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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뢰산 일대의 겨울 산줄기 풍경. 삼국시대 때 충청북도가 첩첩산중의 국경지대였음을 알게 해준다.
▲ 만뢰산 일대 만뢰산 일대의 겨울 산줄기 풍경. 삼국시대 때 충청북도가 첩첩산중의 국경지대였음을 알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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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뢰산의 한 봉우리인 태령산 아래 '김유신 생가터'에서 그의 아버지 서현 장군이 쌓았다는 만뢰산 정상 '만노산성' 유적까지는 9km가량 된다. 태실에서 출발하면 이 능선은 왼쪽에 연곡지와 만뢰산자연생태공원, 오른쪽에 백곡지를 둔 채 크게 숨가쁘지 않을 만큼 적당히 오르락내리락 이어진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갈미봉을 넘고는 이내 정상으로 치닿는다. 정상에서 줄곧 앞으로 능선을 타면 2.5km 아래에 있는 보탑사 경내로 들어간다.

어린 김유신은 언제쯤 태령산 정상의 자기 태실을 출발하여 만뢰산성까지 걸어 보았을까.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이 쌓은 산성을 지키느라 집에 오지 않는 아버지를 만나러 어린 유신은 가끔 이 산길을 걸었을 것이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 만뢰산 정상에 산성 축성

만뢰산과 김유신 일가의 인연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기록은 <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 조선 성종 때 왕명에 따라 노사신(盧思愼) 등이 편찬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김유신의 부친인 김서현 장군이 돌로 (만뢰산 꼭대기인) 이곳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3980척(1,300m)'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지금도 만뢰산의 정상 일대에서는 신라 때의 토기 조각이 발굴된다. 정상에 오르면 당시의 샘터 흔적도 볼 수 있다. 높이는 해발 약 612m.

왼쪽은 보탑사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정상에서 신선샘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 만뢰산 등산로 왼쪽은 보탑사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정상에서 신선샘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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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의 만뢰산은 맑은 날이면 그 정상에 올라 멀리 서해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삼국시대에 신라의 군사들이 백제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산 정상에 주둔하였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신라군들은 만뢰산성의 북쪽 계곡 아래 서술원에 군영을 설치하였고, 그 오른쪽의 436m 장군봉 일대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으며, 장군봉 북쪽 국경에 또 다른 산성을 구축한 채 백제와 서로 노려보며 마주섰다.

서술원은 지금 서수원으로 이름이 변했다. 산성(城)이 있던 땅[垈]에 형성된 백곡면의 한 마을에는 성대(城垈)라는 동명이 붙었다. 그런가 하면, 만뢰산도 처음의 이름은 아니다. 진천군의 옛날 이름은 만노군이었고,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만노군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를 만노산(萬弩山)이라 불렀다. 그 만노산이 병자호란 이후에는 만뢰산(萬賴山)으로 더 많이 알려지게 된다. 전쟁 때 수 만(萬)의 백성들이 군사들의 활약에 힘입어[賴] 생명을 건졌다고 해서 그렇게 바뀌었다고 전한다.

김유신이 헤엄 치며 놀았을 법한 계곡의 연곡지

생가터에서 출발하여 태령산 태실에 들렀다가, '만노산성'까지 줄곧 걸은 다음, 황룡사 9층목탑 이후 1300년만에 처음으로 사람이 탑신(塔身) 안을 오르내릴 수 있도록 만들어진 보탑사 3층목탑으로 내려오는 데에는 모두 4시간 걸린다. 등산 준비를 갖추지 않은 문화유산 답사자가 간단히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다.

하지만 유신은 한두 번이 아니라, 만노산성에 가야할 일이 있을 때마다 이 능선을 걸어서 갔을 것이다. 혹 태령산에서 만뢰산까지 이어지는 계곡을 따라 말을 타거나 걸었다면, 중간쯤에 있는 연곡못에 이르러서는 헤엄도 쳤을 터이다. 결코 가마를 타는 법은 없었을 게 분명하다. 그렇게 걷고 뛰고 말을 달리는 것은 신라 청소년들의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이었던 성대마을(신라 산성이 있던 곳) 입구에서 바라본 장군봉. 김유신이 군사들을 훈련시킨 곳이라 하여 장군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장군봉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이었던 성대마을(신라 산성이 있던 곳) 입구에서 바라본 장군봉. 김유신이 군사들을 훈련시킨 곳이라 하여 장군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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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생가터에서 보탑사로 들어가는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만뢰산자연생태공원 진입로인 삼거리가 나온다. 연곡지를 왼쪽에 두고 직진하면 생태공원, 좌회전을 하면 보탑사로 간다.
▲ 연곡지 김유신 생가터에서 보탑사로 들어가는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만뢰산자연생태공원 진입로인 삼거리가 나온다. 연곡지를 왼쪽에 두고 직진하면 생태공원, 좌회전을 하면 보탑사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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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건물 안에서 가르치고 배우지 않았다. 이른바 '학교'가 없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에 국립 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세워 유학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장수왕 15년(427)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교육기관인 경당(扃堂)까지 각 지방에 세웠다. 백제도 고구려의 태학 건립을 보고 충격을 받아 이미 근초고왕(346∼375년 재위) 때에 학교를 운영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신라는 두 나라에 비해 300년 이상이나 뒤인 신문왕 2년(68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국학(國學)을 연다. 그만큼 신라는 청소년들을 '자연 속에 풀어놓고' 키웠다.

<삼국사기> 중 진흥왕 37년(576)의 기록을 보자. 화랑들은 '도덕과 의리로 서로를 연마했고(相磨以道義), 노래와 음악을 즐겼으며(相悅以歌樂), 산과 물에서 노닐고 즐겨(遊娛山水) 먼 곳 어디든 가지 아니한 곳이 없었다(無遠不至).' 그래서 김대문의 <화랑세기>는 '어질고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서 선발되었고(賢佐忠臣 從此而秀),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도 여기서 나왔다(良將勇卒 由是而生)'고 하였다. 신라의 청소년들은 함께 노래하고 춤추고, 산과 물에 같이 다니면서 공동체 의식을 키웠고, 그렇게 야외 공동 수련을 거친 끝에 좋은 관리가 되고 뛰어난 장졸이 되었던 것이다.

자연친화적인 신라의 교육, 지금 되새겨 본받아야

따라서 장차 서울(경주)로 가서 화랑이 될 뜻을 품었을 것이 분명한 유신이 집에서 만노산성까지 가마를 타고 다녔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저 걷고, 뛰고, 달렸을 것이다. 산이 나타나면 넘어야 하고, 물을 만나면 건너야 하는 것이 화랑의 '자세'였으므로.

그래서 교육학자들은 자연 속을 함께 뛰놀며 공동체의식을 키우도록 유도한 신라의 교육이 더 강한 나라인 고구려와 백제를 누르고 통일을 이루는 데에 큰 자산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잘못된 입시교육에 매몰되어 한창 풋풋하게 자라야 할 아이들의 인성을 메마르고 살벌하게 만들고 있는 현재의 교육정책은 오히려 신라의 교육정책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라 시대에는 만노산성의 중심부였을 만뢰산 정상이 지금은 헬기장으로 바뀌었다. 사진의 왼쪽 상단부가 우물터이다.
▲ 만뢰산 정상 신라 시대에는 만노산성의 중심부였을 만뢰산 정상이 지금은 헬기장으로 바뀌었다. 사진의 왼쪽 상단부가 우물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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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뢰산 정상은 헬기장으로 변해 있다. 원래 성터이니 뾰족했을 리는 없을 터, 헬기장을 만드느라 힘은 덜 들었을 듯하다. 신라 군사들의 목을 축여주었다는 샘터 유적은 헬기장 중에서 태령산 쪽 끝 부분에 남아 있다. 그러나 물은 없다. 물이 솟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라 군사의 기분도 직접 체험해볼 수 있고, 예까지 올라오느라 심하게 일어난 갈증도 해소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꿩 대신 닭'이라고 했다. 산정의 샘터 유적에는 비록 물이 솟지 않지만, 북쪽으로 100m 정도 가느다란 길을 타고 내려가면 '신선샘'이 나온다. 사람 키의 서너 배쯤 되는 커다란 바위들이 좌우로 서서 서로 머리를 기댄 듯이 버티고 있는 가운데로 투명한 물이 졸졸 흘러나온다.

신선샘 앞에는 '손님'을 위해 긴의자까지 마련되어 있으므로 거기에 앉아 맑은 물로 마른 목을 시원하게 축인 뒤, 다시 정상으로 돌아와 멀리 (신라 군사들의 주둔지였던 서수원 뒤의) 엽돈재 쪽을 응시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정상에서 본 등산로 안내판에 따르면 이곳에서 엽돈재까지 가는 등산로는 7.5km 거리로 이어진다. 그 길의 왼쪽에 유관순 사당(祠堂)과 독립기념관이 있다. 

만뢰산 정상 턱밑에 있는데도 맑은 물이 항상 솟아오른다.
▲ 신선샘 만뢰산 정상 턱밑에 있는데도 맑은 물이 항상 솟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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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뢰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보탑사에 닿는다. 반대로 말하면, 보탑사가 자랑하는 보물 404호 백비(白碑) 왼쪽을 지나 1시간가량 오르면 만뢰산 정상에 도달한다. 오르는 길은 두 갈래이다. 하나는 백비 바로 옆으로 닦여진 넓은 길을 따라 숲속으로 오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왼쪽으로 논길을 타고 더 들어가 계곡과 능선을 타는 것이다. 등산로 안내 이정표는 후자를 가리키며 논둑에 세워져 있다.

이 두 길은 그 정취가 아주 다르다. 만약 보탑사에서 만뢰상 정상을 오간다면, 오를 때는 계곡길, 내려올 때는 숲속길이 좋다. 풀어서 말하자면, 계곡을 잠깐 타다가 그 뒤로는 줄곧 능선을 밟으면서 하늘도 보고 양옆 전망도 즐기는 오름길이 좋다는 말이다. 그리고 전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진 숲길은 앞이 보이지 않으므로 하산길로 선택하여 맑고 시원한 산공기를 가슴 깊숙이 불어넣으면서 자연이 안겨주는 텅 빈 듯한 풍요로움을 한껏 만끽하자는 이야기이다. 이 하산길은 또 보탑사의 아름다운 뒤태를 마음껏 누리게 해주니 당연히 내려오면서 자연스럽게 즐겨야 마땅하다.

만뢰산에서 내려오는 등산로의 중간쯤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하산하면 보탑사로 가는 지름길을 걷게 된다. 이 길은 전나무로 가득한 숲길이다.
▲ 숲길 만뢰산에서 내려오는 등산로의 중간쯤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하산하면 보탑사로 가는 지름길을 걷게 된다. 이 길은 전나무로 가득한 숲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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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덜 알려진 만뢰산, 그러나 답사지로는 썩 괜찮아

김유신 일가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진천 만뢰산, 하지만 아직은 덜 알려진 듯하다. 김유신 생가터, 당시의 우물 연보정, 김유신 태실, 우리나라 최대의 목탑을 자랑하는 보탑사, 정상부의 만뢰산성 유적, 신선샘 등을 거느렸고, 천천히 오르내려도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두 개의 적당한 등산로(보탑사-만뢰산 정상 또는 김유신 생가-태실)까지 보유하고 있는데도  찾는 이는 별로 없어 보였다. 본격적으로 등산을 하기에는 높이가 낮아서일까. 여름에 두 번, 겨울에 세 번 올랐지만 산속에서 만난 사람은 태실 주변에서는 0명, 신선샘 주변에서는 4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만뢰산은 어린 자녀와도 무리없이 오를 수 있는 산이고, 역사유적 답사지로도 충분한 자격을 갖춘 산이다. '이곳이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김유신이 뛰어놀던 곳이야!' 교육적 의미도 뛰어나다. 꽃피는 3월이 오면 꼭 가족여행지로 한번 선택해 보시라.   

만뢰산에서 하산하는 길에 볼 수 있는 보탑사의 뒤태
▲ 뒤에서 보는 보탑사 만뢰산에서 하산하는 길에 볼 수 있는 보탑사의 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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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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