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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청산도로 내려와 펜션을 운영하고 있는 김성호 씨가 펜션에서 수건을 정리하고 있다. 펜션에서 손님들이 쓴 것인데, 깨끗하게 빨아서 말린 것이다.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청산도로 내려와 펜션을 운영하고 있는 김성호 씨가 펜션에서 수건을 정리하고 있다. 펜션에서 손님들이 쓴 것인데, 깨끗하게 빨아서 말린 것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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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기 전에 솔직히 고민 많이 했죠. 3년 정도 했어요. 내려갈까 말까? 또 내려가면 뭘 해야 되나? 내 적성과 능력에 맞는 일이 뭐 있을까? 수없이 고민했죠. 그러다가 선택한 게 지금의 펜션사업이에요."

서울생활을 끝내고 '슬로시티' 남도땅 완도 청산도로 내려와 펜션을 운영하고 있는 김성호(50)씨의 얘기다. 김씨는 지난 2009년 가을 귀촌, 고향에서 인생 후반전을 활기차게 열어젖혔다.

김성호 씨가 운영하고 있는 펜션. 김 씨는 서울생활을 끝내고 3년 전 고향 청산도로 들어와 살고 있다.
 김성호 씨가 운영하고 있는 펜션. 김 씨는 서울생활을 끝내고 3년 전 고향 청산도로 들어와 살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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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 씨와 부인 이경미 씨가 청산도 해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고향에서의 밝은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김성호 씨와 부인 이경미 씨가 청산도 해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고향에서의 밝은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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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의 고향은 완도 청산도. 쌀이 풍족하지 않던 시절, 보리와 고구마를 주식으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일찍 서울로 올라간 부모를 따라 초등학교 때부터 서울생활을 했다. 중·고·대학교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업, 20년 넘은 직장생활까지 그렇게 40년을 서울에서 살았다.

그는 서울생활을 하면서도 틈나는 대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있는 청산도를 찾았다. 그때마다 고향은 내 집처럼 편안했다. 언젠가는 고향으로 내려와 살고 싶다는 생각을 꾸준히 했다.

그렇다고 서울생활이 불편하거나 부끄러운 건 아니었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 들어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결혼도 하고 어엿한 집도 장만했다. 두 아이의 아빠로 평범하지만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김성호 씨가 펜션에서 손님이 고기를 구울 수 있도록 숯불을 피워주고 있다. 저만치 보이는 솔밭이 지리해수욕장이다.
 김성호 씨가 펜션에서 손님이 고기를 구울 수 있도록 숯불을 피워주고 있다. 저만치 보이는 솔밭이 지리해수욕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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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 씨가 펜션을 찾은 손님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씨의 펜션은 완도 청산도 지리해수욕장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김성호 씨가 펜션을 찾은 손님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씨의 펜션은 완도 청산도 지리해수욕장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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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귀촌을 하고 또 고향에서 의미있는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무작정 미룰 수만은 없었다.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내려가야 고향에서 보람있는 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막연한 상상과 기대보다 꼼꼼한 사전 조사와 검토가 필요했다. 아무리 고향이 좋다지만 최소한의 생계수단도 마련해야 했다. 지역의 발전 가능성도 따져봤다. 다행히 청산도는 우리 국민이면 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어하는 매력적인 섬이었다. 슬로시티로 지정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었다.

게다가 직장생활에서 얻은 마케팅 경험과 경영마인드, 고객서비스 경험도 지역관광에 보탬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산도의 관광시설이 아직은 부족하고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해 수익을 낼 수 있겠다는 판단도 섰다. 펜션을 선택한 이유다.

식구들의 동의를 얻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부인(이경미·47)과 공감대를 형성해 왔기 때문이다.

청산도 조약돌 해변에 앉아 V자를 그려보이는 김성호 씨. 그 옆에는 서울 출신의 부인 이경미씨다.
 청산도 조약돌 해변에 앉아 V자를 그려보이는 김성호 씨. 그 옆에는 서울 출신의 부인 이경미씨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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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 씨가 운영하는 솔바다펜션으로 가는 길목에 그려져 있는 마을벽화. 김성호 씨와 문화관광해설가들이 지난해 가을 함께 그린 것이다.
 김성호 씨가 운영하는 솔바다펜션으로 가는 길목에 그려져 있는 마을벽화. 김성호 씨와 문화관광해설가들이 지난해 가을 함께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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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션 터는 할아버지·할머니와 함께 살던 지리의 옛 집으로 정했다. 그 집을 지키며 살고 싶어서다. 펜션을 짓기로 하고 행정기관을 수없이 찾아다녔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전화부터 했다. 담당직원들도 친절하게 대해줬다.

옛 집을 뜯으면서도 폐기물을 무조건 내다버리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손수 지게로 져 날랐던 넓적한 구들장은 마당에 깔았다. 정겨웠던 돌담의 돌은 화단을 만드는데 고스란히 사용했다. 펜션의 겉모습도 마을과 조화를 이루도록 소박하게 꾸몄다.

주변 인테리어와 조경은 부인과 함께 정성껏 했다. 그 과정도 행복했다. 마을주민들도 좋아하며 격려해 주었다. 옛 집의 소박함을 살리면서도 현대식의 펜션이 만들어졌다. 해송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저녁노을이 황홀하게 물드는 청산도 지리에 또 하나의 명물이 탄생한 것이다. 펜션 이름도 지리해변을 상징하는 '솔바다펜션'으로 정했다.

청산도 당리를 찾은 여행객들에게 청산도에 대해 해설해 주고 있는 김성호 씨. 펜션을 운영하면서 틈나는 대로 문화관광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청산도 당리를 찾은 여행객들에게 청산도에 대해 해설해 주고 있는 김성호 씨. 펜션을 운영하면서 틈나는 대로 문화관광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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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 당리마을 벽화. 김성호 씨를 비롯 완도문화관광해설가들의 모임인 '청산애'가 청산도를 찾은 여행객들에게 볼거리 하나라도 더 제공하자는 의미로 그린 것이다.
 청산도 당리마을 벽화. 김성호 씨를 비롯 완도문화관광해설가들의 모임인 '청산애'가 청산도를 찾은 여행객들에게 볼거리 하나라도 더 제공하자는 의미로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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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완도군에서 실시한 생태문화관광해설가 양성교육을 받았다. 바쁜 나날이었지만 3개월 동안 열심히 공부했다. 지역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는 계기가 됐다. 주민들과 풍부한 인연을 맺는 기회도 됐다.

해설가 모임(청산애)의 초대 회장을 맡아 지역을 가꾸는 일에도 앞장섰다. 회원들과 함께 청산도의 문화유산과 풍속을 알리는 것은 물론 마을버스 정류장에 지역의 전설과 풍경을 담은 벽화를 그렸다. 당리마을과 진리마을 등 여러 곳에서 벽화를 만날 수 있다. 마을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대상으로 한 한글공부방도 운영했다.

"도시사람이 농촌으로 온다는 건 모든 것이 바뀌고 변하는 거잖아요. 일상생활은 물론 습관과 사고까지도 새롭게 해야죠. 그리고 가장 자신있는 일이나 그것에 가까운 일을 찾아야 하는데,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이 그런 것 같습니다."

고향에서 '청산에 살으리랏다'를 부르며 인생 후반전을 열어가고 있는 김씨의 말이다. 그는 이어 "삶을 개척하기 위해 우리 선조들이 구들장논을 만들었던 그 정신으로 고향에서 새로운 삶의 모델을 만들어가고 싶다"고 덧붙였다.

솔밭과 어우러진 해질 무렵의 청산도 지리해수욕장. 김성호 씨가 운영하는 솔바다펜션에서 내려다 본 풍경이다.
 솔밭과 어우러진 해질 무렵의 청산도 지리해수욕장. 김성호 씨가 운영하는 솔바다펜션에서 내려다 본 풍경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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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김성호, #귀촌, #청산도, #청산애, #솔바다펜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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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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