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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대보름을 앞두고 달집태우기 행사를 위해 세워둔 달집에 사람들이 절을 하고 있다.
▲ 보탑사 3층 목탑 정월 대보름을 앞두고 달집태우기 행사를 위해 세워둔 달집에 사람들이 절을 하고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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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뢰산 정상을 밟는 등산객은 오를 때나 내려올 때 중 한번은 반드시 백비(白碑, 흰 비석)와 만나게 된다. 등산로가 보탑사 백비 옆에서 시작되는 까닭이다. 이 백비의 공식 이름은 '진천 연곡리 석비'로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국가 지정 보물이다. 돌 자체도 흰빛이지만 그보다도 비석에 아무 글씨도 새겨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白碑'라는 남다른 이름을 얻게 되었다. 높이는 3.6m.

비각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은 백비를 '거북받침(龜趺) 위에 비몸(碑身)을 세우고 비머리(螭首)를 얹은 일반형 석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곳 보탑사의 백비를 자세히 보자.

"거북 모양 받침돌의 머리 형태, 비의 규모에 비해 얇은 몸, 옆으로 긴 비머리의 형태 등 고려 초기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은 얼굴면이 손상되어 말머리같이 되었으며, 앞발톱이 파손되어 있다. 등무늬(龜甲紋)는 정교하게 조각되어 단아한 느낌이 들고, 비몸을 받치는 받침 부분의 연꽃무늬는 잎이 작으면서도 양감이 있어 아름다운 느낌이 든다. 비머리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려고 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조각하였다." 

백비, 국가지정 보물이지만 3층 목탑에 밀려 홀대

하지만 국가 지정 '보물'인 백비도 보탑사의 대표로 존경받지는 못하고 있다. 1996년에 건립된 거대한 3층 목탑에게 왕좌를 빼앗긴 탓이다. 아무리 뛰어난 예술성과 역사성을 지녀도 태어난 지 최소 100년은 넘어야 비로소 국보나 보물로 지정받을 수 있으니, 아직 30년도 채 안 된 보탑사 3층 목탑이 공식적으로는 결코 백비를 누를 수 없는 법이지만 그래도 민중은 탑 아래로 몰려들어 줄곧 기도를 올리면서 아예 백비는 잊은 양 홀대하고 있다.  

글씨가 없는 흰 비석이다. 마침 동짓날 보탑사를 방문한 덕분에 백비 앞에 사람들이 팔죽을 놓아둔 모습을 볼 수 있었다(오른쪽 사진)
▲ 백비 글씨가 없는 흰 비석이다. 마침 동짓날 보탑사를 방문한 덕분에 백비 앞에 사람들이 팔죽을 놓아둔 모습을 볼 수 있었다(오른쪽 사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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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보탑사(寶塔寺)는 그 이름만 듣고도 절 경내에서 탑이 차지하는 비중이 유난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사찰이다. '보물寶'와 '탑塔'을 묶어 사찰의 이름을 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과연 보탑사의 탑은 어떤 존재인가?

'나라 최고의 목수'로 일컬어지는 신영훈 선생이 3년여에 걸쳐 만들어낸 보탑사 3층 목탑은 아파트 14층에 해당하는 무려 52.7m에 이르는 높이를 뽐낸다. 목탑 자체가 42.7m이고, 상륜부만도 약 10m나 된다. 탑 안에서 3층까지 오르내릴 수 있는 우리나라 유일의 목탑으로, 단 하나의 못도 박지 않고 지었다.

보탑사 3층 목탑은 그 자체가 법당이자 거대 감실

3층으로 이루어진 지붕은 연꽃의 꽃술을 상징한다. 연꽃 아래를 걸어 탑 안으로 들어가 본다. 본래는 동서남북 모두에 출입문이 있지만 세 개의 문은 폐쇄 상태이고, 백비를 바라보는 방향의 문으로만 드나들 수 있다. 문을 사방으로 낸 것은 탑의 1층이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심주(心柱)를 중심으로 동쪽에 약사여래, 서쪽에 아미타불, 남쪽에 석가여래, 북쪽에 비로자나불의 사방불(四方佛) 금당(金堂)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999개나 되는 원탑(願塔)을 백자로 만들어 사방 가득 진열해 두었다. 1층은 부처를 모신 감실(龕室)이자 그 자체로 법당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가장 큰 목탑으로, 유일하게 탑 안에서 3층까지 오르내릴 수 있다.
▲ 보탑사 3층 목탑 우리나라에 있는 가장 큰 목탑으로, 유일하게 탑 안에서 3층까지 오르내릴 수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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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탑사 목탑의 1층이 그렇게 꾸며진 것은 탑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해가 된다. 인도 사람들이 '무덤'을 가리킬 때 쓰는 스투파(stupa)라는 말이 불교의 전파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오면서 탑파(塔婆)가 되었다가 다시 탑(塔)으로 줄어들었다. 이는,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의 유해를 화장하여 사리를 여덟 나라에 나누어주었을 때 그 사리를 모시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탑의 시초라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그 이후, 불교가 점점 널리 전파되자 탑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진다. 이제 그 많은 탑에 한결같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실 수는 없게 된 것이다. 이윽고 사람들은 탑의 벽면에 작은 방을 만들어 거기에 진신사리 대신에 불상 등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다. 그 방을 감실(龕室)이라 한다.

불교에서 가장 먼저 생긴 예배시설은 탑

그러므로 탑은 불상과, 법당보다 먼저 생긴 불교의 예배장소이다. 불상은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지 약 500년 이후인 1세기 무렵에 처음 만들어진다. 당연히 초기의 불상은 대체로 석가모니불이었다. 불교의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 오랜 세월에 걸쳐 수행을 거듭한 보살이 모든 중생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아미타불,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약사불, 끝내 구원받지 못한 중생들을 56억 7천만 년 뒤에 구제해줄 미륵불 등은 석가모니불보다 뒤에 만들어졌다.

맨 오른쪽의 건물이 천왕문이다. 뒤로 목탑과 만뢰산이 보인다.
▲ 보탑사 전경 맨 오른쪽의 건물이 천왕문이다. 뒤로 목탑과 만뢰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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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처음에는 탑을 하나만 세웠다. 예배를 드리는 대상이므로 하나의 탑만 있어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황룡사 9층 목탑과 보탑사 3층 목탑, 모전석탑인 분황사탑과 의성탑리 5층 석탑이 하나로 지어진 것도 그 결과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탑 하나를 먼저 세운 이후, 불상을 모시는 법당을 그 뒤편에 지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통일신라로 접어들면서 쌍탑이 지어지기 시작한다. 삼국시대만 해도 절은 주로 넓은 평지에 건축되었는데, 삼한일통 이후 엄청난 절이 지어지면서 골짜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법당의 크기는 예전보다 작아졌고, 탑도 작아졌다. 그 대신 탑을 둘 세웠다.

탑은 본래 하나, 통일신라 이후 쌍탑 건축

최초의 쌍탑은 문무왕이 왜를 막기 위해 짓기 시작하여 신문왕 2년(682)에 완성된 경주 감은사 탑이다. (<삼국유사> : 文武王欲鎭倭兵 故始創此寺 未畢而崩 爲海龍 其子神文立 開耀二年畢) 감은사지 쌍탑은 법당터의 앞에 동서로 나란히 서 있다. 그리고 가장 유명한 쌍탑은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쌍탑으로 알려진다.
▲ 감은사지 동서쌍탑 우리나라 최초의 쌍탑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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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볼 때 보탑사는 특이한 사찰이다. 3층 목탑의 1층 내부 전체가 거대한 감실 기능하는 점도 그렇지만, 그 안에 사방으로 불상을 모셔 탑 자체를 법당으로 쓰고 있으니 말이다. 먼저 탑을 세워 예배를 드리고, 뒷날 불상을 모시는 법당을 또 지어 종교의식을 행하는 것이 불교의 역사인데, 보탑사는 처음부터 거대한 탑을 지어 그것을 고스란히 법당으로 썼으니 정말 '생활의 지혜'를 뽐내었다고 할 만하다.

탑의 2층은 법보전(法寶殿)이다. 팔만대장경을 모신 윤장대(輪藏臺)를 중심으로 사면의 벽에 법화경을 모셔 두었다. 그리고 3층은 미륵전(彌勒殿)이다. 석가모니께서 열반에 드신 이후 새로운 시대를 열 미래불(未來佛)을 모시고 있다.

탑 안에서 3층까지 오르내릴 수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목탑

보탑사 3층 목탑은 우리나라 현존의 최대 목탑이고, 안에서 3층까지 오르내릴 수 있는 유일한 탑이라는 특징도 있지만, 가장 두드러진 의의는 신라 황룡사의 9층 목탑을 본떠서 건축되었다는 데 있다. 둘 다 목탑이고, 둘 다 안에서 오르내릴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황룡사 9층 탑을 지어 '삼한일통'을 이룩한 것처럼(<삼국유사> : 樹塔之後 天地開泰 三韓爲一 豈非塔之靈蔭乎) 보탑사 3층 목탑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의 '남북통일'을 염원하여 세워졌다.

그래서 천왕문 옆의 '보련산 보탑사'라는 안내판은 3층 목탑을 두고 '한반도 통일을 기원하는 통일 대탑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고 자평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황룡사 9층 목탑에 관한 내용을 간추려 가며 읽어본다.

황룡사터(왼쪽 사진)의 유물들. 오른쪽 사진은 황룡사 9층목탑의 실제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유적으로, 경주 남산 동쪽 기슭의 커다란 바위에 새겨져 있는 탑의 그림이다.
▲ 황룡사 황룡사터(왼쪽 사진)의 유물들. 오른쪽 사진은 황룡사 9층목탑의 실제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유적으로, 경주 남산 동쪽 기슭의 커다란 바위에 새겨져 있는 탑의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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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7대 선덕왕 5년(636), 당나라에 유학 중이던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대화지(大和池)라는 못 옆을 지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신인(神人)이 못에서 나오더니 물었다.
"당나라에는 왜 오셨소?"

자장이 대답했다.
"보리(菩提, 깨달음)를 구하기 위해 왔습니다."

신인은 자장에게 절을 하고 나서 또 물었다.
"그대의 나라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소?"

"우리나라는 북쪽에 말갈(靺鞨), 남쪽에 왜국(倭國)과 이어져 있는데다, 고구려와 백제가 번갈아 쳐들어오는 등 이웃 나라들의 횡포 때문에 백성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신인이 말했다.
"그대의 나라는 여자가 왕이기 때문에 덕은 있어도 위엄이 없소. 그 때문에 이웃 나라들이 자꾸 침략하는 것이오. 그대는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시오."

자장이 물었다.
"고향에 돌아가면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신인이 말했다.
"황룡사(皇龍寺) 호법룡(護法龍)은 나의 큰아들이오. 범왕(梵王)의 명령을 받아 그 절에 머물고 있으니, 절에 구층탑(九層塔)을 세우시오. 그러면 이웃 나라들이 항복할 것이며, (중략) 왕업(王業)이 길이 편안할 것이오. (중략)"

황룡사는 분황사 앞에 있었다.
▲ 황룡사지(경주)에 노을이 지고 있다. 황룡사는 분황사 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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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법사가 (중략) 신라로 돌아와 임금에게 탑을 세워야 한다고 아뢰자 선덕왕은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였다. 신하들은, "백제에서 공장이를 청하여 데려와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보물과 비단을 주고 백제의 아비지(阿非知)라는 공장이를 데려왔다. (중략) 절의 기둥을 처음 세우던 날 밤, 아비지는 (자신의 조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꿈을 꾸었다. 아비지는 마음에 의심이 나 일을 멈추었다. 그런데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고 캄캄해지면서 노승(老僧)과 장사(壯士)가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기둥을 세우고는 사라졌다. 이 광경을 본 아비지는 일을 중단한 것을 뉘우치고 마침내 탑을 완성시켰다.

일연은 황룡사 9층 탑에 대한 기술 뒤에 '탑을 세운 뒤 삼한(三韓)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樹塔之後 天地開泰 三韓爲一 豈非塔之靈蔭乎)'라고 자신의 생각을 적어두었다. 이는 뒤집어 생각할 때 신라인들이 삼한일통을 염원하여 황룡사 9층 탑을 세웠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치 현대인들이 남북통일을 기원하여 보탑사 3층 목탑을 건립한 것처럼.

만뢰산 정상에 올랐다가 하산할 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 보탑사 뒤태 만뢰산 정상에 올랐다가 하산할 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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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탑사가 있는 마을의 이름은 연곡리(蓮谷里)이다. 한자의 뜻만으로 읽으면 '연(蓮)꽃'이 많이 피어나는 '골짜기(谷)' 정도로 해석되는 마을 이름이다. 하지만 연곡리라는 동명은 실제로 연꽃이 만발한대서 붙여진 이름은 아니다. 천왕문 왼쪽에 세워져 있는 안내 비각은 마을에 그런 이름이 붙은 까닭을 "도덕봉, 약수봉, 옥녀봉 등 아홉 개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마치 한 송이 연꽃이 피어난 모습처럼 아름다워 예로부터 연곡리라 하였다"고 설명한다.

보탑사는 삼국 시대부터 이곳에 있었던 신라 고찰일까. 안내판은 말한다.

'곡리 절터는 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에 이르는 큰 절터로만 전해 왔는데, 그 중심에 보탑사가 삼국시대 목탑 건축의 전통을 잇는 3층 목탑을 세움으로써 새롭게 되살아났다.'

신라 때에도 사찰이 있었던 보탑사 자리

그런가 하면, 진천군 홈페이지는 '옛날 신라 시대 절이 있었는데 극락세계를 연화세계라 하므로 이곳을 연곡리라 부른다'고 소개한다. (이는, 보탑사 목탑의 지붕이 왜 연꽃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설명이다.) 또 보탑사 홈페이지는 '분명한 고증자료는 없지만, 옛 절터였음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보탑사를 짓기 전에 시행한 지표조사 때 많은 와당(瓦當, 기와의 마구리)이 나온 점과 산의 이름이나 지명 등으로 보아 확신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공주 마곡사는 신라 자장스님이 의자왕 때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 마곡사 대적광전 공주 마곡사는 신라 자장스님이 의자왕 때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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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탑사의 안내판과 홈페이지, 진천군의 홈페이지는 모두 신라 때에도 연곡리에 큰 사찰이 있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삼국 시대에도 이곳에 큰 사찰이 있었다는 설명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아득한 구중 산골 아찔한 절벽 위에까지 온통 절을 지은 나라가 신라라는 점을 감안하면, 만노군 관아 근처의 이렇듯 좋은 땅에 부처를 아니 모셨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계룡산 신원사는 의자왕 때에 고구려 보덕화상이 창건했다. 공주 마곡사 역시 의자왕 때에 신라 자장율사가 지었다고 전해진다. 서로가 죽고 죽이는 살벌한 전쟁에 몰두해 있었던 그 당시 상황에서, 적국의 땅에까지 타국의 승려들이 들어가 사찰을 지을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니 어찌 자신을 '불국토'로 자임한 신라가 자신의 땅인 만노군 연곡마을에 신라의 절을 짓지 않았을 것인가.

김유신이 세운 원원사의 터에 남은 두 탑이 솔숲 속에 나란히 서 있다.
▲ 원원사 쌍탑 김유신이 세운 원원사의 터에 남은 두 탑이 솔숲 속에 나란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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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본인도 뒷날 집앞 산기슭에 천관사(天官寺)를 짓고, 경주 남쪽 모화리의 봉서산 중턱에 원원사(遠願寺)를 창건한 사람이다. 자기 재산을 들여 종교시설을 건축하는 사람은 그만큼 신앙심을 마음에 굳게 가지고 있는 독실한 신자이다. 그렇게 보면, 김유신은 어쩌면 이곳 보탑사에서 어릴 때부터 불교 신앙을 배웠을 것도 같다. 아버지 쪽인 수로왕 등 금관가야의 왕족과, 어머니 쪽인 법흥왕, 진흥왕(김유신의 어머니 만명의 큰아버지), 진평왕 등이 하나같이 대단한 불교신자였다는 사실로 미뤄볼 때,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과 어머니 만명이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보탑사에 열심히 드나들었을 것은 충분히 추측 가능한 일 아닌가.

어린 김유신, 부모 손잡고 보탑사에 다녔을 듯

지금의 보탑사 3층 목탑과, 신라 때 이곳에 있었던 절의 탑이 얼마나 닮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김유신이 살던 진평왕 무렵의 연곡리에 절이 있었다면 아마도 목탑이 사찰 경내 한가운데에 세워져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본래 우리나라 탑은 목탑에서 시작하여 전탑을 거쳐 석탑으로 나아가는데, 최초의 전탑인 경주 분황사탑이 건립된 때가 선덕여왕 3년(634)이므로, 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 대에 진천 연곡리에 건립된 불탑은 목탑이었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또 그 탑은 저 혼자 외로이 서 있었을 것이다. 682년(신문왕 2)에 완성된 감은사의 동탑과 서탑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쌍탑이니, 그보다 전인 595년(진평왕 17)에 태령산 아래에서 태어나 대략 610년 무렵까지 진천에 거주한 김유신이 보탑사를 찾았다면, 당연히 그곳에는 사찰 마당의 한복판에 탑이 하나만 우뚝 서 있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어린 김유신이 부모의 손을 잡고 드나들었을 법한 충청북도 진천군 만뢰산의 보탑사, 3층목탑을 자랑하는 고찰 유적지이다. 그곳의 3층 목탑은 남북통일을 기원하여 제작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게다가 안에서 3층까지 오르내릴 수 있는 유일한, 단 하나의 못도 사용하지 않고 건축한 명작 예술품이다. 김유신 생가와 태실을 찾은 답사자라면 절대 잊지 말고 방문해야 할 필수 여행지라는 말이다.

김유신이 세운 원원사(경주). 물론 사진에서 보는 법당 등이 신라 때의 것은 아니다.
▲ 원원사 김유신이 세운 원원사(경주). 물론 사진에서 보는 법당 등이 신라 때의 것은 아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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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보탑사, #만뢰산, #김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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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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