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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에 선 유로.
 기로에 선 유로.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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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세계 경제 위기는 프랑스의 중산층을 서민층으로 이동시키고 서민층을 저소득층으로 하락시키고 있다. 특히 저소득층에게 경제 위기는 갑자기 맞는 따귀처럼 얼얼하면서도 그 아픔의 여파가 오래 간다.

넉넉하지 않은 수입으로 버티기 어려워 방세를 제대로 내지 못하거나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파장을 드나드는 이가 적지 않다(<쓰레기통까지 뒤지고... 이런 분이었어요?> <쓰레기통 뒤지면 벌금 물리겠다고?> 참조). 그런데 방세는 내기 어렵고 파장을 기웃거릴 용기는 없는 이들이 선택하는 제3의 방법이 있다. 빚을 지는 일이다.

이러한 가계 대출을 받는 프랑스인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이자까지 포함해 대출금을 갚는 것이 쉽지 않기에 결국 빚더미에 앉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빚더미에 오르는 프랑스인이 증가하는 추세이다. 2009년 10월 13일자 <르몽드>의 '경제 위기로 빚더미에 앉은 가정 증가' 기사에 의하면, 2009년 1월에서 9월 사이에 프랑스 은행에 새로 제출된 부채 관련 서류가 16만2171건이었다. 이는 이 기간 중 새로 빚을 지게 된 사람이 그만큼 늘었다는 뜻으로, 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17% 증가한 수치이다. 부채가 있는 가정의 평균 빚도 2008년 3만5719유로(약 5715만400원)에서 2009년에는 4만530유로(약 6484만8000원)로 증가하였다.

평범했던 가정이 실업 같은 이유로 빚더미에 오르거나,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대출을 받으면서 빚의 수렁에 빠지기도 한다. 이들 중에는 65세 이상에 해당하는 '시니어' 층이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2008년 3월 가계 신용 대출 현황 조사에 따르면, 시니어 가정 중 21.1%가 가계 대출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다른 연령층은 21.1%에 못 미쳤다.

전통적으로 프랑스는 앵글로색슨 계열을 비롯한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빚을 진 가구가 적은 나라로 꼽혔다. 프랑스 사람 중에는 신용카드 없이 주로 은행 카드나 수표를 이용하며, 은행 잔고 내에서 소비하는 이들이 많다. 이러한 프랑스인들이 경제 위기를 맞은 후 먹고살기 위해 빚을 늘려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프랑스 은행의 2010년 2월 23일자 자료에 의하면 2009년 3/4분기에 프랑스의 가계부채율은 75%였다. 같은 시기에 다른 나라 상황을 살펴보면 미국 157.6%, 영국 146.4%, 스페인 130%, 일본 100%, 독일 90.8%, 이탈리아 59%였다.

길거리의 쓰레기통을 뒤지는 여인.
 길거리의 쓰레기통을 뒤지는 여인.
ⓒ www.estrepublicain.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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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빚 떠안지 않고자 상속 포기하는 자녀들

빚더미에 오른 시니어 층이 세상을 떠나면, 자녀는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다. 그런데 유산에는 자산만이 아니라 채무도 포함된다. 부모가 자산보다 빚을 더 많이 남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부모가 남긴 빚을 갚는 것은 고사하고 자기 앞가림하기도 어려운 자녀들이 허다하다. 이러한 자녀들이 선택하는 방법이 부모의 유산을 포기하는 것이다.

2010년 12월 31일 프랑스 법무부 자료에 의하면, 유산 상속을 포기한 사례가 6년 사이에 5만31건(2004년)에서 6만7249건(2010년)으로 34% 늘었다. 2011년에는 이 수치가 더욱 늘어나 최고 기록을 세울 것으로 법무부는 내다보고 있다.

올해 3월에 발표된 프랑스 은행 자료에 따르면, 55세 이상 인구 중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이가 23%다. 이는 13%이던 2001년에 비해 10%포인트 증가한 수치이다. 2012년에는 이 비율이 32%로 늘어날 전망이다. 크레쥐스(빚을 진 가정을 도와주는 협회)의 장 키엘은 12월 3일자 <르몽드>에 "빚을 진 시니어 중 절반이 주택을 소유하고 있는데, 담보로 잡힌 주택들(의 소유권)이 2013년까지 넘어가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노인은 젊은이보다 병원 신세를 져야 할 일이 많다. 그러나 빚의 수렁에 빠진 저소득층 노인에게 병원 출입은 이제 하나의 사치가 되었다. 프랑스의 사회보장제도가 갈수록 열악해져, 정부 부담에서 개인 부담으로 바뀐 것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초기에 고칠 수 있었던 병을 방치해 중병이 들면 의료 시설을 갖춘 요양원 신세를 져야 하는데, 그 비용도 만만치 않다. 프랑스 전체적으로 보면 1인당 한 달에 약 2500유로(400만 원 정도)가 들고 파리 같은 대도시에서는 더 비싸서, 저소득층은 감당하기 어렵다.

저소득층 노인이 세상을 떠나면 빚만 남는 경우가 적지 않다. 툴루즈의 법원 보조 행정원 포레는 <르몽드>에 이런 노인들이 보통 2만 유로(약 3200만 원)에서 6만 유로(약 9600만 원)의 채무를 남긴다고 말했다. 심한 경우에는 자녀가 30만 유로(약 4억8000만 원)까지 부담해야 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러한 가정의 자녀들이 부모의 채무를 이어받지 않기 위해서는 유산 상속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가족끼리도 금전 얘기는 금기로 간주된다. 그래서 부모가 생전에 재산을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는지 혹은 빚을 어느 정도 지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부모가 사망하고 유산을 상속받으려 할 때가 되어서야 자산 대신에 채무를 물려받아야 하는 상황임을 알게 되는 사례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부모가 겨우 빚을 없애고 세상을 떠난 줄 알았는데, 나중에 채무 관련 서류가 날아오는 일도 있다. 생전에 부모가 시나 정부로부터 받은 노인 주택 보조금 등을 갚으라는 서류다.

법적으로 상속자는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기 위해 필요한 서류를 4개월 내에 제출해야 한다. 그리고 10년 안에 유산을 상속할 것인지 아니면 포기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자녀가 부모의 유산 상속을 포기하면, 징세 당국은 사망한 사람이 생전에 남긴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고인의 남은 재산을 처분한다.


태그:#경제 위기, #상속,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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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자유기고가, 시네아스트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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