오려 했으나, 이미 늦어 돌아오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뜻으로 정자를 지었을 것이나, 그것이 후대에 없어지면서 그 이름만 남은 것 같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2009년에 만든 돌거북이상과 십여 기의 나무 장승들을 볼 수 있다.

귀만리의 특이한 건물
 귀만리의 특이한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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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에는 고인돌도 보이고 솟대도 보인다. 우리는 이곳을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여느 마을처럼 사람들을 만나기 어렵고 조용하다. 마을 안에 특이한 건물이 하나 보인다. 사람이 보여 무슨 건물인가 물으니 전통종교 건물이라고 대답한다. 귀만을 지난 우리 일행은 가락교를 건너 가락골로 들어간다. 가락골이라는 이름은 주민들의 삶이 아름답고 즐거워(佳樂) 생겨났다고 하는데 믿을 수 없다.

가락골의 다른 이름은 한천(寒泉)이다. 마을 한가운데 얼음처럼 찬물이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고, 그 때문에 땅이 기름지다고 알려져 있다. 가락골은 평양조씨의 세거지로 표지석까지 세워져 있다. 이곳 가락골에서 북쪽으로 명지재를 넘으면 후평리에 이른다. 후평리는 뒤뜰, 늘목, 덕살이 세 개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세 개 마을이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후평리(後坪里)가 되었다.

덕사리 연꽃과 구절초 할머니

덕사리 연지
 덕사리 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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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평은 뒤뜰의 한자식 표현이다. 후평은 현재 원후평과 신후평의 2개 행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신후평에 속하는 마을이 덕살이와 늘목이다. 덕살이는 덕사리라고도 부르며, 한자식으로 표현해 덕거리(德居里)라 부르기도 한다. 이곳 덕살이 길가에는 연못이 있다. 연못에는 연꽃이 한창이다. 백련이 많지만 홍련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이제 꽃을 피우기 시작했으니, 앞으로 한 달간 계속 연꽃이 필 것 같다.

그리고 이곳에서 밭을 매는 할머니를 한 분 만난다.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으니 구절초를 가꾼다고 말한다. 구절초를 가꾼다니, 그게 팔리느냐고 다시 물어본다. 그러자 잘 가꾸어 놓으면 가을에 가지고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구절초는 한방에서 위장병과 부인병 치료제로 사용된다. 한자식으로 표현하면 건위(健胃), 보익(補益), 강장(强壯), 정혈(淨血)이 된다.

구절초 할머니 허만옥 여사
 구절초 할머니 허만옥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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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초는 가을에 꽃을 피우기 때문에 아직은 쑥처럼 보인다. 우리는 할머니에게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본다. 허만옥이라고 대답한다. 미원에서 이곳으로 시집와 60년을 살았다고 말한다. 자식들은 다 출가해 청주 등 대처에 나가 살고, 남편은 먼저 세상을 떠 이렇게 혼자 산단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차라도 한 잔 대접하지 못하는 걸 굉장히 안타까워한다.  

원후평의 이기붕 생가를 보지 못하고

우리는 얻어먹은 것보다 더 기쁜 마음으로 다시 고개를 넘는다. 고개를 넘으니 늘목 마을이 나온다. 이곳 늘목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원후평에 이를 수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고성리 쪽으로 가게 되어 있다. 우리는 왼쪽으로 갈까 아니면 오른쪽으로 갈까 잠시 망설인다. 원후평에 있는 이기붕 생가를 찾아보려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늘목 삼거리에서 갈 길에 대해 논의하는 대원들
 늘목 삼거리에서 갈 길에 대해 논의하는 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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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붕(李起鵬)은 1896년 12월 20일 이곳 괴산군 청천면 후평리에서 아버지 이낙의(李洛儀)와 어머니 은진송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기붕 가족은 세 살 때 서울 노량진으로 이사와 살았고, 이기붕은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살았다. 그러나 그는 선교사와 당대 지식인들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다음 1934년 귀국하여 사업에 종사했다.

이기붕
 이기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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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45년 해방 후 이승만의 비서로 활동하면서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1948년에는 이승만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었고, 1949년에는 서울시장이 되었다. 그리고 1951년에는 자유당 창당에 참여하면서 당정의 핵심인물로 부상한다. 1954년 민의원 의장으로 있으면서 그는 사사오입개헌을 통과시키는 '악역'을 맡았다.

이기붕은 결국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불행한 인물이 되고 말았다. 민의원 의장과 부통령을 지내면서 자유당 정권의 부정과 독재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1960년 3·15부정선거를 통해 이승만과 이기붕이 정·부통령이 되었으나, 이 선거로 인해 민심이 완전히 돌아서게 되었다. 4·19혁명이 일어났고 부통령에서 물러난 그는 4월 28일 경무대 별관에서 자살했다.

화진포의 이기붕 별장
 화진포의 이기붕 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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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후평으로 가서 이기붕 생가를 보려면, 30분 이상 돌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원후평이 박대천이 굽이쳐 흐르는 안쪽에 있기 때문이다. 뒤뜰 또는 후평이라는 마을 이름도 박대천 뒤에 있는 들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농토가 많아 상대적으로 부유한 마을이었다. 또 37번 국도가 박대천 건너편으로 지나가 교통도 편리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에는 박대천 옆으로 난 길을 택하지 않고 산길을 따라가기로 한다. 안타깝지만 이기붕 생가를 포기한다. 그리고 통미산 옆으로 난 솔고개를 넘는다. 이 길은 청천-도원간 군도 확포장공사로 1997년 포장되었다. 그런데 이런 포장도로가 걷기에는 더 힘이 든다. 이제 와서 콘크리트를 제거할 수도 없고 안타깝다.


태그:#박대소, #삼인교, #귀만리, #덕사리, #후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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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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