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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야 부탁해!(My Traveling Camera)' 프로젝트는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결핍되어 있는 빈곤층 아이들에게 디지털카메라를 전달해 마음껏 사진을 찍게 하고, 그 사진들이 담긴 카메라를 대신 여행시켜 비슷한 처지의 외국 친구들을 맺어주고 자존감을 획득하게 하는 행사입니다. <기자 말>

'큰소리 빵빵 쳤는데 이러다 사진 한 장도 못 건지는 사태가 벌어지면 어떡하지?'

2011년 10월, '카메라야 부탁해!'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스타트하면서 그동안 애써 무시해왔던 온갖 의구심과 불안이 산더미처럼 불어나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의 스타트는 한국으로 끊었다. 그런데 한국편 아이들의 사진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편 아이들이 프로젝트에 억지로 참여했다거나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랬던 게 아니다. 오히려 아이들은 자기가 찍은 사진을 다음 나라의 아이들이 본다는 사실에 들떠 했고 당분간이지만 자기 카메라가 생겼다는 사실에 아주 행복해했다.

문제는 사진 찍을 시간의 절대적인 부족이었다. 한국에서는 초등학교 4학년만 돼도 아이들이 방과후 공부방이다 학원이다 해서 하루에도 몇 군데씩 뺑뺑이를 돌기 때문에 도무지 사진 찍고 놀 시간이 나지 않는 것이다. 저녁 나절이나 돼서 집앞 골목과 집안에서 사진 몇 장 찍는 게 전부. 결국 한국편 아이들 다섯 명이 열흘 동안 찍은 사진은 고작 330여 장에 불과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진의 질적인 측면이었다. 포커스가 좀 안 맞고 구도가 불안정해도 아이들다운 신선한 시각과 느낌의 사진을 기대했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찍은 사진들은 너무 안정적인 구도와 익숙한 느낌의 사진들로 무난하나 창의적이지 못하고 개성이 없는 그런 사진들이 대부분이었다. 뭐랄까, 사진을 직관적으로 찍는 게 아니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계산된 이미지를 구현하고 모사한다는 느낌이다. 어려서부터 인터넷과 TV를 많이 접해서인지 사진 찍기와 이미지에 대한 고정관념이 이미 박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계속 이런 식이라면 일찌감치 프로젝트를 접어야 하는 게 아닐까 불안에 떨며 베트남으로 향했다. 한편으로는 믿는 구석도 있었다. 베트남 아이들은 최소한 한국 아이들처럼 바쁘지 않을테니까! 그런데 맙소사~ 베트남 아이들도 바쁘긴 마찬가지였다. 차이가 있다면 한국 아이들은 공부하러 다니느라 바쁘고 베트남 아이들은 농사일과 집안일 돕느라 바쁘다는 것.

게다가 베트남은 인구가 많다 보니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하고, 집안 형편상 자기 소유 휴대폰이 있는 아이가 별로 없어 한꺼번에 모여 프로그램을 진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에서와 똑같은 인원과 똑같은 기간인데도 베트남에서는 사진이 총 1700여 장이 나왔다. 그리고 최소한 사진 한 장도 건지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나의 불안감은 베트남 아이들이 말끔히 씻어주었다.

제1기 베트남편 아이들-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남(Nam/15세), 응옥아잉(Ngoc Anh/12세), 헙(Hop/15세), 흐엉((Huong/9세), 레(Le/15세)
 제1기 베트남편 아이들-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남(Nam/15세), 응옥아잉(Ngoc Anh/12세), 헙(Hop/15세), 흐엉((Huong/9세), 레(Le/15세)
ⓒ 김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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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 내가 만난 다섯 명의 소녀들은 모두 하노이시의 외곽인 탕와이현 땀흥마을에 살고 있다. 이 곳은 2008년에 행정구역상 하노이시에 편입되긴 했지만 하노이시의 연간 주민소득 $1200에 절반도 못 미치는 소득으로 살아가는 전형적인 베트남의 농촌 마을이다. 베트남은 세계 2위의 쌀 생산국으로 일년에 삼모작까지도 가능한 나라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도와 농사일을 거드는 게 베트남 농촌 아이들의 일상이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비가 많이 오면 밖에 나가서 놀지 못한다고 우는 게 아니라 밭이 물에 잠겨 야채를 팔지 못하게 될까 봐, 말리려고 내놓은 쌀알들이 젖어 썩어버릴까봐 운다. 또한 어디로 눈을 돌려도 나무가 자라고 꽃이 피고지니 감수성의 차원이 다르고 감상에도 개성이 있다. 아침에는 모든 것이 반짝거린다는 레의 이야기를 글과 이미지로 자연을 배운 한국의 도시 아이들이 과연 공감할 수 있을까? 

"저는 아침을 가장 좋아해요. 아침에는 모든 것이 반짝거리기 때문이에요."(레/베트남)
 "저는 아침을 가장 좋아해요. 아침에는 모든 것이 반짝거리기 때문이에요."(레/베트남)
ⓒ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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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에는 논밭 사이에 절이 있어 낭만적으로 보여요. 이 절을 외국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사진 찍었어요."(응옥아잉/베트남)
 "우리 마을에는 논밭 사이에 절이 있어 낭만적으로 보여요. 이 절을 외국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사진 찍었어요."(응옥아잉/베트남)
ⓒ 응옥아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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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홍수가 나서 밭이 물에 잠겼어요. 그래서 한동안 야채가 비싸졌는데 지금은 다시 싸졌어요."(응옥아잉/베트남)
 "지난번에 홍수가 나서 밭이 물에 잠겼어요. 그래서 한동안 야채가 비싸졌는데 지금은 다시 싸졌어요."(응옥아잉/베트남)
ⓒ 흐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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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레인지는 위험하고 비용도 많이 들어요. 우리집에서는 요리할 때 장작을 때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볏짚으로 요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헙/베트남)
 "가스레인지는 위험하고 비용도 많이 들어요. 우리집에서는 요리할 때 장작을 때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볏짚으로 요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헙/베트남)
ⓒ 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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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사진들이 완성도가 높고 주목할 만한 예술 사진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아이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잘 찍은' 사진이 아니라 '좋은' 사진이다. 어떤 사진이 좋은 사진이냐 하는 질문에는 정답이 없을 것이다. 다만 나는 찍는 사람의 느낌이 전달되는 사진, 이야기가 상상되는 사진을 좋은 사진이라고 생각한다. 얼굴이 반쯤 잘리고 초점이 흔들린 사진이어도 찍는 사람의 감정이 느껴져서 보는 이도 같이 즐겁거나 슬프거나 아프다면 그게 좋은 사진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좋은 사진을 많이 찍은 아이이자 '카메라야 부탁해!' 프로젝트에 참여한 스물한 명의 아이들 중 내가 가장 주목하는 아이가 있다. 남(Nam)이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 나는 남이를 편애한다. 티는 안내지만 편애는 한다. 남이에게는 사진에 대한 남다른 재능이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 아이가 가진 넘치는 감수성과 사랑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 남이에 대한 첫인상은 '없다'! 다섯 명의 베트남 아이들 중 흐엉이는 막내라서, 응옥아잉과 헙은 예쁘장해서, 레는 센스가 뛰어나서 각각 기억에 남는데 남이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고 말수도 없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있어도 없는 것 같고 없어도 있는 것 같은 존재감 없는 그런 아이. 그러다 사흘 후 아이들을 다시 만나 그때까지 찍은 사진을 보는 날이었다. 비로소 남이의 존재감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집 옥상에서 내려다본 골목 풍경
 집 옥상에서 내려다본 골목 풍경
ⓒ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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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서 내려다본 옆집 마당
 옥상에서 내려다본 옆집 마당
ⓒ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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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개
 이웃집 개
ⓒ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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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마다 꼭 찍는 사진이 바로 개 사진이다. 그런데 느낌이 있는 개 사진은 남이가 찍은 이 사진뿐이다. 개가 뭐라 말을 건네는 것도 같고 어딘지 쓸쓸해 보이는 건 나만의 인상일까? 이상하게도 다른 아이들의 사진은 휙휙 잘 넘어가는데 남이의 사진들에서는 자꾸 멈추게 되었다. 잘 찍고 못찍고를 떠나서 감정을 자극하는 사진들이 있고 왠지 여운이 남는 사진들이 있다.

그런데 그런 사진들마다 주인공을 알아보면 십중팔구 남이였다. 그때부터였다, 도대체 이런 느낌의 사진을 찍는 아이는 어떤 아이일까 궁금해진 것은. 존재감 없던 아이를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역전시킨 건 카메라였다. 남이가 사진을 찍지 않았다면 남이는 나에게 첫인상도 기억나지 않는 무명씨로 남았을지 모른다. 그제서야 알았다, 어떤 아이는 찍히는 대상이 아니라 찍는 주체일 때 더 빛난다는 것을.

사진을 보기 전 아이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사진을 보았을 때 아이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카메라야 부탁해!' 프로젝트는 아이들에게 처음 카메라를 전달할 때 사진일기장도 함께 준다. 거기에 매일 자신이 찍은 사진 한 장과 앞선 나라의 친구가 찍은 사진 한 장을 골라 짧은 감상을 적게 했다. 거기에 남이는 한국의 친구가 찍은 햄스터 사진과 자기가 찍은 구순구개열(일명 언청이) 장애인 사진을 고르고 이렇게 썼다.

"이 사진의 쥐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고 있다. 꼭 영화배우 같다. 자신감이 있고 두려움이 없어 보인다."
"이 장애인은 코와 입이 붙어 있어서 호흡이 어려워 보인다. 이 사진을 찍으면서 많이 슬펐다. 왜냐하면 이 병은 선천적인 것이고 아이가 나와 비슷한 나이이기 때문이다."

놀이동산에서 놀이기구를 타러 간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남.
 놀이동산에서 놀이기구를 타러 간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남.
ⓒ 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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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아이가 포착한 사진에서 남이의 전형적인 모습이 보인다. 남이는 장면 속의 주인공이 되기보다 한발짝 떨어져서 장면 밖에 있는 것이 더 편해 보이는 아이 같다. 그런 선입견 때문인지 남이의 사진을 보면 나는 어색하고 소심하게 한발짝 떨어져서 셔터를 누르는 남이가 보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자꾸, 신경이 쓰였다. 이 아이는 왜 이러는 걸까?

"작년에 남이 엄마가 돌아가셨거든요. 공사장에서 인부로 일하다 높은 데서 떨어져 죽었대요."

말을 잇지 못하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남이를 대신해 통역이 설명해주었다. 그저 가족관계에 대해 묻는 평범한 인터뷰였는데 남이는 가족 얘기만 나와도 죽은 엄마 생각에 감정이 복받치는 모양이었다. 본의 아니게 남이를 울린 격이라 나는 더욱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이 아이, 놀이동산의 로망인 대관람차를 보자 아이들이 모두 타고 싶다고 수선을 피울 때에도 혼자 마다하며 자기는 기다리고 있겠다고 한다. 다른 아이들이 난생 처음 놀이동산에 왔다고 들떠서 비상금을 챙겨오고 그 돈으로 음료수와 기념품을 살 때도 가만히 구경만 한다. 귀퉁이가 헤져 너덜거리는 남이의 낡은 가방을 보면서 나는 남이가 돈이 없어 쇼핑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막판이 되자 남이는 야구모자 하나에 다른 아이들이 쓴 돈의 몇 배나 되는 돈을 지불하면서 반전을 보여주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도 쓰지 않던 아이가, 자기 가방은 다 헤져서 부끄러워 손으로 가리고 다니는 그 아이가 아버지에게 선물하겠다고 1년은 족히 모았을 용돈을 털었다. 이런 아이를 보고 사랑하지 않을 장사가 과연 있을까!

얼마 후 베트남을 떠난 뒤 통역을 통해 남이가 아주 고마워하더라는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남이의 다 헤어진 가방이 못내 신경이 쓰여 떠나기 전날 남이를 위해 새 가방을 샀고 다른 아이들 모르게 남이에게 전달해줄 것을 부탁하고 떠났던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는 남이가 많이 밝아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남이의 변화에 내 편애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안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다른 누구보다 남이가 가장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건 두 말 하면 잔소리 아닐까?

사진을 보기 전 아이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사진을 보았을 때 아이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나는 아이에게 아이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의미가 되었다.

두손 모아 꽃
 두손 모아 꽃
ⓒ 응옥아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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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카메라야 부탁해!> 프로젝트는 아시아의 빈곤층 아이들에게 사진을 찍게 하고 카메라를 대신 여행시켜 친구와 자존감을 선물합니다. 이 연재는 2011년 10월~12월 한국, 베트남, 미얀마, 몽골의 4개국에서 진행된 제1기 아이들 21명의 사진과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태그:#카메라야 부탁해, #사진, #국제구호, #여행, #여행의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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