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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을 말리는 어르신들.
▲ 가을걷이 콩을 말리는 어르신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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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지소 앞마당에서 콩깍지와 콩대를 말린다. 구름 한 점 없이 내리쬐는 태양빛에 콩깍지가 말라 툭 터진다. 바닥에 튀어나온 콩들이 굴러다닌다. 굽은 허리를 다독이며 콩을 도리깨로 털고 키로 까부는 할머니. 콩 다발을 바닥에 가지런하게 널어놓는 할아버지. 무슨 콩이냐 했더니 메주콩이라고 한다. 나중에 벽돌처럼 뭉쳐서 메주를 만들면 맛이 있단다. 근처에 쥐눈이콩도 보인다. 조그맣고 꺼먼 것이 반쯤 벌어진 깍지 사이로 보인다. 여기저기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고추랑 들깨는 진작 말려서 치워버린지 오래. 동네에서는 소도 잡았다. 명절도 다가오고 추수도 바빠서 어르신들 발길이 뜸하다.

그나마 단골 몇 분이 오셔서 진료를 하면서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명절이 다가오니 한방간호사 선생님이 생각나는 분이 있나보다. 2009년 12월 7일 마지막 진료를 받으셨던 손 할머니. 할머니는 침 맞는 걸 참 좋아하셨다. 진료기록을 보니 서너번 정도는 직접 오셨지만 대부분 가정방문을 가서 침을 놔 드렸다.

치매가 약간 있으셨던 할머니는 주말에도 치료를 받고 싶어하셨다. 열릴리 없는 현관 앞에서 유리문을 수백번 흔들었다. 뭔가 허술했는지 현관문이 열렸다. 웅웅 하는 경고음은 아랑곳 없이 복도 의자에 앉았다. 잠시 후 출동한 경비업체 직원의 눈에 띈 그녀.

"할머니 오늘은 진료 안 해요. 가셔야 해요."
"나 진료받기 전에는 죽어도 안 갈라네."

설득에 지친 직원은 한방간호사 선생님에게 전화를 했다. 오늘 안 가면 다시는 침을 놔주지 않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에 할머니는 자리를 떴다.

일주일에 한번 오는 가정방문은 성에 안 차셨나 보다.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빌렸다. 택시를 타고 옆 면에 있는 한의원을 오갔다.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직접 두 발로 보건지소에 오기도 했다. 꼬부라진 허리를 지탱하면서 걷다가 넘어졌다. 생채기가 났다. 다시 일어났다. 비틀거리다 다시 넘어졌다. 칠전팔기의 오뚜기 마냥 겨우 도착한 할머니는 온 몸에 멍이 든 상태였다.

직접 갈테니까 제발 오지 마시라고 했다. 가정방문 가는 날. 할머니는 아들 셋과 함께 살고 있었다. 보건지소에서 온 손님들을 맞이하러 대문 밖으로 나오셨다. 집에 있던 아들이 욕을 했다. 또 다칠라고 나가냐고.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 육두문자. 한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 보는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조용한 자리에서 손 할머니는 속삭였다. 때리기도 한다고.

그러던 할머니가 2년 전 요양원에 들어가면서 가정방문을 가지 않게 되었다. "늘그막에 자식 눈치 안보고, 차라리 잘 됐지." 간호사 선생님이 담담하게 말했다. 침상에 누워있던 어르신들도 맞장구를 치며 같이 이야기를 들었다. 중풍 후유증으로 치료를 받는 신 할머니. 아내를 옆에서 지켜보는 김 할아버지.

어르신들로 만원인 진료실
▲ 진료실 풍경 어르신들로 만원인 진료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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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이번 주요?"
"네. 아버님. 이번 주 주말이요. 자녀분들 많이 오세요?"
"암. 다 온다데."

돌아가신 장남을 제외한 나머지 3남 2녀가 매년 내려온다고 한다. 시끌벅적하겠다고 했더니 대가족이 모여서 화투짝 보는 재미가 쏠쏠하단다. 옆에 계신 곽봉희 어머님은 딸들이 반찬을 만들어서 내려온다고 했다. 마침 치료를 다 마친 조점심 할머니가 침상에서 내려왔다. 미국에 사는 딸이 선물로 사 줬다는 파아란 신발을 신고 있었다. 선물 받은 날부터 이태까지 날마다 신는다. 명절이 다가오는데, 사람들마다 그 의미는 다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이라 외칠 수 있기를.


태그:#명절, #추석, #가을걷이, #한의사, #공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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