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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에 가면 우리의 과거를 만날 수 있다. 허름한 호텔의 낡은 담요, 골목의 아이들, 사람들의 순박한 눈빛, 과일가게의 손때 묻은 저울까지도.
 시와에 가면 우리의 과거를 만날 수 있다. 허름한 호텔의 낡은 담요, 골목의 아이들, 사람들의 순박한 눈빛, 과일가게의 손때 묻은 저울까지도.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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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서 돌아온 우리 가족은 여전히 씻지도 않은 몰골로, 시와에서의 마지막 하루를 느긋하게 즐기기로 했다. '똥파리' 와 '시리아'는 동행이 되어 알렉산드리아로 떠난다고 했다.

시와 마을에 없는 것 세 가지

자전거를 빌리는 게 좋겠다. 시골 마을길을 두 발로 걸어다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되겠지만, 바람을 가르며 달려 작은 목적지에 가 닿는 것도 소소한 재미를 준다. 달리는 길에 마음에 들어오는 풍경이 있다면 페달을 늦춰도 좋고, 눈이 예쁜 꼬마들을 만난다면 자전거를 세워도 좋을 것이다.

자전거를 빌리면서, 우리는 항상 그랬듯이 자물쇠도 달라고 했다. 없단다. 자물쇠 따위는 필요 없다고. 이 마을, 시와에서는 남의 자전거를 탐내는 일 따위는 없다는 거다.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도 딴 마음을 먹는 사람이 없다니, 다 똑같은 마음이라는 게 놀랍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는, 자물쇠를 채우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 놓여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린 나무나 쇠기둥과 자전거가 한 몸이 되도록 자물쇠를 걸어 두곤 했다, 누군가 번쩍 들고 갈까봐 두려워서. 하여 잠깐 화장실을 갈 때에도, 편의점에 들를 때에도 잊지 않고 자전거 자물쇠를 걸어두는 것은 불문율.

자물쇠 번호는 적어도 네 자리 이상은 되고, 열 때에도 누군가 주변에 보는 사람은 없나 의식하게 되는 게 바로 일상화되었다. 자물쇠 잠그고 열고, 그게 귀찮아 가끔은 화장실을 그냥 지나치기도 하고 목마른 것을 참기도 한다.

이로써 시와 마을에 없는 것 하나 추가다. 택시가 없고, 비싸고 고급스러운 호텔이 없고, 자전거 자물쇠가 없다. 대신 동키 택시가 있고 싸고 소박한 호텔이 있고 자유로움이 있다.

이 밤이 지나면 우리는 이곳을 떠날 것이다. 시와는, 사막 같은 내 가슴속에 영원한 오아시스로 남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 밤이 지나면 우리는 이곳을 떠날 것이다. 시와는, 사막 같은 내 가슴속에 영원한 오아시스로 남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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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는 일이 훨씬 자유롭고 홀가분했다.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망자의 산에 이르렀고, 식사 때가 되면 식당에도 들렀다. 자물쇠를 채우거나 여는 번거로움 따위는 잊어버리고, 자전거가 쓰러지면 쓰러지는 대로 자빠지면 자빠지는 대로 두었다. 자전거에서 내리는 순간 까맣게 자전거를 잊을 수 있었다.

우리는 마을을 통과해, 해지는 풍경이 아름답다는 파니스 섬으로 달렸다. 만나는 꼬마들이 먼저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넨다.

"알루~!"

천진한 아이들의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는 경쾌하게 바람을 타고 울려 퍼진다. 어쩌면 다들 그렇게 예쁘게들 인사를 해대는지. 다른 여행지의 가난한 아이들처럼 돈을 달라고 구걸을 하지도 않고, 쭈뼛거리는 경계심도 없다.

당나귀를 모는 어린 꼬마들은 마치 강아지를 다루듯 능숙하다. 당나귀 엉덩이 뒤에 달린 달구지 모서리를 작은 방망이로 때려가며 당나귀를 몬다. 당나귀는 결코 이 작고 어린 주인을 업신여기는 법 없이 잘도 달린다.

호수에 둘러싸인 파니스 섬에는 여행자들이 조용히 일몰을 기다리고 있었다. 호숫가에는 야자 나무가 척척 늘어져있고, 픽픽 쉽게 쓰러지던 사막에서의 그 의자도 있었다. 호수는 거울처럼 고요했고, 주름처럼 밀린 호수 바닥이 얕게 드러났다.

호수 건너편은 시시각각 물들기 시작했다. 저편 하늘이 연한 주황빛으로 번지기 시작하더니, 한순간에 뚝 떨어진 해는 짙은 귤빛 하늘을 선사했다.

사막의 '웬수', 다시 만나다

세상 구석구석에서 소녀들은 아름다움을 꿈꾼다. 헤나는 시와의 전통이다.
 세상 구석구석에서 소녀들은 아름다움을 꿈꾼다. 헤나는 시와의 전통이다.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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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어둑해지는 길을 다시 달려 마을로 돌아와 자전거를 반납했다. 우리는 샤크슈카를 먹기 위해 식당으로 들어갔다. 문짝도 없는 식당, 먹는 사람이나 지나가는 사람이나 경계가 없는 식당, 시와에서 가장 맛있는 이곳에서 우리는 마지막 샤크슈카를 엄숙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아 글쎄 똥파리와 시리아가 들어서는 게 아닌가!

아침 10시 차로 떠난다고 가방 메고 터미널로 가는 것까지 보았는데 이게 웬일일까. 똥파리와 시리아는 사막에서만 하룻밤을 보내고 시와를 그냥 떠난다는 것이 아쉬워, 터미널에서 마음을 돌리고 발길을 돌렸단다. 나는 잘했다고 손뼉을 쳤다! 어, 이게 아닌데.

바로 오늘 새벽까지만 해도, 저 얌통머리 없는 똥파리 때문에 내가 얼마나 끌탕을 했었던가를 벌써 잊은 건가. 그 춥고 어두운 사막의 밤, 남들 다 힘겹게 땔감을 안고 오는데 저 혼자만 내내 곯아떨어진 척, 얌체같이 온기를 누리던 그 웬수가 시와에 더 머무른다는데 왜 환영박수가 튀어나오느냔 말이다, 속도 없이. 그 웬수가 이 아름다운 곳을 더는 느끼지 못하고 가는 걸 고소해 해야 마땅하지 왜 안타까워하느냔 말이다.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가르며 달려가는 길. 자전거 타기는 여행지의 냄새를 명징하게 새기는 일.
▲ 파니스 섬 가는 길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가르며 달려가는 길. 자전거 타기는 여행지의 냄새를 명징하게 새기는 일.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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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는 그런 곳이다. 이렇게 멋진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그냥 떠나는 게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똥파리가 지난밤 웬수였다는 것까지도 까맣게 잊게 만드는. 그런 똥파리가 다시 짐을 푼다고 하자, 잘했군 잘했어, 밸도 없이 쌍수 들고 환영하게 되는.

식당을 나와 우리는 터미널로 향했다, 내일 카이로행 표를 예매하기 위해. 여행도 이제 막바지, 카이로에서 이틀 밤만 자면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동키 택시들이 오글오글 모여 있는 곳을 빠져나가려는데 우리 곁으로 다가서는 이집션이 있다. 그를 보자마자 섬광처럼 스치는 게 있다.

마지막 샤크슈카를 자~알 먹고, 돈을 내지 않은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너무 당황스럽고 부끄러움에 얼른 돈을 건넨 나는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데 그는 괜찮다고 웃으며 돈을 받아 가지고 돌아간다. 소리 지르며 창피를 주지도 않고, 우리가 저를 알아볼 때까지 말없이 한참을 뒤따라 온 것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 날 이때까지 식당에서 밥 먹고 돈 내는 걸 잊어버리기는 처음이다. 그 식당이 특이하게도, 문짝이 없어 식당과 거리의 경계가 아무리 애매하다고는 해도, 계산대가 식당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해도, 혹 똥파리를 다시 만나 잠시 잠깐 혼이 나갔다고 해도, 얼른 가서 버스표를 예매해야 한다는 마음이 아무리 앞질러나갔다 하더라도, 우리 셋 모두 밥 먹고 그림자처럼 일어나 식당을 스르륵 빠져 나왔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내 마음의 고향, 시와

해가 뚝 떨어지면 하늘과 호수가 귤빛으로 물든다.
▲ 호수의 낙조 해가 뚝 떨어지면 하늘과 호수가 귤빛으로 물든다.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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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매를 하고 호텔로 돌아와 방에 들어오니 천정에 까맣게 파리가 매달려 있다. 발코니 문을 열어 두고 나간 탓이다. 하나 둘 셋… 50마리는 족히 되어 보인다. 불을 끄고 밖으로 나가도록 유도해 보지만, 파리는 꼼짝을 않고 붙어 있다. 밤이 깃든 시와 마을 곳곳에 불빛이 켜지고, 샤리에도 조명등이 환하다. 당나귀는 고개를 떨군 채 하루의 피로를 풀고 있다. 내려다보이는 시와의 풍경이 따뜻하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너무 아쉽다. 가만히 돌이켜본다. 사막에서의 하룻밤, 마을에서의 머무름, 시와에서 만난 사람들. 참 편안하고 소박한 곳. 밥값을 내는 걸 잊어버릴 정도로, 모든 긴장을 놓아버리고 풀어질 정도로 따뜻한 곳인가 보다.

시와에 온 첫날 저녁, 거리에서 잠깐 만났던 한국인 여행자가 떠올랐다. 그녀는, 예정대로 카이로로 갔다가 예정과 달리 다시 시와로 올 거라고 했다. 이곳에서 친구를 사귀었는데, 한국으로 돌아가면 한참을 볼 수 없을 테니, 다시 시와로 와서 친구와 시간을 좀 더 보낸 후에 여행을 마칠 거라고 했었다. 나는 그 한마디에 시와가 어떤 곳인지 단박에 눈치 챌 수 있었다.

야자 나무의 그림자가 길어질 무렵 숨죽이고 일몰을 기다린다. 왜 사람들은 뜨는 해를 보면 입을 벌리고 지는 해를 보면 입을 다물까.
 야자 나무의 그림자가 길어질 무렵 숨죽이고 일몰을 기다린다. 왜 사람들은 뜨는 해를 보면 입을 벌리고 지는 해를 보면 입을 다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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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는 그런 곳이다. 자전거 키가 필요 없는 마을, 아무리 미운 똥파리라도 이곳만은 그냥 지나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 그런 마을, 여행자의 발길을 돌려놓는 곳, 9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단숨에 달려갔다 다시 돌아오게 만드는 곳, 밥값을 내지 않고도 까맣게 모르고 활개치고 다니도록 푸근한 곳.
   
어쩌면 우리는 이곳에 오기 위해 먼 곳을 돌고 돌아 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멀고도 먼 사막의 마을에 들어오기 위해 그 많은 길들을 헤매고 다녔는지도 모르겠다. 여기 이 순박하고 눈이 맑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무수한 사람들을 만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곳에 와서 너무 다행이다. 이 사람들을 만나서 너무 행운이다. 마침내 작은 고향 하나 내 마음속에 깃들게 되어 너무 행복하다. 시와는 그렇게, 사막 같은 내 가슴속에 영원한 오아시스로 남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덧붙이는 글 | 2011년 1월 2주 동안 이집트를 여행했습니다.



태그:#시와 오아시스, #파니스 섬, #시와 호수, #헤나, #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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