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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그들의 얘기를 듣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분명히 그들의 얘기였다. 기타를 만들다가 전기톱에 손가락이 잘려나가도 월 70만 원의 저임금에 허덕여야 했던 그들의 얘기였다. 노조를 만들었더니 공장 문을 닫아버려서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나앉아야 했던 그들의 얘기였다. "살려달라"며 제 몸에 불을 놓고, 송전탑에 올라갔던 바로 그들의 얘기였다.

 

2007년 봄, 국내 최대 기타 제조회사인 콜트·콜텍사로부터 집단 정리해고를 당하고 살 길을 잃은 노동자 56명의 얘기였다. 5년 3개월째 폐업·정리해고 철회 요구를 하고 있지만, 국내에서조차 서서히 잊혀가고 있는 그들의 얘기가 지난 1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메이데이(노동절) 기념행사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의 얘기를 풀어놓고 있는 사람은 바로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톰 모렐로(Tom Morello)였다.

 

 

"정치권에 투입되는 대기업의 돈, 차단해야"

 

이날 맨해튼 유니온스퀘어는 메이데이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몰려든 수천 명의 시위대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월가 점거(Occupy Wall Street) 시위대와 노조, 이민자단체 등이 함께 개최한 메이데이 행사였지만 사실상 월가 점거 시위대가 주도했다. 시위대는 메이데이를 '월가 점거 운동' 재점화의 기회로 삼기 위해 지난 3월부터 노조와 각종 단체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등 적지 않은 공을 들였다. 지난해 전 세계를 휩쓴 '월가 점거 운동'의 진원지인 뉴욕뿐 아니라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시카고, 마이애미 등 미 전역 주요 도시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실제 유니온스퀘어 곳곳에서는 지난해 월가 점거 운동이 처음 벌어졌던 리버럴스퀘어(주코티공원)처럼 무료로 식사·의류·서적 등이 제공됐고, 월가의 탐욕과 불평등한 사회·경제 시스템을 규탄하는 피켓들로 도배가 됐다. 미국 플로리다에서 자경 단원에게 살해당한 흑인소년 트레이븐 마틴의 사진을 든 시위대도 여럿 보였다. 특히 시위대는 올해 대선을 겨냥해 정치권으로 유입되는 대기업의 자본을 집중 비판했다. 대기업이 돈으로 정치권을 조정해, 99%를 위한 정책이 아니라 1%만을 위한 정책을 편다는 것이다.

 

공립학교 교사인 존 보잇(48)씨도 메이데이를 맞아 파업을 하고 광장으로 나왔다. 그는 "1% 부자들이 사회·경제 시스템, 미디어, 정부를 조정하고 있다"며 "국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힘도 갖지 못하는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대기업의 돈이 정치에 투입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대기업의 돈이 정치인을 대상으로 한 로비에 쓰이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대부분의 국민이 아닌 극소수의 부자를 위한 정책을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후 4시가 가까워지면서, 광장으로 속속 밀려드는 각종 단체들로 인해 전체 시위대의 규모가 급격히 증가했다. 워싱턴스퀘어에 집결해 있던 컬럼비아대학, 뉴욕대학 등 학생 수백 명이 "교육은 권리다"라고 구호를 외치며 광장에 도착했고, 교원노조 소속 노동자들이 뒤를 이었다. 지하철, 철도, 버스 등에서 일하는 교통노조와 보건노조는 일찌감치 광장 서쪽 편에 자리를 잡았다.

 

허드슨강 건너 브룩클린에서도 수백 명의 이민자단체 소속 노동자들이 윌리엄스버그 다리를 건너 광장 시위대에 합류했다. 차이나타운, 소호, 그리니치빌리지 인근에서는 여전히 일부 시위대의 거리행진이 이어지고 있었다. 시위대는 각종 악기를 이용해 흥을 돋우는 한편 자유의 여신상 등을 형상화한 대형 인형을 들고 오거나 페이스페인팅을 하는 등 축제 분위기를 연출했다.

 

 

반월가 시위대를 흥분시킨 한국 노동자들

 

특히 반사회적인 메시지와 직설적인 선율의 랩메탈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한 밴드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의 기타리스트 톰 모렐로가 광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래미상 수상자이기도 한 그는 브라이언트 파크에서부터 수백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유니온스퀘어에 도착했다. 톰 모렐로는 이날 월가 점거 운동의 '메이데이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수십 명의 기타리스트를 모집, '기타미(Guitarmy)'라는 기타밴드를 결성했다.

 

곧이어 행사가 시작됐고, 톰 모렐로는 '기타미'를 이끌고 광장 남쪽에 마련된 대형 무대 위로 올라갔다. 무대 앞을 가득 메운 수천 명의 시위대는 태어난 지 6개월 된 갓난아기부터 90대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백인, 흑인, 히스패닉, 아시안 등 다양한 인종, 그리고 다양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정치적인 구호가 적힌 피켓만 없다면 그들은 마치 한여름 밤 페스티벌에 참여한 관중들처럼 잔뜩 흥에 겨워 있었다. 

 

흰색 셔츠와 모자를 쓴 모렐로가 어깨에 걸친 기타를 움켜쥔 채 마이크를 잡자 시위대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모렐로는 뜻밖에도 노조를 결성했다가 해고된 한국의 기타 제작 노동자들에 대한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미국의 유명 기타 제조업체) 펜더(Fender)사의 주문을 받아 한국에서 기타를 만들던 (콜트·콜텍사)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자, 회사는 한국 공장을 폐쇄하고 중국으로 옮겨갔다. (지난 2010년) 직장을 잃은 노동자들이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미국에 왔다. 나는 그들을 돕기 위한 자선 행사를 제안했다.

 

그러나 행사 직전에 아이티에서 큰 지진이 발생했다.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 간절하게 돈이 필요했던 이 한국의 노동자들은 그들을 위한 자선행사로부터 나올 예정인 수익금 100%를 아이티 난민 구제를 위해 쓰는 것에 동의했다. 그들은 그 돈이 더 필요한 사람들에게 돈을 주기 위해 6000마일(약 9600㎞)을 여행했다."

 

모렐로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위대에서는 다시 큰 함성과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행사 초반임에도 이미 시위대의 열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한국 기타 제작 노동자들에 대한 모렐로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그들의 사심 없는 국제적인 연대 행동을 보면서 나는 <월드 와이드 레벌 송즈(World Wide Rebel Songs)>를 만들었고, 그 곡은 그 한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자선행사에서 공연됐다. 그것은 (한국 노동자들이 보여준 것은) 내가 보고 싶은 세상이고, 내가 아이들과 함께 살고 싶은 세상이고, 내가 음악을 통해 이루고 싶은 세상이고,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이 싸워서 만들고 싶은 세상이고, 오늘 메이데이를 기념해 전 세계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나 만들려는 세상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어느 선동가보다도 설득력이 있는 모렐로의 달변에 시위대는 환호성과 함께 양손을 불끈 치켜 뻗으며 강한 동의를 표했다. 이어 모렐로는 시위대에게 한국 노동자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월드 와이드 레벌 송즈>를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모렐로는 이 노래에 대해 "타인을 위해 타인과 함께해야, 혼자일 때보다 목표를 이룰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만일 여러분들이 이 노랫말을 기억할 수 없다면 단지 강력한 투쟁의 주먹을 공중으로 치켜들고 '나~ 나~ 나~(Na~ Na~ Na~)'라고 따라 부르라"고 주문했다.

 

콜트·콜텍사 해고노동자들은 회사와의 기나긴 싸움 속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추장을 담가 팔았고, 그 돈으로 미국과 일본, 독일 등지의 악기 관련 행사에 참석해 도움을 요청했다. 모렐로가 콜트·콜텍사 노동자들을 처음 만난 것도 지난 2010년 1월 미국 애너하임에서 열린 세계적인 악기쇼 '남(NAMM) 쇼'에서였다.

 

당시 모렐로는 콜트·콜텍사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공식 지지를 선언한 뒤, "노동자의 아픔이 서린 기타, 착취받는 기타로는 노래할 수 없다"며 "기타는 착취가 아니라 해방의 수단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후로도 모렐로는 콜트·콜텍사 해고노동자들의 미국 원정 투쟁 때마다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콜트사에 악기 주문을 맡기는 펜더사를 향해 콜트·콜텍사 해고노동자들을 만나서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를 요청하는 등 직접적인 활동에도 발 벗고 나섰다.

 

 

"우리의 모든 불만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버드대 출신의 엘리트였지만 '혁명'을 연주하는 기타리스트로 진로를 전환한 모렐로는 "모든 성공한 사회진보 운동은 훌륭한 사운드트랙을 갖고 있다"며 "월가 점거 시위의 사운드트랙은 운동의 방향처럼 풀뿌리 민주주의와 민주주의를 연상 시킨다"고 말했다.

 

모렐로는 이어 미국의 전설적인 포크 싱어송라이터 우디 구스리(Woody Guthrie)가 미국 노동자들을 대변하기 위해 부른 곡 <디스 랜드 이즈 유어 랜드(This Land Is Your Land)>를 부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분들이 어렸을 때 그들은 이 노래를 검열했지만, 우리는 지금 이 노래를 실제의 언어로 되돌려 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에게 할당된 시간이 거의 끝나가자, 모렐로는 "우리는 2분이 남았다. 그들이 (행사 진행자들이) 전원 플러그를 뽑아도 노래를 멈추지 말라"며 시위대와 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디스 랜드 이즈 유어 랜드>는 모렐로가 지난해 11월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에 참여할 때 즐겨 부르곤 했던 노래 중 하나다. 다시 한번 그의 노래를 듣고 싶어 했던 시위대들은 그와 함께 힘차게 목청을 높였다. 실제 전원 플러그가 뽑혀서 마이크는 나오지 않았지만 모렐로와 그의 '기타미', 그리고 시위대는 끝까지 노래를 불렀다.

 

공식 행사가 끝나고 행진이 시작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1만여 명을 훌쩍 넘어섰다. 월가 점거 시위대 측은 이날 행진에 참여한 시위대가 2만5000명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뉴욕의 상징인 '옐로우 캡'(노란 택시) 노조가 행진을 앞장섰다. 시위대가 수백 미터 길게 늘어선 로어 맨해튼 브로드웨이는 경찰이 차량 통행을 전면 금지해 행진이 수월하게 진행됐다. 그러나 경찰은 인도와 도로 사이에 바리케이드를 세워놓고 시위대가 뉴욕증권거래서나 월스트리트로 진입하는 것 역시 철저하게 차단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남편, 그리고 6개월 된 아들 아브커스까지 4대가 함께 시위에 참가한 메건(38)씨는 "지난해부터 월가 점거 시위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아이 때문에 집에서 지켜보기만 했다"며 "월가 점거 시위가 미국 사회의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고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고 말했다.

 

행진 대열의 가장 마지막은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엉클 샘' 대형 인형과 흉측한 모양의 '자유의 여신상' 대형 인형이 장식했다. 또한 그 뒤편으로 메이데이의 상징인 메이폴이 뒤따랐다. 메이폴의 상단에는 "우리의 모든 불만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날 시위대는 밤 8시경까지 행진을 벌인 뒤, 평화롭게 해산했다.


태그:#월가 점거 시위, #톰 모렐리, #노동절, #콜트 콜텍 해고노동자, #메이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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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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