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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된 일꾼 중 차언노미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된 일꾼 중 차언노미
ⓒ 서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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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구포항에 가라는 거다.

"나는 석수장인데 왜 구포항을 가라는 거지?"

엊그제부터 작은끌톱장이 김삽사리가 몸이 많이 아프다는 거다. 오는 길에 공석면 산에 들러 성곽을 쌓는데 쓸 돌도 떠오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구포항이라, 여기서 50리 길인데..."

벌써 1년이 지났다. 지난해 7월 9일, 수원화성국제연극제를 앞두고 의미 있는 일을 벌여보자는 뜻에서 12명이 구포항에서 수원화성까지 20km를 걸었다. 화성을 축성할 때 전국에서 목재를 실어와 구포항에 쌓아놓고 가공한 후 그 길을 따라 화성까지 운반했던 점에 착안해 재현해보자는 '화성축성의 길 걷기'.

걷기뿐만이 아닌 오는 길목에는 성곽에 쌓을 돌을 켰던 장소인 여기산과 숙지산이 있어 구포리에서 목재를 싣고, 여기산과 숙지산에서 돌을 캐서, 행궁에 도착해서는 성곽을 쌓고, 건물을 짓고, 화성신이 있는 성신사에서 제례를 지낸 후 낙성연까지 벌이는 일련의 과정을 퍼포먼스로 표현한 것. 화성 축성 이후 220여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혼자 왔느냐? 그 많은 목재와 돌을 어떻게 혼자 옮기려고?"
"그렇게 됐습니다. 매년 이맘때쯤 온다고 다짐했으니까 혼자서라도 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꿈속에서 누군가 구포항에 가라고 재촉하던 말이 차언노미의 귓전을 자꾸 맴돌았다.

220여 년 전 수원화성의 축성이 시작됐다. 충청도의 안면도, 황해도의 장산곶, 한강을 끼고 있는 경기도와 강원도의 한강 인근 지방, 전라도 좌수영의 순천. 광양. 흥양. 구례. 방답진. 사도진, 전라우수영의 자주. 진도. 장흥. 강진. 무안. 흥덕. 김제, 완도, 경기도의 광주와 남양, 광평 등의 봉산(금양처)에서 나무를 베어 들였다.

이들 목재의 운송은 배나 뗏목을 이용해 이루어졌는데, 충청도나 황해도, 호남의 목재는 각 수영에 딸린 병선(兵船)이나 개인의 어선을 이용했고, 경기도나 강원도의 한강 주변에서 베어낸 목재는 뗏목을 엮어 운반하다가 바다에서 배로 옮겨 실어 운반했다.  

바닷길을 이용해 운반된 목재는 구포(현재 화성시 시화호 연해에 있는 구포리)에 치목소(治木所)를 설치해 다듬은 다음 수원의 화성 공사 현장으로 옮겨졌다. 구포의 치목소에는 감독과 목수를 파견해 나무를 용도에 맞게 다듬고 다음 수레를 이용해 수원까지 날랐는데 이를 위해 도로를 고치는 등 목재 운송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화성성역의궤는 이 길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지금 구포항은 없다. 논밭으로 개간되고 물길은 조그만 실개천만이 바다와 연결돼 있을 뿐이다. 그 실개천 언저리에서 차언노미는 220여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 목재를 지게(배낭)에 얹고 화성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화성축성의 길'은 약 20km로, 비봉IC 부근 쌍학사거리-(2.4km)-어천저수지-(2.9km)-마을입구-(1.1km)-언덕길오거리-(1.2km)-용남고속-(700m)-호매실교-(1.8km)-서울대농대부지-(900m)-서호천입구-(600m)-항미정-(600m)-여기산-(2km)-숙지산-(1.7km)-화서문-(700m)-화성행궁-(500m)-성신사 순으로 이어진다.

출발해서 1시간 반은 인내의 시간, 이후 1시간은 환희의 시간

1년전 걸었던 그 길을 차언노미가 돼 다시 걸었다
 1년전 걸었던 그 길을 차언노미가 돼 다시 걸었다
ⓒ 서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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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오전 10시, 비봉IC 부근 쌍학사거리를 출발해 4차선 국도를 따라 1시간 반 정도 지루하게 걸었다. 잠시 어천저수지가 있어 물을 바라보며 쉬는 시간을 갖기는 했지만 칠보산 자락 매송면 천천리 마을입구까지 가는 길은 인내를 요구하는 시간이었다.

차언노미는 힘이 드는지 '돌 만지는 사람인데 구포항까지 가서 나무를 실어오란다'고 투덜댔다. 하루에 일당을 얼마나 받냐고 물어보니 매일 쌀 6되, 돈 4전 5푼이라고 말한다. 배낭에서 막걸리를 끄집어내 한 잔을 권했다. 뙤약볕에서 2시간 이상을 배낭 속에 있었기에 시원하지는 않았지만 적절한 순간이었다.

겨우 마을길로 접어들어서야 천국을 맛 봤다. 칠보산 자락의 상큼한 나무향이 코를 간질이며 사람 사는 냄새에서 온정도 느꼈다. 언덕 위 국립삼림연구소를 휘돌아 가는 1km 남짓한 오솔길에서는 뼛속까지 정화되는 느낌이 온 몸을 전율케 한다. 길게 뻗은 나무들이 친구가 돼 줬다.

그리고 황구지천, 왕송저수지를 출발해 수원지역을 동서로 가르고 융건릉, 세마대를 거쳐 평택을 지나 서해까지 흘러가는 제법 하천다운 하천. 너비에서 그렇고 길이에서도 수원의 4대 하천 중에 으뜸으로 여겨지는 가장 큰 용이라 할 수 있다.

누구는 걷는 여행을 '가장 싼 가격에 가장 비싼 풍경을 볼 수 있다'고 말하면서 "좋은 구경 많이 했나요?"라고 묻는다. 어떤 이는 '가장 헐값에 가장 비싼 철학적 배움을 경험 할 수 있다'고 말하며 "많은 생각을 했나요?"라고 묻는다.

바로 이 구간이다. 자신에 대한 철학적 물음도, 멋진 풍경도 이 구간에서 모두 경험하게 된다. 출발해서 1시간 반 동안 무미건조한 풍경 속에서 열기 가득한 아스팔트길을 걸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후 산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며 가로수가 도열해 있는 1시간 동안에는 환희에 찬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게 된다.

3km 길 안에 농업의 도시 수원이 다 들어있다

황구지천을 가로지르는 호매실교를 건너면 곧바로 대로인 서부로를 만나고 이어 농업의 도시 수원을 만나게 된다. 3km 구간에 농업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앉아있다. 농촌진흥청 원예연구소를 시작으로 서울대 농대부지, 축만제, 농업과학관 등.

농촌진흥청 원예연구소에서는 실내조경에 대해, 옛 서울대학교 농대 부지에서는 살아있는 생태를, 농업과학관 전시실에서는 농업의 변천사에서부터 미래의 농업까지 1, 2층으로 나눠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다. 화성 서쪽에 있어 서호라 부르는 저수지인 축만제는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하는 마음을 담았는데 인근에서 가장 큰 농업용 저수지다.

도시면서 농촌, 농촌이면서 도시인 이 구간을 사람들이 놓칠 리 없다. 전국 최초로 수원에서 출범한 도시계획 수립기구인 시민계획단이 지난 30일 내 놓은 '꿈의 지도'에는 서호와 여기산 일대는 도시농업을 활성화하고 자연생태계가 살아있는 생태학습공간으로 활용한다고 표시해 놓았다. '화성축성의 길'에서 만나는 특별한 농업의 길 3km 구간, 참 소중한 공간이다.

구포리에서 가져 온 목재, 여기산, 숙지산에서 가져 온 돌을 화성신 재단에 올렸다
 구포리에서 가져 온 목재, 여기산, 숙지산에서 가져 온 돌을 화성신 재단에 올렸다
ⓒ 서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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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언노미는 농촌진흥청과 접한 여기산에서 바위를 만져봤다. 푸석하지 않고 단단했다. 가져 온 정으로 바위를 쪼아 지게에 얹었다. 서호천을 건너 2km 남짓한 거리를 한 걸음에 달려가 숙지산의 돌도 담았다. 해가 넘어가기 전에 화성을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인지 그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오후 5시경, 대략 7시간 만에 화성에 도착했다. 축성 당시의 의미를 담아 구포리에서 가져 온 작은 나뭇가지와 여기산, 숙지산에서 주어 온 돌을 팔달산 중턱의 성신사 재단위에 올려놓았다.

성신사는 화성이 거의 다 지어질 무렵인 1796년 7월 정조대왕의 특별 지시로 화성의 신을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으로 '우리 고장을 바다처럼 평안하고 강물처럼 맑게 하소서'라며 화성과 화성 백성 등을 사랑하는 뜻을 담은 축문을 지어 내리기까지 했던 곳이다.

"화성신이시여, 저는 화성을 쌓고 있는 석수장이 차언노미입니다. 오늘 구포리에서 가져 온 목재와 여기산, 숙지산에서 가져 온 돌입니다. 화성을 완성하는데 귀하게 사용하겠습니다."

'수원화성축성의 길', 1년만에 이 길을 다시 걸었다.  1년전 이 자리에서 화성신께 약속했었다. '이맘때쯤 꼭 다시 걷겠노라고...' 그 길을 차언노미가 걸었다.

내년 이맘때쯤이면 차언노미 뿐만이 아닌 최망아지, 김삽사리, 이험토리 등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걷기를 기원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수원시 e수원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수원시, #화성축성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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