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잘 가라. 계속 연락하자."

잠이 덜 깬 듯한 모습의 윤의가 선일이와 병모를 껴안으며 말했다.

"남은 여행 잘 마쳐라."
"아버지, 정말 수고하셨어요. 고마워요."

병모와 선일이가 기차가 들어오는지 보려고 플랫폼 쪽으로 한 차례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나와 윤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8월 16일 부슬비가 내리는 아침 이른 시간, 뉴욕 북쪽의 교외 서펀 역에서 우리는 두 패로 갈렸다. 선일이와 병모는 미국 체류 4주 만에 서울로 돌아가는 참이었다. 나와 윤의는 차 머리를 돌려 다시 대륙을 가로질러 서부로 가는 거였다.

병모와 선일이는 운동화를 신고 여행 가방을 들고 있었지만, 여전히 노숙자의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거의 한달 동안 홈리스처럼 살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검정 슬리퍼를 신은 윤의와 나는 부스스한 머리에 땀과 비바람에 젖은 옷을 그대로 걸치고 있었다. 윤의와 나는 아직도 매일 밤 야영장을 전전해야 하는 대륙 여행을 끝내려면 한참이 남았다.   

귀국 서펀 역에서 우리 일행. 선일과 병모가 귀국을 위해 뉴욕 케네디 공항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직전의 모습들이다. 이제 윤의와 나, 둘이서만 다시 대륙을 가로 질러 서부로 되돌아가게 됐다.
▲ 귀국 서펀 역에서 우리 일행. 선일과 병모가 귀국을 위해 뉴욕 케네디 공항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직전의 모습들이다. 이제 윤의와 나, 둘이서만 다시 대륙을 가로 질러 서부로 되돌아가게 됐다.
ⓒ 김창엽

관련사진보기


"코가 갑자기 시큰하더라고요."

병모와 선일을 배웅하고, 비버폰드 야영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 속에서 윤의가 내게 말했다.

"친한 친구들이고 앞으로도 계속 끊이지 않고 연락할 사이들인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울적하네요."
"사람이 평생 살아도, 다른 사람과 한 자리에서 눈을 뜨고, 하루 종일 같이 어울려 다니다가, 같이 잠자리에 들 기회를 맞기는 어려워. 부부들도 낮 시간에는 보통 서로 떨어져 있잖니. 한 달 동안 하루 24시간씩 또래 친구들과 붙어 살 일은 앞으로 군대에서 말고는 네게 생기기 어려울 거다. 물론 병모, 선일이도 마찬가지일 터이고."

"정말 나의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지난 4주, '아들 셋'만 그처럼 딱 붙어 사는 시간을 보낸 건 아니다. 나 또한 남과 한 달 가까이 하루 종일 붙어서 살아 본 것은 군대에서 말고는 이번이 오십 평생에 처음이다. '아들 셋'은 나와 한참 나이 차이가 나지만, 지난 4주간 함께한 여정을 통해 내게 새로운 인생 공부의 기회를 줬다. 나 아닌 다른 개체와 같이 산다는 것, 어려우면서도 쉬운 일이고, 쉬운 일이면서도 또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윤의와 나는 비버폰드 야영장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짐을 꾸렸다. 비는 나흘째 끈질기게 내리고 있었다. 이 즈음 뉴욕에서 1일 강수량 기준으로 120여 년 만의 기록을 깼다더니, 정말 대단했다. 울적하고, 왠지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친구를 떠나 보낸 윤의의 마음은 오죽하랴.

이별 여행 병모와 선일이 떠나간 뒤 우리 부자는 뉴욕 교외의 야영장에서 비를 맞으며 짐을 정리하고, 다시 서부로 되돌아가는 횡단 길에 올랐다. 둘 만의 이번 여행은 부자간으로 질긴 인연에 물리적 고별을 고하는 '이별 여행'이기도 하다.
▲ 이별 여행 병모와 선일이 떠나간 뒤 우리 부자는 뉴욕 교외의 야영장에서 비를 맞으며 짐을 정리하고, 다시 서부로 되돌아가는 횡단 길에 올랐다. 둘 만의 이번 여행은 부자간으로 질긴 인연에 물리적 고별을 고하는 '이별 여행'이기도 하다.
ⓒ 김창엽

관련사진보기


'아들 셋'과 한 여행은 일단락되고, 이제 우리 부자의 대륙횡단이 앞 길에 놓여 있었다.

"야 정말 좋겠다, 부럽다 부러워."

여름방학을 이용해 아들과 북미대륙을 좀 누벼볼 생각이라고 말했을 때, 내 친구들은 한결같이 칭찬과 격려의 말들을 쏟아냈다. 그러나 사실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아마 윤의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윤의와 나, 부자 사이 맞다. 나는 윤의의 친아버지고 윤의는 나의 친아들이다. 그러나 우리 둘, 너무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다. 당혹스러우리만치 이질적이다. 윤의가 사춘기에 접어들던 중학교 때쯤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시종 불편했다. 윤의는 목 울대가 굵어질 무렵부터 나와 확연히 다른 자신만의 천성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나의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인가, 2학년 때인가 어느 날 오밤중 내가 한마디 싫은 소리를 하자, 윤의가 울부짖듯이 눌러온 감정을 폭발시키며 격정적으로 그렇게 토로했다. 그때 내가 받은 충격이란. 우리 부자, 남들이 보기에는 더 없이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두루 갖췄다. 아니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평범한 부자지간으로서 부족할 게 없는 사람들이어야 맞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평화 열한 밤을 났던 뉴욕 비버폰드 야영장 앞의 호수. 몸은 힘들었어도 '아들 셋'과 나 모두 이번 여행을 통해 마음이 항시 평화로운 사람이 되길 빌어본다.
▲ 평화 열한 밤을 났던 뉴욕 비버폰드 야영장 앞의 호수. 몸은 힘들었어도 '아들 셋'과 나 모두 이번 여행을 통해 마음이 항시 평화로운 사람이 되길 빌어본다.
ⓒ 김창엽

관련사진보기


아들은 미국에, 아버지는 한국으로...부자의 이별여행

윤의와 나는 필설로는 일일이 다 풀어내지 못할 만큼 성격 차이가 크다. 하지만 둘 사이의 부자로서 인연은 세상에 둘도 없을 만큼 질기다. 나는 아들로는 유일한 윤의를 혼자서 만 8년 이상 거뒀다. 아이 엄마와 내가 이혼한 사이도 아닌데, 어찌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그 것도 우리나라가 아닌 미국에서 그랬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그리고 다시 대학교 1~2학년을 내가 해주는 밥을 먹으면서 윤의는 나날을 보냈다. 아들에게나 나에게나 아이 엄마는 지금 돌이켜보면 우리 사이에 꼭 있어야 할 존재였다. 하지만 혼자 아들을 키울 때는 그걸 몰랐다. 극히 최근 들어서야 깨달았다.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로 되돌아가는 이번 대륙횡단은 우리 부자로서는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인 '이별 여행'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원래 남 사이인 부부나 연인이라면 몰라도, 부자 사이에 이별은 어불성설이다. 너무나 다른 우리, 그러나 핏줄로 묶여 있기에 우리는 이별을 하려야 할 수 없다. 참으로 다른 두 사람이 지금까지 어느 부자지간보다도 더 붙어 살아야 했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 이 순간 운명으로 받아 들인다.

그러나 물리적으로는 우리 두 사람 이별을 앞에 둔 여행이 확실하다. 더 이상 밥을 차려주고, 같이 놀아줄 일은 앞으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윤의는 미국에 남아 공부를 계속할 것이고, 나는 아내와 부모 곁으로 돌아간다.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을 하고, 그리고 결혼을 할 것이다. 그렇기에 그간의 질긴 우리 둘의 인연은 최소한 물리적으로 올해로, 아니 이번 여행으로 종결된다.

정리하고 싶었다. 윤의의 사춘기 이후 벌어진 우리 부자간의 틈을 반 뼘이라도 좁혀보고 싶었다. 윤의도 아마 같은 생각일 게다. 연인들은 너무도 사랑하기에 헤어지기도 한다. 우리들은 이제 헤어져 더 이상 같은 지붕 아래 살지 않겠지만, 서로에게 사랑 비슷한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다.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가는 그날까지 우리 둘은 세상사로부터 격리돼 둘만의 소통을 시도할 것이다.

서부로 돌아가는 길은 도시를 벗어나, 대자연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미국의 시골을 주로 전전하는 여정이 될 것이다. 그 길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자연이 우리 둘의 마음을 녹여주고, 아집과 편견의 더께를 조금이라도 벗겨주길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cafe.daum.net/talkus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육십이 코앞. 그러나 정신 연령은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승차 유랑인으로서 시한부 일상 탈출.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