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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에이본(Avon) 강에서 올라와 차를 타고 바쓰(Bath)를 동과 서로 잇는 브록 거리(Brock St.)를 이동했다. 차창에는 빗줄기가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작고 운치 있는 바쓰 역도 비 속에 젖어 있고 여행자들은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바쓰 역. 작고 운치 있는 바쓰 역에 비가 내리고 있다.
▲ 바쓰 역. 작고 운치 있는 바쓰 역에 비가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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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빗줄기가 계속 시야를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바쓰 시내는 온통 노란 살색이 감도는 석재 건물들이 가득 이어지고 있었다. 오랜 풍상을 견딘 살색 석재는 거멓게 세월의 때가 끼어 있었다. 아무리 봐도 빗 속의 바쓰는 참으로 운치 있는 도시다.

바쓰의 서커스. 교차로에서 여러 방향으로 아파트 같은 건물들이 뻗어나간다.
▲ 바쓰의 서커스. 교차로에서 여러 방향으로 아파트 같은 건물들이 뻗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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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이동하는 길들마다 교차로가 교차하고 있다. 바쓰에서 건축의 역사가 시작된 '서커스(circus)'였다. 서커스는 교차로를 둘러싼 길가의 건축물들이 교차로의 각 길을 따라 아름답게 뻗어나간 곳이다. 런던의 그 유명한 중심 쇼핑가, '피카딜리 서커스(Piccadilly Circus)'도 바쓰에서 시작된 서커스의 양식을 이어받은 것이다. 바쓰의 서커스에는 길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집들이 아파트같이 이어지고 있었다.

비 내리는 바쓰 차창 밖으로 비 내리는 바쓰가 지나간다.
▲ 비 내리는 바쓰 차창 밖으로 비 내리는 바쓰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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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은 계속 차창을 흐르고 있었고 차는 언덕을 조금 올라갔다. 긴 원주를 이루며 끝이 보이지 않는 건물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로열 크레슨트(Royal Crescent)!' 로열 크레슨트는 건물이 마치 거대한 초승달 같이 보인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건물이 초승달처럼 보이려면 하늘에서 내려다 보아야 할 것 같다. 내가 보기에는 이 거대 건축물은 마치 휘어진 활같이 보였다. 2백 년 전에 이렇게 엄청난 건물이 지어졌다는 사실이 경이롭기만 하다.

로열 크레슨트 긴 활같은 거대 건축물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 로열 크레슨트 긴 활같은 거대 건축물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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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도 없이 이어진 큰 활은 무려 180m나 이어지고 있었다. 이 '초승달'에는 건물을 받치는 원주만 해도 114개나 들어서 있다. 이 놀라운 건축물을 광각 렌즈로 찍었으면 정말 대단한 사진이 나왔을 것 같은데 아쉽기만 하다. 출국하기 전에 광각 렌즈를 하나 살까 망설이다가 포기했는데 너무나도 아쉬운 순간이다.

로열 크레슨트의 여인 비 내리는 로열 크레슨트를 사진기에 담고 있다.
▲ 로열 크레슨트의 여인 비 내리는 로열 크레슨트를 사진기에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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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열 크레슨트를 잠시 차분히 바라보았다. 전에 보지 못했던 독특한 양식의 건물이다. 누가 보아도 장엄함을 느낄 이 건축물은 건축학적으로도 한 시대를 긋는 걸작이다. 얼핏 보면 절제 왕정의 왕이 군림하며 살던 궁전 같이 보인다. 18세기 조지 왕조 시대의 상류층들이 살던 로열 크레슨트는 고급 주택가의 위용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거대한 반원을 이루는 로열 크레슨트 안에는 무려 30가구가 들어서 있고, 지금도 바쓰 시민들이 살고 있다. 다행히 18세기 상류층의 집을 그대로 재현해 둔 한 집이 있었다. 로열 크레슨트 입구에 있는 1호집이다. 앤티크한 집 구경 하기를 좋아하는 아내가 앞서서 계단을 올라갔다.

1호집 박물관 18세기 영국 귀족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 1호집 박물관 18세기 영국 귀족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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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1호집 박물관은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설득(persuasion)>에서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을 찾아 열심히 뛰어가던 곳이다. 영화 속에서도 석재를 가지런히 깐 인도가 비로 젖어 있었는데 내가 로열 크레슨트를 찾은 날도 바닥이 온통 비로 젖어 있었다. 내 머리 속에는 그리 예쁘지 않지만 연기를 참 잘 했던 주연 여배우의 얼굴이 로열 크레슨트 위로 스쳐 지나갔다.

영화 속에서는 18세기 당시의 귀족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이곳에 드문드문 서 있었지만 현재 이곳에는 내리는 비 속에 금발의 어린 소녀 1명만이 지나고 있을 뿐이다. 영화 속 배경이 되었던 로열 크레슨트의 외관은 당시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다.

우리는 1호집 박물관의 현관 입구에 있는 철구조물에 관심이 갔다. 계단을 다 올라간 지점의 양 끝에 검은색을 칠한 철구조물이 바닥에 박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보지 못했던 물건이다.

궁금증이 많은 신영이가 먼저 물었다.

"엄마! 바닥에 박힌 저게 뭐지?"
"분명히 신발하고 관련이 있을 것 같아. 아마 신발털이일 거야."

아내는 언제나처럼 자신 있게 말하며 자기 신발을 그 위에 직접 갖다 대 보았다. 언제나 신중한 나는 영국에 사는 한국인 친구에게 저게 뭐냐고 물어보았다. 답은 역시 신발에 묻은 흙을 터는 신발털이였다.

로열 크레슨트 바로 앞의 낮은 언덕에는 푸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약한 빗줄기 속의 조용한 잔디밭에는 깊은 멋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 언덕 위에서는 바쓰의 거리도 내려다 보였다. 로열 크레슨트의 집 안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이 훌륭할 것이다. 나는 로열 크레슨트 한 집의 초인종을 눌러보고 싶은 강한 욕망을 느꼈다. 나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차 한 잔을 차분히 마시며 빗 속의 바쓰 시내를 내려다보고 싶었다.

바쓰 언덕의 주택가 각 집 앞의 현대식 차들이 옛 주택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 바쓰 언덕의 주택가 각 집 앞의 현대식 차들이 옛 주택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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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를 타고 바쓰 시내 전체를 내려볼 수 있는 언덕까지 올라갔다. 바쓰의 분지 안에는 바쓰 근교에서 채취한 노란 살색 석재로 쌓아올린 건축물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나는 바쓰를 내려 보는 언덕 위에서 아쉬움을 남기고 있었다. 언덕 위에 자리한 개인 주택에는 유명한 영국식 정원들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바쓰 시내 노란 살색 건축물들이 분지 안에 가득하다.
▲ 바쓰 시내 노란 살색 건축물들이 분지 안에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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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는 다른 색감의 꽃과 풀들이 이국적이면서도 온통 아름다웠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아름다운 정원은 집 주인이 얼마나 정원을 아끼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좁은 공간 안에 자연스러운 전원의 정취가 가득 풍기고 있었다. 정원 없이 아파트 안에서만 살다가 온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가장 감흥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이 영국식 정원이 아닐까 싶다.

영국식 정원 바쓰 언덕 위에는 아름다운 정원을 갖춘 집들이 눈길을 끈다.
▲ 영국식 정원 바쓰 언덕 위에는 아름다운 정원을 갖춘 집들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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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의 언덕으로도 영국식 정원과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이어지고 있었다. 아내는 분명히 마음 속으로 이런 곳에서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아쉬움을 나타내는 아내에게 나는 왜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세계 여행기 약 280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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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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