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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을 남북으로 관통하고 지역을 동서로 나누면서 수원 지역을 아우르는 길이 있다. 수원의 관문인 지지대고개에서 오산 쪽으로 진행하는 국도 1호선. 그 길과 노송지대에서 갈려  평행선과 포물선을 그리며 행궁까지 가는 길이 오는 2014년까지 조성 예정인 팔색길중 하나인 '효행길'이다.

'효행길'은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현릉원을 참배할 때 왕래하던 길로 지지대비. 효행공원-(2km)-노송지대-(2.5km)-만석거-(2km)-장안문-(1km)-행궁-(1km)-팔달문-(4.2km)-수원천으로 연결되는 총 12.7km의 길이다. 걸으면 3시간 20분 정도 소요된다.

행정구역이 달라 최종 목적지인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까지는 표기되지 않았지만 그곳까지 간다면 약 25km정도로 걸어서 5시간 이상 걸리는 비교적 장거리 구간이다. 지난 1일, 팔색길 두 번째 걷기 여행이 시작됐다.

먼 길, 느리게 시작해 보는... '지지대고개, 효행공원'

정조대왕 거둥행차
 정조대왕 거둥행차
ⓒ 서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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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왕과 수원의 경계, 지지대고개. 遲(더딜 지)... 늦다 게으르다는 뜻의 한자. 그것을 두 개씩이나 사용했다. 고개가 높지도 험준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얼마나 게으름을 피웠으면 느리고 게으른 고개라며 비석까지 세웠을까? 그런데 의미가 애틋하다.

이름의 어원은 2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현릉원을 오갈 때 이 고개를 넘으면서 수원으로 들어올 때는 아버지를 빨리 뵙고 싶어서 "왜 이리 더딘가", 수원에서 떠날 때는 아버지의 묘를 좀 더 오래보고 싶어서 "더디게 더디게"를 말하며 눈물지었다는 데서 유래됐다.

오전 9시 30분. 걷기를 시작했다. 곁에서 쏜살같이 달리는 차들의 바람소리가 요란하다. 200여년의 세월을 두고 과거 정조대왕 행렬의 '느림'과 현재 자동차 행렬의 '빠름'이 遲遲(지지)대 고개에서 묘한 대비를 이룬다.

지지대고개와 효행공원은 같은 곳이다. 화장실이 있고 그늘이 있고 쉼터가 마련돼 있다. 지난 1986년 세운 정조대왕 동상은 먼 시선으로 화성시에 있는 현릉원을 바라보고 있다. 벤치에 앉아 오늘 걸어가야 할 길을 미리 눈으로 그려봤다.

* 숨은 보물: 지지대라는 지명 이전에 이곳은 사근현이라 불렸으며 미륵당이라고도 했다. 고개 아래 버스 차고지 입구에는 실제 미륵당(법화당)이 있다. 향토유적 제5호로 오랜 신앙의 대상이 됐던 미륵부처 앞에서 두 손을 모아보는 것도 의미가 크다.

갑옷 입은 노송장군 '노송지대', 생태와 문화가 있는 '만석거'

만석거 주변에는 다양한 예술 문화활동의 공간이 있다
 만석거 주변에는 다양한 예술 문화활동의 공간이 있다
ⓒ 서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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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아래 1번 국도와 갈리는 곳에 갑옷 입은 노송장군들이 700여 미터를 도열해 있다. 노송지대다. 황송한 도열에 임금이 된 듯 한 기분이다. 소나무 가로수는 이 구간을 포함해 옛 경수간 국도 따라 약 5km를 이어진다.

정조대왕이 생부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릉원의 식목관에게 내탕금 1천 냥을 하사해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게 한 것이 기원이다. 비록 당시의 소나무들이 대부분 고사했지만 효행공원 부근 9주, 삼풍가든 부근 21주, 송정초등학교 부근 8주 총 38주는 보호송으로 정조의 효성과 사도세자의 슬픔이 남아있다.

출발한지 1시간 반이 지나 만석거에 도착했다. 시작은 농사용 저수지였지만 지금은 휴식·생태·문화 등으로 활용되고 있는 저수지. 가뭄이 심하던 1795년 정조대왕의 명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일왕저수지, 교구정, 방죽, 북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저수지였구나" 만석거를 그 정도의 시각으로 낮춰 부른다면 중요한 것을 빠트리는 결과다. 이곳에는 신·구관 부사 유수들이 관인을 인수인계하고 정조대왕이 능행차시 민원도 처리할 겸 잠시 쉬던 장소인 영화정이 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였고 문화가 살아있던 곳이다.

지금도 수원미술관, 슬기샘도서관, 야외음악당 등이 자리하고 있어 책과 문화와 예술이 함께하고 있으며 최근 독서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방 역할을 할 에코레스피까지 문을 열어 지역농산물과 사회적기업상품도 판매하면서 중심체역할을 하고 있다.

영화정이 과거의 문화 중심지였다면 지금은 에코 레스피를 비롯해 주변의 문화. 예술의 장소들이 영화정을 대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만석거는 효행길 걷기 여행의 중간 기착지에 불과하지만 최종 목적지라해도 손색이 없다.

숭례문보다 한 뼘 더 큰 '장안문', 문화의 중심지 '행궁'

장안문을 통과해 행궁에 도착하면 다양한 문화행사가 펼쳐진다
 장안문을 통과해 행궁에 도착하면 다양한 문화행사가 펼쳐진다
ⓒ 서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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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거에서 채운 문화사발을 들고 40여 분 더 걸으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인 장안문이다. 국보1호인 숭례문보다 시쳇말로 한 뼘은 더 크다. 장안문 문루 높이가 13.5m, 너비는 9m에 달하며 반달 모양의 옹성까지 갖추고 있어 웅장함을 더한다.

북쪽에 위치해 흔히 북문으로 알려진 이곳은 정조대왕의 능행차를 가장 먼저 맞이한 곳으로 성곽의 문지방이다. 문지방은 문턱이라 하며 경계선의 뜻이 있고 안과 바깥, 이승과 저승처럼 문지방을 넘어서는 순간 안도감과 포근함을 느끼게 된다.

장안문을 지나 10여 분 더 걸으면 행궁 광장이다. 화성행궁은 주중에는 무예24기 공연, 주말에는 화성행궁 토요상설공연과 장용영수위의식, 정조대왕 거둥행차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이날 때마침 정조대왕의 거둥행차와 함께 '정조대왕과 함께하는 셔플댄스'라는 색다른 무대가 있어 눈길을 끌었다. 수원 화성을 축성한 후 모든 사람들이 화목하고 즐거워야 한다는 '인인화락(人人和樂)'의 위민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마련됐다고 하는데, 500여 명이 음악에 맞춰 셔플댄스를 추는 모습이 이채롭다.

행궁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문화 예술 축제들이 차츰 화성 성곽내로 퍼져나가고 있어 수원 화성이 하나의 거대한 야외무대로 자리하게 될 날도 머지않아 보였다. 더구나 화성내에서 내년에 생태교통축제를 벌이기에 걷는 이에게는 더욱 반가울 수밖에 없다. 

갈비는 음식이 아닙니다... '수원갈비'

수원의 음식은 갈비
 수원의 음식은 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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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플댄스를 관람하고 음식점을 찾았다. 수원하면 갈비라는 등식이 있기에 기왕이면 갈빗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두리번거리다가 찾은 한 식당에서 '갈비는 음식이 아닙니다. 문화와 관광입니다'라는 문구를 발견했다. 갈비에 대한 수원시민들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런데 수원의 갈비는 왜 유명하게 됐을까? 사람들은 갈비의 시작은 1940년대 싸전거리에 있던 'ㅎ'이라는 음식점에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유명하게 된 것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모내기 행사에 참가했다가 이 집에서 식사를 한 후 수원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예전 수원의 왕갈비는 갈비 한 대를 펼치면 불판을 가릴 정도의 크기로 유명했고 양념갈비도 다른 지역과 달리 간장 대신 소금으로 간을 해 고기 특유의 맛을 그대로 간직했다는데 그 전통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호기롭게 메뉴판을 봤지만 결국 가난한 뚜벅이 앞에 놓인 것은 갈비탕이다. 그래도 '역시 다르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도가니에 든 갈빗대의 크기에 놀라고, 은은하게 입에 달라붙는 맛에 두 번 놀라게 된다.

걷기 여행에서는 주저앉으면 일어서기 힘들다는 말이 있다. 가장 큰 고역은 이렇게 점심을 먹고 난 다음이다. 더구나 맛깔나게 과식까지 했으니 온 만큼 다시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에 핑계 댈 구석만 찾았다.

"정조대왕도 행궁에서 1박을 하고 현릉원에 갔는데... 어차피 행정구역이 달라 효행길의 최종목적지가 융건릉도 아닌데..."

결국 갈비탕이 발목을 잡고 정조대왕, 행정구역 핑계 끝에 서장대에서 융건릉을 바라보는 것으로 걷기 여행을 매듭지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수원시 e수원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수원시, #행궁, #만석거, #장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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