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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너머 또 산이라고 했던가. 폭우 때문에 새벽에 빈번하게 잠을 깼던 것도 모자랐던 가보다. 보스턴을 거쳐 워싱턴에 당도한 첫 날 밤은 아예 아스팔트 위에서 자야 했다. 전날 보스턴에서 물에 푹 젖은 침낭을 그냥 갖고 올 수밖에 없었는데,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말릴 틈이 전혀 없었다. 과거 열 달 가까이 북미대륙을 떠돌 때 아스팔트 위에 차를 세워놓고 차 안에서 잔 날이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뱃가죽을 아스팔트 위에 그대로 밀착시키고 밤을 난 것은 이번이 난생 처음이다. "더 낮은 데로 임하라"는 그분의 뜻인지도 모르겠다. 

설마 했는데, 뉴욕에서 그만 엄청난 교통 지체 때문에 결과적으로 아스팔트 신세를 진 것이었다. 전날 오전 보스턴에서 출발할 때, 아이들도 오랜만에 서둘러줘서 예상대로라면 당일 오후 7시쯤은 워싱턴에 도착했어야 했다. 만일 그랬다면 동전을 넣고 빨래하는 세탁소를 찾아내, 침낭을 보송보송하게 말렸을 것이다. 또 당연히 아스팔트 신세를 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뉴욕을 통과하면서 길에서 최소 2시간 이상을 허비하는 바람에 워싱턴에는 또 밤 10시가 다 돼서야 도착했다.

아스팔트에서 취침... 정말 개운했다

우유, 소시지, 달걀은 호주머니 사정이 뻔한 우리가 가장 빈번하게 먹을 수밖에 없는 식품들이다. 미국에서 시민 폭동이 쉬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들 3가지 식품에서 보듯, 기초 생필품의 가격이 대체로 싼 게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나는 아우성치는 아들 셋의 식욕을 이들을 이용해 값싸게 달랠 수 있었다.
▲ 폭동 방지 식품? 우유, 소시지, 달걀은 호주머니 사정이 뻔한 우리가 가장 빈번하게 먹을 수밖에 없는 식품들이다. 미국에서 시민 폭동이 쉬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들 3가지 식품에서 보듯, 기초 생필품의 가격이 대체로 싼 게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나는 아우성치는 아들 셋의 식욕을 이들을 이용해 값싸게 달랠 수 있었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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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극도로 허기진 상태여서 급히 라면과 남아 있던 찬밥으로 늦은 저녁을 때우고 나니, 밤 11시가 넘었다. 이 시간 어디에 세탁소가 붙어 있는 줄도 모르고서 무작정 길을 헤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워싱턴 일대는 여기저기 우범지대가 많기로 미국에서 손꼽히는 지역이다. 침낭 하나 말리겠다고 만에 하나 총맞을 일을 감행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아스팔트 위에서 자고 일어나니, 가슴팍부터 아랫배까지 여기저기에 훈장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엎드려야만 잠에 빠져드는 버릇이 있는데, 아스팔트 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작은 돌 조각과 알갱이들에 몸이 짓눌린 자국이었다. 소매 없는 스포츠 상의에 얇은 운동용 재킷 하나를 걸치고 반바지 차림으로 잔 까닭에 쿠션이 있을 리 없다 보니, 여지없이 몸 거죽에 자국들이 만들어진 거였다.

그러나 잠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쾌적하게 잘 수 있었다. 아스팔트는 시멘트 바닥에 비해 차갑지 않은 편인데다, 이날 습도도 온도도 꽤 높아서 자는데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더구나 나무 판자처럼 극단적으로 딱딱한 침상을 선호하는 까닭에 오돌토돌 솟아 있는 돌 알갱이들을 제외하고는 편편한 아스팔트는 그만하면 훌륭한 침대였다. 아무렴, 물에 축축하게 젖은 침낭을 덮고 자는 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 해가 뜨고, 골 속을 드릴로 파낼 듯 짖어대는 갖은 새들의 울음 소리가 귀에 들어 왔을 즈음에 잠을 깼다. 하지만 실로 오랜만의 숙면에 몸은 두말할 것 없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선일과 병모가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의 한국관에서 우리나라를 소개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스미소니언 한국관 선일과 병모가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의 한국관에서 우리나라를 소개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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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에서 첫 밤을 난 '그린벨트 공원'(Greenbelt Park) 야영장은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워싱턴 DC가 아니라 매릴랜드 주에 자리한 거였다. 그러나 백악관과 연방 의회가 직선거리로 15km 남짓, 지하철로 20~30분 걸리는 위치여서 사실상 도심이나 다름없었다. 그린벨트 공원 야영장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이 곳에 오기까지 지금껏 밤을 났던 곳 가운데 급수로 따지면 제일 높은 편이다. 연방 공원관리국, 즉 국립공원을 관할하는 관청에서 직접 관리하는 야영장이기 때문이다. 주 정부나 카운티 혹은 시 정부에서 운영하는 공원 혹은 야영장보다는 지휘체계로 본다면 상위에 있다.

그린벨트 공원이 자리한 매릴랜드 주 그린벨트 시는 연방 정부가 직접 간여한, 미국 최초의 계획 도시이다. 우리가 밤을 난 그린벨트 야영장은 도시 녹지, 즉 그린벨트의 개념을 실전에 역시 최초로 적용하는 차원에서 조성됐다고 한다. 미국에서 사슴이나 노루 정도는 주택가에도 흔히 출몰하기 때문에 그린벨트 공원 여기저기서 그들이 풀을 뜯는 걸 목격하는 건 전혀 대수롭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여우는 많은 나라에서 멸종위기의 보호종인 경우가 많은데, 도심 한복판의 그린벨트 공원에서 밤 중에 듣는 여우 울음소리는 사뭇 신기했다. 우리도 청와대나 여의도 국회 의사당 근처에 야영장을 낀 이런 공원을 한두 개쯤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들 셋'은 오랜만에 푹 자는 것 같았다. 여행길에 오른 지 2주 가까이 됐지만, 하루도 온전히 편안하게 보낸 날이 없었으니 피로에 절어 있을 터였다. 자도 또 자도 피로를 떨치기에는 잠이 부족했던가 보다. 내가 눈을 뜬 시간은 새벽 여섯 시쯤이었는데, 그 길로 침낭을 들쳐 메고 차에 올랐다. 비와 땀에 젖어 축축한 상태로 몇 날을 차 구석에 처박혀있던 바람에 썩은 냄새가 나는 빨래거리들도 손에 잡히는 대로 챙겼다. 그간 '아들 셋'이 잠들어 있는 이른 아침이면 으레 해왔던 새벽 장보기에 나서는 길에 밀린 빨래도 좀 처리하고 싶었다. 특히 졸지에 원수처럼 변한 젖은 솜 덩어리 침낭은 찜찜해서 최우선으로 말리고 싶었다.

소시지와 달걀, 우유... 이거면 정말 '감사'

워싱턴의 전철역에 붙어있는 한국인 호객 카지노 광고. 미국내 한국교포들의 경제력 신장은 최근들어 특히 눈부신데, 카지노 업체들이 이런 점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고 있는 건 아닐까.
▲ 한국인 유혹 카지노 워싱턴의 전철역에 붙어있는 한국인 호객 카지노 광고. 미국내 한국교포들의 경제력 신장은 최근들어 특히 눈부신데, 카지노 업체들이 이런 점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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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에 이어 워싱턴은 '아들 셋'의 도시 게릴라 전을 예행연습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워싱턴과 보스턴 시내에는 별 네 개 혹은 다섯 개짜리 특급호텔들이 즐비하다. 헌데 이들 특급호텔들은 우리 일행의 꿈속에도 등장할 수 없는 최고급 숙소들이다. 1인당 달랑 몇 백 달러로 대륙을 누비며 한 달을 버틴다는 우리들의 결심은 특급호텔에 묵는 순간, 아마 하룻밤의 꿈처럼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대신 우리들은 도시 주변에 '야영 진지'를 치고, 도시를 공략하는 게릴라전을 기획했다. 전통적인 빨치산 방식과 다른 점이라면 밤에 숲 속에 머물다가 정반대로 환한 대낮에 도시로 치고 들어가는 거였다. 금명 단행될 뉴욕 침투는 '아들 셋'이 불꽃을 피우는 도시 게릴라전의 최종 대공세가 될 예정이었다. 하루 온 종일을 보내기로 한 이날의 당일치기 워싱턴 공세는 그러니까, 대대적인 뉴욕 캠페인을 앞두고 마지막 연습 훈련을 겸하는 것이기도 했다.

차로 5분 거리에 전철을 끼고 있는 그린벨트 공원은 워싱턴 공세를 펴기에 거의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남은 일은 미국의 심장, 워싱턴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릴 수 있도록 '아들 셋'의 배를 든든히 채우는 거였다. 이 대목에서 나의 고민이 시작된다. 근사한 식당은 가지 못할망정, 하다못해 햄버거라도 충분히 사 먹일 수 있다면 그런대로 미안한 느낌은 덜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극도로 얇은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면, 나의 메뉴 선택권은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소시지, 달걀, 우유. 이날 아침도 슈퍼마켓에서 걸어 나오는 내 손에는 이들 3가지 식료품이 들려 있었다. 소시지, 달걀, 우유는 미국의 저소득층들이 애호하는 식품이다. 값이 싸면서도 상당한 열량을 보장한다. 어려운 경제 형편에도 불구하고, 이들 기초 식료품의 값이 무척 싼 것을 나는 미국에서 폭동이 쉬 일어날 수 없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본다. 이들 3가지 식품에 물론 빵을 추가할 수도 있다.

'아들 셋'은 내 눈에 나태한 도시인의 전형이다. 하지만 한 번도 세끼 식사를 두고 불평한 적이 없다. 아니 불만스러운 표정조차 지어 본 적이 없다. 졸지에 유랑인 패거리의 두목이자, 게릴라 대장 행세를 하게 된 나로서는 눈물 나게 그들이 고마울 뿐이다. 떠돌이 여행자들에게 먹는 문제는 최대의 현안이자, 우선 해결해야 할 매일 매일의 당면 과제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돈이 무섭고, 한끼라도 건너뛸라치면 비감한 생각마저 든다. 먹는 게 곧 생존이다. 끼니 때가 되면 '아들 셋'의 굵직한 목 울대를 타고 넘는, '꿀꺽'하는 침 소리가 가슴을 철렁하게 할 만큼 크게 들린다.  

덧붙이는 글 | cafe.daum.net/talkus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태그:#워싱턴, #아스팔트, #카지노, #폭동, #생필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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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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