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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보강 : 18일 오후 3시 40분]

이번 봄은 유난히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는 날씨로 기억될 것 같다. 4월이지만 낮에만 햇살이 반짝 날뿐, 아침 저녁으로 손을 호호 불 정도로 일교차가 크다. 도시인들이야 이런 날씨엔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나 정도를 걱정하겠지만, 봄날의 꽃들을 주인공 삼아 관광 축제를 벌이는 지역에서는 고민이 크다. 덕분에 진해 벚꽃 축제는 '벚꽃 없는' 축제를 벌였고, 섬진강 벚꽃 축제는 아예 열리지 않는다. 벚꽃이 언제 필지 도통 모르겠다는 이유란다.

벚꽃이 피어나면 더욱 운치 있는 강변이 되지만 좀 늦게 피어난다고 해서 안달복달하지 않아도 되는 정겨운 강변이 있다. 바로 보성강이다. 지난해 자전거를 타고 곡성의 섬진강변을 달리다가 풋풋한 강줄기를 만났었는데 알고 보니 섬진강의 동생뻘인 보성강이었다. 섬진강과는 또 다른 정취가 느껴져 꼭 와봐야지 마음먹었던 곳이다.

보성강에 찾아 가기 위해 지난 15일, 기차를 타고 곡성역으로 향했다. 기차 안은 봄꽃 구경을 떠나는 아저씨, 아주머니 등 상춘객들로 시끌벅적하다. 낮술에 조금 취한 아저씨가 크고 거나해진 목소리로 전화 통화를 해도 평소와 달리 별로 거슬리지 않는다. 아마 봄꽃 때문이리라. 게다가 보성강변의 마을 석곡면에는 오래된,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시골 오일장이 선다고 한다. 덕분에 기차소리가  기대에 부푼 내 심장 박동 소리처럼 들려온다.

가족들의 즐거운 강변 놀이터, 곡성 섬진강

곡성의 섬진강변은 가족들이 즐겁게 놀 수 있게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곡성의 섬진강변은 가족들이 즐겁게 놀 수 있게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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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마을이 조성된 곡성의 섬진강변. 이곳은 기적소리가 우렁찬 증기 기관차도 있고 레일 바이크도 있다. 가족단위의 관광객들이 즐겁게 놀 수 있는 곳이란 얘기다. 벚꽃이 필 시기에 맞춰 곡성 섬진강 천문대 옆의 청소년 야영장에서는 1인용에서 4인용까지 자전거를 빌려주고 있다. 다양한 생김새의 자전거들이 벚꽃 핀 섬진강 가를 줄지어 달리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갓길도 없는 좁은 도로지만 이때만큼은 자동차들도 어쩌지 못하고 가만히 뒤 따른다. 

섬진강을 몇 번 여행하면서 알게 된 곡성의 '추천 강변길'이 있다. 곡성역에서 기차마을을 지나 보이는 작은 다리 금천교를 지나자마자 왼쪽 둑방길로 조금 가면 된다. 그곳에는 동네 주민들이 만들어 놓은, 이름도 정겨운 '세월교'가 나타난다(지도에도 안 나오는 아주 작은 다리다). 발밑에 유유히 흘러가는 섬진강물을 건너면 강을 바라보며 걷거나 달릴 수 있는 임도가 펼쳐져 있다. 차량들과 함께 건너편의 17번 강변 국도를 달리지 않아도 되는, 여행자를 위한 길이다.

섬진강변 산기슭의 튼실한 야생 고사리들이 주민들에게 별미가 되어주고 있다.
 섬진강변 산기슭의 튼실한 야생 고사리들이 주민들에게 별미가 되어주고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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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농로이자 포장과 비포장이 교차하는 임도지만, 자전거가 지나가기엔 너무도 여유로운 길이다. 다양한 톤의 새소리들을 감상하며 천천히 페달을 밟는데 자전거가 지나가자 왼쪽 산기슭에서 풀썩풀썩 들짐승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어디 멀리 오지여행을 온 기분이다. 또다시 산 위쪽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난다. 그런데, 내 쪽으로 점점 크게 다가오는 것 같은 기분. TV 뉴스에서나 보던 멧돼지를 마주치면 어쩌나 걱정한 순간, 심마니의 풍채를 지닌 동네 아주머니가 내 앞에 불쑥 내려온다.

방금 전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주머니는 "어디서 왔냐" "어디로 가냐" "왜 혼자 다니냐"는 둥 익숙한 질문들을 연달아 날리신다. 그녀의 한쪽 어깨에 걸친 심마니 배낭 같은 가방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했다. 푸릇푸릇 튼실해 보이는 야생 고사리가 담겨 있었다. "이맘때 캐서 볶아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는 얘기를 들으니 고사리 특유의 향이 저절로 떠오른다. 싱싱한 야생 고사리를 보고서야 비로소 귀여운 아기의 손을 보고 왜 '고사리 손 같다'고 표현하는지 담박에 알게 됐다.

곡성에 유일하게 남아 있다는 이채로운 줄배, 강건너 공사중인 굴착기가 줄배의 운명을 말해주는 듯하다.
 곡성에 유일하게 남아 있다는 이채로운 줄배, 강건너 공사중인 굴착기가 줄배의 운명을 말해주는 듯하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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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와 한동안 얘기를 나누며 걷다가 문득 강가에 있는 쪽배 한 척이 눈에 들어왔다. 배 위에 줄이 강 건너까지 이어진 것을 보아하니 말로만 듣던 줄배였다. 신기해 하는 내게 산골 아주머니는 "이 배가 곡성에서 유일하게 남은 줄배"라고 설명해주셨다. 그런데, 건너편에 웬 굴착기가 강변을 파헤치며 공사를 하고 있다. 의아해하는 내게 햇살에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아주머니께서 예상치도 못한 말씀을 하셨다.

글쎄 '4대강 공사'를 하는 거란다. 그러고 보니 섬진강을 살리자며 4대강 공사를 홍보하는 큰 팻말이 가까이에 보인다. 다른 강은 잘 모르겠지만 섬진강을 살리자는 말은 참 이해할 수 없는 홍보 문구다. 내가 사는 동네의 한강이나 좀 살려줬음 좋으련만…. 드디어 섬진강에도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강 건너편의 굴착기가 정겨운 줄배의 운명을 말해 주는 듯하다.

정다운 시골 외사촌 같은 강, 보성강

보성강변 사는 오래된 벚나무의 꽃잎들이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보성강변 사는 오래된 벚나무의 꽃잎들이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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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휴게소인 가정역을 지나면서 어느새 깔끔한 아스팔트 포장도로로 바뀐다. 울퉁불퉁 임도를 달리다 만난 아스팔트길은 비단길 마냥 매끄럽고 부드럽다. 자전거는 문명의 혜택을 몸으로 체감하게도 한다. 가정역 주변엔 캠핑장, 천문대, 자전거 대여소 등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놀러온다. 이제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길가의 벚꽃을 감상하며 보성강이 나타나는 압록역 앞 다리 예성교, 압록교를 향해 달려간다.

사람들이 모래사장 물가에서 발을 담그며 놀고 있는 압록교 밑 유원지가 바로 섬진강과 보성강이 만나는 곳이다. 보성강이 형님뻘인 섬진강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옛날엔 벚나무들이 무성한 둑방길이었다는 보성강 길. 이후 강변도로가 포장되고 넓혀지면서 아쉽게도 오래 된 벚나무들이 베이고 지금은 젊은 벚나무들이 살고 있다. 그래서 종종 살아남은고목나무를 발견하게 되면 벚꽃 잎의 아름다움이 고색창연하게 느껴지기도.

시골 외사촌같이 풋풋하고 정감 가는 보성강
 시골 외사촌같이 풋풋하고 정감 가는 보성강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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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축제로 유명해진 섬진강이 개천에서 출세한 형이라면, 보성강은 묵묵히 시골집을 지키며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는 외갓집 사촌 같은 강이다. 축제는 단지 인간들의 것일 뿐이라는 듯 푸르른 보성강가의 벚꽃들은 녹색의 강물과 함께 한결 여유롭고 한갓져서 좋다. 갈대나 수초, 버드나무 등이 어울려 살고 있는 보성강은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라는 노랫말이 떠오르는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강변 밭에서 일하던 늙은 농부, 농모님이 벚나무 그늘 아래서 쉬고 있다. 그런데 도로에 차가 휙하고 지나가자 벚나무에서 떨어진 하얀 꽃잎들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머리에 내려앉는다. 햇살에 비춰 반짝거리는 것이 농부의 흰머리일까 벚꽃 잎일까. 여행자는 한없이 낭만적인 감흥에 취하다가도 벚꽃 잎을 털어낸 할아버지의 흰머리를 보곤 이내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수심이 얕은 강물에 들어가 서서 낚시를 하는 아저씨, 강변의 풀밭 위에 넓게 앉아 가져온 음식들을 나눠먹는 식구들, 원두막 같은 강변 정자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떠들썩한 웃음소리까지. 이런 정다운 풍경들을 가까이에서 보며 보성강변 길을 달리다보니 퍼뜩 모두들 인근 동네 주민일 것 같다는 직감이 든다. '외지인 관광객들은 모두 하동 섬진강 벚꽃 길로 모여들고, 주민들은 이곳 보성강변으로 놀러오는구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강가에 소풍 나온 가족들에게 다가가 석곡면 가는 길을 물어봤더니 아직 30리 나 남았다며 "이짝으로 곧장 가부러"라고 하신다.

강을 닮은 장터, 석곡면 오일장

석곡면은 동네 전체가 시골 오일장터처럼 소박하고 정겹다.
 석곡면은 동네 전체가 시골 오일장터처럼 소박하고 정겹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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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석곡면에 들어서니 꽃잎 만발한 벚꽃나무가 둘러싸고 있는 석곡초등학교가 여행자를 반겨준다. 깔끔한 현대식 건물의 이 학교는 석곡면 동네에서 제일 신식 건물인 것 같다. 어떻게 알게 됐냐고? 건너편에 있는 석곡 연탄직매소 덕분이었다. 안에는 오랜만에 보는 새까만 연탄들이 줄지어 모여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 앞에 탈탈 거리는 경운기, 짐 싣기 좋은 자전거를 탄 주민들이 강물 흐르듯 지나간다.

하동 섬진강에 화개장터가 있다면 보성강에는 석곡 오일장이 있다. 매 5일과 10일 날 열린다는 장은 가뜩이나 작은 마을을 들썩이게 하고 있다. 미니버스가 오가는 버스터미널은 오일장에 찾아온 인근 동네 할머니들로 북적북적하다. 석곡면은 한때 남도의 장사치들이 모여드는 오일장으로 유명했다. 나와 냉커피를 함께 마시던 한 할아버지는 "옛날에는 장사치들이 한 달 동안 들어와 장사를 해 1년 치를 벌었다"고 설명해주신다. 석곡장은 순천에서 넘어오는 길목에 있는데다가 곡성에 있는 오일장이 군 북부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단다.

석곡면 주민들이 살고 있는 동네 어느 골목길이 어릴적 외갓집 가던 길 같다.
 석곡면 주민들이 살고 있는 동네 어느 골목길이 어릴적 외갓집 가던 길 같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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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뚜껑없는 철책 안 닭과 오리들. 진한 갈색 피부에 한 눈에 봐도 실하게 생긴 녀석들을 파는 아주머니는 한 할머니가 뭐라 얘기를 하자 그 자리에서 닭 한 마리를 골라 칼로 능숙하게 잡는다. 내심 충격적이었지만, 곁에 앉아있는 어르신들이 흐뭇한(?) 표정으로 구경을 하니, 나도 짐짓 무심한 척 했다.

힐끗 눈길만 가도 바로 상인들의 호객용 멘트가 날라오는 다른 오일장과 달리 좀처럼 상인티가 안나는 아주머니 혹은 할머니들이 가만히 앉아 손님의 눈길을 쫓기만 하는 석곡장은 풋풋한 보성강의 분위기와 참 닮았다. '시민전자' '지니 양품점' '제일 이발관' 처럼 정겨운 가게가 있는 석곡면은 숨은 보석 같은 곳이다. 섬진강아 고맙다, 보성강을 알게 해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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