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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

나는 농부다.
더 정확히 쓰자면 소 키우는 농부다.
1년 365일 새벽 다섯 시 삼십 분, 어김없이 농장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자식들과 아침을 맞는다.
밤 사이 서로 평안을 묻는 내 자식들은 '소'.
한우가 서른 두, 젖소가 오십 두이다.
종자와 생김은 큰 의미 없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자식 없듯
쓰임은 다를지라도 내겐 모두 일생을 공유하는 소중한 자식들.
1년이면 두 손으로 직접 자식 10여 마리를 받는다.

자식과 관계가 처음부터 수월했던 것은 아니다.
시작은 자식들도, 나도 서툴렀다.

내가 태어난 마을은 강정골.
행정구역상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풍세면 두남리 골짝.
쇠락한 가정 형편 탓에 다니던 대학을 중도 포기한 아버지는 고향에 낙향,
논밭과 농장을 일구며 가족을 건사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부의 아들로 자랐으나
나 스스로 농부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 상상하지는 않았다.

세기말을 통과하던 1999년부터 2002년까지 미국에 머물렀다.
미국에서 선진축산영농법이라도 배웠느냐고.
천만의 말씀.
공부를 한 것은 맞지만 분야는 전혀 달랐다.
아메리카의 번듯한 대학원에서 '정치철학'을 공부했다.

386세대 말석 학번인 90학번으로 대학에 진학한 나.
전공은 법학이라도 관심은 현실정치와 학생운동에 쏠렸다.
학생운동조직에서 활동하며 구 소련과 동구권 붕괴를 목도했다.
정치와 사회의 간극에 골몰하다가 한국의 어느 대학원에 진학해 신학을 공부했다.
신학에서 풀지 못한 답답함을 해소하려 미국 유학을 결행했다.
몸은 미국에 머물렀지만 생활은 한국과 무관치 않았다.
IMF 경제환란으로 환율은 폭등, 현지 생활비와 학비가 널뛰었다.
정치철학 등 인문학 주제는 딴 짓 않고
10년은 집중해야 작은 성과나마 장담할 수 있는 분야.
내 공부 욕심에 고령의 부모에게 더 이상 짐 지울 수 없어 아메리카와 '안녕' 했다.

귀국 후 책 대신 소들과 씨름하며 몇 해동안 목장일에 전념했다.
아침부터 밤 늦도록 농장과 논밭을 오가는 고된 일상을 반복했다.
반복이라는 말은 사실 잘못 된 표현.
일상은 반복됐어도 결은 분명 달랐다.
떼로 보이던 소들이 점차 개체로 보였다.
하나 하나의 특징과 면면들을 알아갔다.
이름도 각자 지어줬다.
그 즈음부터 였을까.
소들도 내 눈길에, 내 손길에, 내 발길에 점차 화답했다.

부모에게 가장 큰 벌은 자식의 죽음.
나 역시 마찬가지다.
농장일을 시작한 이후 딱 한 번 내 손으로 직접 자식같은 소를 묻었다.
내가 묻진 않아도 한 해면 두어 차례 운명처럼 그 벌을 감수해야 한다.
질병이나 다쳐 어쩔 수 없이 농장 소를 도축장에 보내야 할 때 흔히 "소를 뺀다"고 한다.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사람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 자식들이
제 발로 일어서지 못한 채 절뚝거리며 죽음이 똬리를 튼 도축장으로 끌려 가는 광경.
차마 보지 못한다.
'소 빼는 날'은 목장 방향으로 고개도 돌리기 싫다.
목장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조차 고통스럽다.
소 빼기 전날,
여느 날보다 그 소에게 사료를 담뿍 주고,
더 세심히 쓰다듬고 그러며 '작별'을 고한다.
"다음 생에는 더 좋은 곳에서, 더 좋은 관계로 만나자구나"라는 말만 맴돈다.

지난겨울, 그래서 더 우울했다.
전국을 강타한 구제역 여파로 많은 아비들이 많은 자식들을 앞서 보냈다.
아는 농장의 한 가족은 구제역 감염으로 목장이 폐쇄돼
자식같은 가축들을 한날 한시 모두 땅에 묻어야 했다.
그 뒤, 집안 사람 모두 한해 가까이 병원을 오가며 신경치료 받지만
자식 잃은 슬픔에서 헤어날 길은 아직도 가마득하다.

이웃 집 형은 물밀 듯 들어오는 값싼 수입산 고기와
어렌쥐 정부의 살농(殺農)정책에 낙심, 청춘과 맞바꾼 농장을 몇 해 전 접었다.
평생 듣고 산 소 울음 소리가 지척에서 사라지자
형님의 우리 농장 마실 횟수는 표나게 늘었다.
말 하지 않아도 안다.
혈육같은 소 울음 소리가 그리운 형님의 마음.

자식을 먼저 보내는 일만 부모에게 벌은 아니다.
지난여름, 잠시 자식들만 놔두고 서울 길에 올랐다.
한여름 자글거리는 여의도 아스팔트 광장에 전국 낙농가들이 모였다.
대기업 우유업체들에 원유값 현실화를 촉구하는 자리.
요구가 수용되지 않으면
원유를 우유업체에 넘기지 않고 폐기키로 낙농가들이 결의했다.
집유 거부 첫날, 나도 원유 8백리터를 폐기했다.
미안함에 종일 너희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쉽게 원유라 부르지만
따지고보면 너희가 피와 살을 깎아 만든 것인데,
인간과 동물의 협력노동 결과인데,
사람들 간 다툼으로 폐기해 버리는 현실이 못내 부끄럽고 미안했다.

그리고 또 FTA.
어쩌면 우리 앞에는 지금보다 더 큰 이별이 예비되어 있는지 모르겠구나.

   박영기(오른쪽)씨와 그의 자식들.
 박영기(오른쪽)씨와 그의 자식들.
ⓒ 윤평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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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는 농부다.
더 정확히 쓰자면 책 만드는 농부다.
출판사 이름은 '논밭'.
삶터와 일터인 집과 논밭, 목장 등 발 디디는 곳 모두가 사무실인 '1인 출판사'이다.
2008년 2월 설립했다.
지금까지 세상에 내 놓은 자식은 단 한 권.
2010년 2월 논밭출판사라는 이름으로 첫 책을 출간했다.
신학자 로랜드 보어의 2007년 근작 <성서와 대안좌파>를 번역, 출간했다.
저작권 섭외와 원고 번역, 교정, 교열까지 편집을 제외한 다른 작업은 모두 내 몫.
낮에는 풍세면 두남리 논밭에서,
밤에는 1인 출판사 논밭에서 촌음을 아꼈다.
그렇게 만든 첫 책과 만남.
흡사 갓 태어난 송아지를 받는 것과 같은 설렘과 감동이었다.

농사 짓는 일이나
책 짓는 일이나
돈 안 되기는 어쩜 그리 닮았을까.
출간 후 2년여가 흘렀지만 초판본 5백 권 가운데 1백 권은 아직도 집에 모셔져 있다.
4백 권도 제 값에 판 것보다 증정본이 더 많다.
그나마 세상에서 완전히 잊혀진 것은 아니어서
이따금 인터넷 서점을 거쳐 도서 주문이 당도한다.
가까운 읍내 우체국에 나가 도서를 발송할 때면 가을 수확을 맞는 농부의 기분.
농사 짓는 일이나 책 짓는 일이나
아무리 돈 안 될 성 싶어도 묘하게 손 놓기 어렵다.

2011년이 저물기 전 '논밭'의 이름으로 두 번째 책이 나온다.
안토니오 네그리의 <욥의 노동>.
저자는 달라도 두 책은 공통점을 지닌다.
<성서와 대안좌파>가 보수적인 정치, 종교 그룹들의 전유물이 된 성서를
종교좌파와 세속좌파가 연대해 해방적 읽기와 적용을 복원하자고 주장하듯
<욥의 노동> 역시 성서의 해방적 읽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첫 책에 이어 두 번째 책도 왜, 종교 관련 서적일까.
내 자란 배경과 무관치 않다.
고향 강정골은 중학교 2학년때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새벽이면 산 너머 들리는 교회 종소리로 눈을 떴다.
초등학생 때부터 어머니 손에 이끌려 교회를 찾았다.
머리가 여물며 교회 가는 횟순 줄었지만 지금도 종교성은 중시한다.
두 번째 책을 번역하며 네그리의 종교성을 새롭게 이해한 점도 큰 수확.
책에서 네그리는 자신의 종교성이 땅을 근거지로 생명과 교감하는,
농민적 종교성, 농민적 혁명성에 영향 받았음을 고백했다.
내 마음이 꼭 그렇다.

그래도 세 번째 책부터는 다른 영역을 다룰련다.
번역을 위해 찜 해 놓은 서적도 있다.
프랑스 현대철학을 전공한 영미권 학자의 저서.
이번 번역을 핑계삼아 한동안 중단한 '정치철학' 공부도 재개해 볼 요량이다.

한 해 농사를 어찌 벌써 속단할 수 있을까마는
출간 권 수가 늘면 판매 권 수도 증가할까.

1인 출판사 '논밭'을 운영하는 박영기씨.
 1인 출판사 '논밭'을 운영하는 박영기씨.
ⓒ 윤평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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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는 농부다.
흙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농부다.

어느 사람들은 힐난한다.
오로지 인간만의 효용을 위해 동물을 철창에 가두고 사육하는 축산업이,
특히 거대 기업화된 축산농이 얼마나 반생태적인지를 준엄히 꾸짖는다.
구제역, AI 등 최근들어 재앙처럼 빈발하는 가축 전염병은
반생태적인 환경에서 고통받는 동물들의 반격이자 복수라고 일갈한다.

우리 목장 소들은 방목한다.
순환농법, 자연농법을 할지라도 퇴비 조달을 위해
가축을 동반한 농법은 필요하다고 항변하지만
생태주의 근본에 반하는 축산업의 폐해에 나도 일부분 공감한다.

앞으로 가축 수는 줄일 계획이다.
탈농촌을 고려한 조처는 아니다.
나는 지금처럼, 미래에도 농촌에 굳건히 뿌리 내릴 것이다.
도시가 제공하는 편리에 길들여져 이따금 친환경 유기농 식재료나 제품 구매로
위안 삼는 도시민들의 허울에 결단코 합류치 않겠다.

지난여름,
농장 옆에 집터를 새로 닦았다.
흙집 짓는 기술을 익혀 2~3 년안에 내 손으로 직접 집을 지을 작정이다.
몇 년 뒤면 내 나이 50.
집 하나 늘고
또 한 집 늘고
그렇게 천천히, 끈질기게 생태마을을 만드는 것이 후반기 내 삶의 항로다.
당신도 더 이상 도시 삶에 연연하지 말라. 그것이 변화와 개혁, 혁명의 출발이다.

*12월 어느 날 박영기(41)씨와 한 인터뷰를 독백 형식으로 정리했다. 오랜 시간 소중한 이야기 들려주신 영기씨와 선뜻 사진 모델로도 응해 준 그의 가족들에게 감사의 인사 전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무료로 배포하는 문화잡지 '행복한 고민'에도 게재 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논밭출판사, #박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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