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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왔어요? 저 앞에 이상한 남자 있으니까, 조심해요."

이런 말을 산에서 듣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아주머니 세 분이 산길을 내려가다가 나를 보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건넨다.

"저 위에서 어떤 남자가 옷을 벗고, 이상한 짓을 해서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몰라... 아휴, 정말... 바지까지 벗고 이상한 짓 하더니,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하고. 우리한테 돌도 던졌어, 아휴, 끔찍해." 
"혼자 가지 말고, 기다렸다가 뒤에 남자들이라도 올라오면 함께 가요."

세상이 많이 달라진 걸까? 내가 그동안 운이 좋았던 걸까? 10여 년 동안 험하다는 산도 무수히 혼자 다녔건만, 동네 뒷산으로 생각했던 대모산으로 가는 길목에서 이런 망측한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이야... 아니, 망측한 건 둘째 치고, 사람들이 휴식처처럼 생각하는 산에서까지 이런 사람들이 출몰한다는 사실이 나에겐 적잖이 충격이었다.

그렇다, 그 남자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 되어버린 속칭 '바바리맨'이었던 것이다. 아주머니들의 겁에 질린 표정을 보니,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망설이게 되었다. 진짜 만나면 어떻게 하지? 어디에 신고하지? 어떻게 증거를 잡지?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핸드폰을 한 손에 불끈 쥐고, 조심히 올라 가 보기로 했다.

산에서 만난 바바리맨, 공포영화가 따로 없어...

대모산 가는 길
 대모산 가는 길
ⓒ 이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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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올라가려니, 또 한 무리의 아주머니들이 앞에서 웅성거리며 서 있다. 지나가려는 나를 한 아주머니가 한사코 말린다.

"아이고, 안 돼, 가지마! 저 앞에 어떤 남자가 옷 벗고... 아이고, 어떡해야 돼."  
"아휴, 나 정말 별 미친 ×을 다 봤네. 어쩌면, 세상에... 어휴..."

이런 걸 호랑이굴로 들어가는 심정이라고 해야 하나? 가긴 가야겠는데, 저 앞 어딘가에 있는 포악한 맹수에게 잡아 먹힐까 봐 오도 가도 못하는 것과 같은 이 상황. 순간 나는 두려움보다 서글픔이 밀려왔다.

조심스레 앞을 살피며 가다 서다를 반복하던 아주머니들은 마침 내려오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다.

"앞에 이상한 남자 못 봤어요? 웃통 벗고..."
"아, 그 사람 저-기 위로 올라가고 있던데..."
"그래요? 그럼 우리도 살살 올라가자."

얼마 가지 않아, 앞서 가던 두 아주머니가 발길을 멈추고 숨죽이며 말한다.

"저기 있네, 저기... 응? 저기.."

도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인가 싶어 앞을 바라보니, 오르막 끝에서 한 남자가 웃통을 벗고 우리 쪽을 쳐다보며 서 있는 게 아닌가. 이건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만약 당신이 산속에서 바바리맨과 마주쳤다면?
 만약 당신이 산속에서 바바리맨과 마주쳤다면?
ⓒ 이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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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끝이 쭈뼛했지만, 그래도 생김새나 하는 행동을 조금 더 관찰해야 신고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앞으로 조금 더 나갔다. 아주머니들은 그 남자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숨죽이며 만류하신다.

"가지마, 가지마, 큰일 나, 내려와. 응? 얼른 내려와!"

우리가 아무리 인원이 많다고 해도 좁은 산 길목을 떡하니 가로막고 서 있는 그 남자를 지나쳐 올라갈 용기가 차마 나질 않았다. 결국, 아주머니 한 분과 나만 남고, 다른 아주머니들은 발길을 돌려 하산했다. 나와 남게 된 아주머니께 "같이 안 가시냐"고 하니, 원래 일행이 아니란다. 아주머니는 "대모산이 한적하고 조용히 생각하며 걸을 수 있어 혼자 매일 찾을 계획이었는데, 오늘 이런 사람을 만나고 나니 내일부터 와야 하나 걱정"이라고 말했다. 다시 또 제자리에서 주춤거리다, 내려오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다.

"앞에 이상한 남자 못 봤어요? 웃통 벗은..."
"저-기 앞에 가고 있던데..."
"그래, 그럼 우리도 좀 올라가자."

산행도 아닌, 이상한 추격전이 돼버렸다. 아주머니는 올라가면서도 걱정과 두려움에 떨고 계셨다. "어떡하지?"를 수십 번 연발하시면서도, 산을 포기할 생각은 절대 하지 않으셨다.만약 이 아주머니 혼자 산에 올라가다가 그런 남자와 마주쳤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지금 아주머니와 내가 같이 올라가다가, 그 남자와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책이 필요했다.

바바리맨에 대처하는 법, 산에서도 통할까?

통상 경찰이 알려주는 바바리맨 대처법은 이렇다.

「바바리맨은 자신의 행위에 여자들이 놀라거나 소리지르며 도망가는 모습에 성적 흥분을 느끼므로, 마주치더라도 태연하게 지나치거나 무시하는 척해서 바바리맨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좋다.」

「바바리맨을 만나면 인상착의를 파악할 수 있는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 경찰에 신속하게 신고해야 한다.」


바바리맨은 보통 여성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위행위를 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지만, 용케 태연한 척을 했다 하더라도 그 앞에서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 증거를 남길 용기를 내기란 참으로 어렵다. 하물며 이런 좁고 으슥한 산길에서 바바리맨과 갑작스럽게 마주치게 된다면 사진이나 동영상은 고사하고, 공포심 때문에 황급히 도피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가 바바리맨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으니 아예 피하거나 아니면, 여러 명이 뭉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그의 앞을 지나다 몹쓸 짓을 보더라도 태연한 척 지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조금 더 용기를 발휘한다면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는 것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주머니들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그는 자위행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에게 심한 욕설과 돌까지 거침없이 투척할 만큼 매우 폭력적이다. 함부로 그를 추월하거나 촬영했다 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보다도 더 큰 문제는 만약 그를 신고했다가는 그를 언젠가 이 산에서 다시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비정상적인 행동 때문에 짬짬이 산에 오르는 즐거움을 포기해야 한다면, 시민들을 위해 조성된 휴식처를 그런 사람에게 고스란히 넘겨주는 꼴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일단 두려움을 털고, 그 남자와 맞닥뜨려 보기로 했다. 만약을 대비해 아주머니에게 제안했다.

"만약 그 남자와 마주쳤을 때, 우리 앞에서 이상한 짓을 하면 아주머니는 최대한 고함이나 비명을 지르세요. 저는 동영상을 촬영할게요."  

바바리맨은 단순 변태?

그동안 내가 마주쳤던 바바리맨들 중 진짜 바바리를 걸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한결같이 후줄근한 추리닝에 반쯤 풀린 눈동자, 그리고 나지막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뭔가를 계속 중얼거렸다. 가령, "얘들아, 나 좀 봐봐..."라고 말하는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 학교 앞 골목길에서 친구와 함께 마주쳤던 변태 아저씨의 이 말은 아직도 내 귀에 생생하다.

"으악~!" 

갑작스러운 친구의 비명 소리를 듣자마자 나도 냅다 뛰어서 재빨리 그 자리를 모면한 것이 바바리맨에 대한 첫번째 기억이다. 산을 조금 더 올라가니, 때마침 중년 부부가 앞서 가고 있었다. 그 뒤를 조용히 따라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남자의 뒷모습이 멀찍이서 보인다. 다행히 길은 평지였지만 그 남자와 거리를 두고 걷기에는 길이 비좁아서 재빨리 옆을 스치듯이 지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일행에 남자가 한 명 끼어 있어서 그런지 우리가 추월하는 동안, 그 남자는 조용했다.

그 남자와 약간 거리가 벌어지자, 아주머니는 뒤를 힐끔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중년 부부에게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저 남자 이상한 남자에요. 무서워 죽을뻔했네~ 저 남자가 아까 웃통을 벗고."

아주머니는 연신 뒤를 힐끔거리며 그 남자의 행각을 되풀이 설명하느라 바빴다. 그러자 갑자기 뒤에서 그 남자의 고함이 욕설과 함께 날아들었다.

"아줌마, 이 ×××야, 왜 자꾸 쳐다보고 ××이야! 너 이리와. 아줌마, 이리와!"

이 남자가 흥분해서 달려오면 어쩌나 싶어 덜컥 겁도 났지만, 다행히 고래고래 소리만 지를 뿐 쫓아오지는 않았다. 사실 그 남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바바리맨의 모습도, 내가 봤던 변태 아저씨들의 모습도 아니었다. 뒤와 옆에서 잠깐 관찰한 모습은 오히려 노숙자에 가까웠다.

무더운 한낮을 버티기에 버거워 보이는 낡고 두터운 털바지에, 상의를 탈의한 등에는 언제부터 붙였는지 알 수 없을만큼 너덜너덜해진 파스가 붙여 있고, 얼굴은 꽤 긴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바바리맨'이라 부르는 이런 노출 증상을 보이는 남자들은 그 증상이 오랜 기간동안 반복적으로 나타날 경우, 정신의학적 진단에 따라 '변태성욕자'로 분류될 수 있다.

그동안 경찰에 체포된 무수한 바바리맨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남자들은 의외로 소심하고 온순한 성격이고, 평범한 직장과 가정을 가진 경우가 많다. 때문에 이들은 위험한 범죄자로 인식되어 강력한 처벌을 받기보다는 성적 충동을 이기지 못해 자기도 모르게 무리한 해프닝을 벌인 불쌍하리만치 지질한 남자로 치부되어 훈방조치나 벌금형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런데 과연 정말 그럴까? 이 노숙자 바바리맨도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묵묵히 제 갈 길만 간다면, 사실은 위험하지 않은 걸까? 아주머니와 헤어지면서 '조심히 내려가세요'라고 신신당부하면서도, 그 남자가 또 다른 여자들을 행여 해코지 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은 지나친 노파심일까?


태그:#바바리맨, #정신성적 장애자, #성범죄자, #노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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