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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의 애환을 그린 영화<비단구두>의 한 장면
 이산가족의 애환을 그린 영화<비단구두>의 한 장면
ⓒ 오리 영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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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여인(北韓女人)아 내가 콜레라로
그대의 살 속에 들어가
그대와 함께 죽어서
무덤 하나로 우리나라의 흙을 이루리라.
- 고은  <휴전선 그 언저리에서>

그가, 가시 철책(38선)에 온 몸을 걸레처럼 구겨 넣고서, 저 편의 민가와 저 편 사람들의 움직임을 퇴화된 짐승의 눈빛으로 응시한다. 하늘의 나는 새들은 저리도 자유롭건만 가시 철책이 가로 막혀 고향에 가본 지 까마득한 세월이다.

그의 아들이 된 도리로 치매에 걸려 고향 가겠다고 집을 나간 그를 찾아 나서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일이 수십 번에 이르자, 비록 사채업자(조폭)이지만,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효성심을 가진 아들은, 죽어가는 그의 평생소원을 이루어 주고 싶은 용심이 솟구친다.

때마침 자신의 돈을 빌려 쓴 채무자이자 영화감독 만수를 떠올리며 그에게 세트를 지어서라도, 아버지가 죽기 전에 가고 싶은 고향(가상의 공간)으로 모시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감독 만수는, 이런 그에게 살아생전 그토록 그리워했던 연인과 재회케 하여, 행복한 황혼의 새벽을 선물한다.

이 이야기는 여균동 감독의 영화 <비단 구두>의 대략 줄거리다. 영화를 보면서 왜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런 효도 한번 못해드렸을까 하는 자책감이 들기까지 했다. 난 사실 정치 따위는 관심도 없지만, 우리나라 통일에 대한 얘기에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이 된다.

사진의 왼쪽 손지갑 든 인물이 나의 어머니이시다
 사진의 왼쪽 손지갑 든 인물이 나의 어머니이시다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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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나의 아버지의 고향은 함경북도 무산군 연지면 사지리 155번지이고, 어머니의 고향은 함경북도 청진시 신암동 16번지이다. 그래서 더욱 공감을 많이 했던 영화 <비단 구두>는, 우리 가족 이야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삶이 소설 12권이다. 내가 소설을 쓸 줄 알았다면 <토지> 쓴 선생만큼 유명해졌을 것이다."

박경리 소설가와 태어난 해가 같은 어머니, 소설가가 되셨다면 이산애수 물씬한 대하장편소설을 남기셨으리라. 나의 아버지는 고향 소식이 너무 그리운 나머지 이북방송을 듣다가 간첩으로 몰려 경찰서에 끌려간 적도 있었다. 그렇다. 부모형제 일가친척을 북에 두고 온 그분들은(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앉으나 서나 고향 생각에 오매불망 통일만을 노래를 부르다가 끝내 두 눈을 감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이산가족의 애환을 그린 영화<길소뜸>의 장면
 이산가족의 애환을 그린 영화<길소뜸>의 장면
ⓒ 화천영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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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알다시피 그동안 이산가족 찾기로 눈물을 말릴 대로 말렸으나, 가족 상봉을 하지 못한 실향민이 더 많다. <비단구두>처럼 가상 통일이라도 만들어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은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실향민 3세대들이 되어 살아본다면, 통일이라는 말만 들어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6·25 전쟁 얘기를 듣고 자랐으니 말이다.) 어릴 적 나는 즐거운 설날, 추석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돌아오는 명절 때마다 집안은 초상집 같았다. 그런 유년 시절이 나를 문학인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같은 이산드라마는, 도처 널려 있는 실향민 이야기의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이 장벽을 무너뜨려 주십시오. 하늘이여ㅡ
그리운 이의 모습 그리운 사람의 손길을 막고 있는
이 저주받은 장벽을 무너뜨려 주십시오.
- 조지훈의 <첫 기도> 일부

지난해 12월 17일 김정일 위원장이 죽었다. 그리고 12월 28일 김정일 위원장이 아버지 김일성 주석이 안장된 평양의 진산, 금수산 모란봉 기슭에 안장되었다. 김정일의 죽음은 이 땅에 전쟁이 다시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하는 두려움을 가져오기도 했으나, "김일성도 죽고 김정일도 죽었으니 곧 통일이 되겠다"는 생각을 초등학교 학생처럼 했다.

지금도 초등학교에 반공시간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1960년대 한가운데 국민학생들의 '반공시간'에는 반공 방첩에 대한 글짓기, 포스터, 표어를 많이 그렸다. "때려잡자 공산당" "때려잡자 김일성 물리치자 공산당" "승공만이 살길이다 북진 통일 이룩하자" "어둠 속에 떨지 말고 자수하여 광명 찾자" "우리 모두 계승하자 이승복의 반공정신" 같은 표어 등이 있었다.

이렇게 뿌리 깊고 투철한 반공사상을 가지고 살아온 남한사람으로서, 지난해 12월 28일 평양 금수산 기념 궁전에서 생중계되는 김정일 위원장의 장례식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 저희 참가자들은 오늘의 슬픔을 힘과 용기로 받고, 우리의 운명이자 미래이신 위대한 김정은 동지와 일심 단결하여, 경애하는 장군님의 한 생의 염원을 기어이 성취하고 말 굳은 맹세를 가졌습니다. 국가와 인민장병들과 인민들은 우리 당과 군대의 인민의 탁월한 영도자이신 김정은 동지의 위대한 뜻을 충직하게 받들어 주체 혁명의 위대한 새 승리를 향하여 더욱 억세게 투쟁해 나갈 것입니다. (2011년 12월 28일 평양 금수산 기념 궁전 중계 내용 일부)

알려진 바로는 김일성 시신 영구 보존에 들어간 비용이 약 100만 달러(약 11억 원), 매년 시신관리에 들어가는 비용만도 80만 달러(약 9억 원). 일주일에 두 번씩 방부제를 바르고, 2~3년에 한 번 시신을 특수액 수조에 담근다고 한다. 김일성의 시신이 보존되기 시작한 1994년 이후 현재까지 17년 동안 들어간 비용이 무려 1500만 달러(200억 원). 앞으로 1년에 20억 원 이상 김일성·김정일 시신관리에 들어갈 것이다.

유엔보고서에 의하면 북한주민 66%가 끼니를 거른다고 한다. 통일부 관계자 말에 따르면 북한의 4인 가족 한 달 생활비가 10만 원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례식 행렬에 참가한 북한 주민들은 김정일의 죽음에 땅을 치며 통곡을 했다. 그 통곡하는 모습, 억지스럽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편 이해 불가하였다. 그리고 확실하게 내 안에서 뜨겁게 느껴오는 것이 있었다. 그들은 김정일의 죽음으로 흔들리지 않고 더욱 "주체 혁명의 위대한 새 승리를 향하여 더욱 억세게 투쟁해 나갈" 거라는 예감 말이다.

모택동이 그랬던가. 문학은 혁명 사업을 죄는 나사못 이상의 것이나 그 이하의 것이어서도 안 된다고. 문득 금강산에서 만난 북한 안내원의 얘기가 생각난다. 금강산 가는 유람선에서 있는 세미나에 참석한 문인들과 기자 몇몇이 금강산을 구경하면서 만난 북한 안내원 남자. 그는 내 목에 걸린 문패만한 크기의 명찰(직업, 나이, 주소 등이 적힌)을 살피며 다가왔던 것이다.

내 생애 최초로 만난 북한 남자. 그의 첫 말에 나는 너무 놀라 뒤로 기절할 뻔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북한 안내원, 당신은 시인이니 김일성 수령 동지께 바치는 시를 지어 이 자리에서 읊어 보라는 것이었다. 내가 놀란 토끼눈을 하고 대답을 못하자, 그는 정말 시인이 맞냐고 물었다. 내가 고개만 끄덕이자, 그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김일성 수령에 대해 쓴 글은 다 찾아서 읽는다고 했다.

나는 그것이 가능하냐고 하자, 그런 걱정하지 말고 집에 돌아가서 김일성 수령에 대한 시를 써서 발표해 달라고 했다. 나는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 하다가, 내 어머니의 고향이 함경도라고 대답하자, 자신의 할머니의 고향이 부산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하루빨리 적화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배(풍악호)안에서 정신교육(승선 후 받는 안전교육 등)을 충분히 받았기에 함구했다. 기분이 묘했다.

사진의 왼쪽은 H신문의 최재봉 기자와 함께
▲ 금강산 여행 사진의 왼쪽은 H신문의 최재봉 기자와 함께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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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죄는 나사못'과 같은 북한 안내원의 말과는 달리, 그의 외모가 잘생기고 너무 친절해서였다. 11월의 끝이라 산길은 빙판길. 준비성 없이 운동화를 신고 가서 산을 내려오기 힘들어 주르르 미끄러졌다. 그걸 지켜보며 웃음을 날리던 그가 내 손을 잡아주었다. 나는 열여섯살 소녀처럼 가슴이 쿵쿵 뛰었다. '금강산 천하 제일 명산'이라고 적힌 붉은 글발이 렌즈 안에 잘 들어 오는 위치에 날 세워 놓고 같이 간 동료들과 사진도 찍어주었다.

그게 10년 전 일이다. 가끔 북한 남자가 찍어준 사진을 꺼내본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 북한 남자와의 만남을 통해 난 '통일'을 맛보았던 것 같다. 뚫을 수 없는 벽이, 문으로 열리는 그런 느낌말이다. 우리의 통일은 그렇게 벽이 문이 되어 어느날 갑자기 열릴 것이다.

민족의 허리가 잘린 지 60년, 누구는 통일이 되면 남한이 못 살 거라고 하고, 또 누구는 통일이 되면 혼란스러울 거라고 하지만, 대한민국은 반드시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 남한 없는 한반도를 생각할 수 없듯이, 북한이 없는 대한민국은 반쪽이다. 나는 통일이 되어야 비로소 대한민국은 완벽한 국가가 된다고 생각한다.

영화 '길소뜸'의 '이산가족 찾기'의 한 장면
 영화 '길소뜸'의 '이산가족 찾기'의 한 장면
ⓒ 화천영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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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8일 어머니의 고향 청진시 김책제철소를 중심으로 김정은 체제를 비방하는 전단지가 대량으로 발견됐다는 얘기가 중국 내 소식통으로부터 들려온다는 소식도 있었다. 이 전단지에는 '김정은 체제로는 북한의 내일은 없다' 라는 내용이 적혀 있고, 종이의 질 등으로 미뤄 북한 내부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고 전한다.

이제 '철의 장막'의 상징과 같은 '김일성'과 '김정일'이 죽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그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불변한 것이 어디 있으랴. 하늘 없는 땅이 있을 수 없듯이, 땅이 없는 하늘이 있을 수 없듯이, 저 60년 세월 속에서 통일을 부르다가 죽어 간 할머니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으로, 나는 오늘도  통일로 가는 길 위의 나그네처럼 한 발 두 발, 다가가고 있다. 가시철책으로 가로 막힌 어머니의 고향땅, 저 청진항을 향해….

이산가족의 아픔을 다룬 영화<풍산개>의 한 장면
 이산가족의 아픔을 다룬 영화<풍산개>의 한 장면
ⓒ 김기덕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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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벗어 놓은 십구문(十九文) 고무신을 배처럼 끌고 다녔다 댓돌 위에 놓인 십구문 고무신. 왜 그렇게 신고 싶었는지 동구 밖까지 끌고 나가면 너무 커서 엎어지고 자빠지고 종아리 매를 맞아도 타박타박 낙타처럼 끌고 다니던 십 구문의 아버지 검정고무신// 내 작은 칠문반(七文半)의 꼭 맞은 꽃신은 다락방에 꽃씨를 가득 담아 숨겨 두고, 백일홍 피기만 기다렸었지 외할머니가 그랬나 어머니가 그랬나 외할머니 어머니 큰오빠 아버지 십구문 검정고무신에 미어터지게 몸을 집어넣어서 한강을 도강해 올 때 달이 너무 밝아서 큰오빠를 바늘처럼 빠뜨리고 월남(越南)했다고// 누옥의 담장 위에 걸쳐두고 떠난 외할머니 흰 고무신 속에 한강 유람선을 한 채 집어넣고 철철 빗물이 새는 유년의 집 한 채도 태워 둥둥 꽃잎 위에 띄워 보낸다 //꽃씨 가득 뿌린 내 꽃신아, 저 청진항까지 잘 가라, 안녕 !
- 송유미 <잘가라 청진항까지>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2012작가사회(봄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산가족찾기, #금강산 여행, #고향방문, #김일성,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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