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피가 바뀌고 있다. 내 몸에 서서히 짐승의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인간의 적혈구 알갱이 하나하나가 들짐승의 그것으로 변화하는 걸 느낀다. '약'을 했을 때, 기분이 이런 것일까. 동물의 피를 대별하면, 사람 것과 짐승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짐승의 피에서 O형이니, AB형이니 하는 구분은 사치스럽다. 변화는 밤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뤄졌다. 로스앤젤레스를 떠난 지 딱 일주일 째 되던 날이었다. 인디애나의 시골 야영장에서 처음으로 숙면을 취했다. 넉넉잡아 7시간은 잤다. 그간 하루 평균 2~3시간을 그것도, 선잠과 가면을 반복했던 데 비하면 거의 동면수준으로 길게 잠에 빠졌다.

 

야생에 적응해가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도시 사람들은 야영에 들어가면 불편해서 잠을 잘 못 자는 경우가 많다. 나도 지난 일주일 그랬다. 도시와 야생은 양립할 수 없다. 어느 한쪽이 변해야 한다. 변하지 않으면 몸도 마음도 편할 수 없다. 이 모두가 과거 10개월간 노숙자로 북미대륙을 떠돌 때 경험한 일이다. 이제 빠른 속도로 나는 하루가 다르게 짐승이 돼 갈 것이다. 도시 물에 푹 절은 '아들 셋'은 보아하니 멀었다. 지난 밤 길을 헤맨 끝에 자정이 다 돼서 야영장을 찾았을 때, 윤의와 선일이의 첫 질문이 "샤워시설 있을까요"였다. 샤워로 하루를 시작하고, 종결하는 행태는 전형적인 도시인의 그것이다.

 

야생은 많은 걸 요구하지 않는다. 자고, 먹고, 배출하고, 움직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생각이 많을 필요가 전혀 없다. 불만이 상황을 개선해주지 않는다.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 불평도 절로 사라진다. 언감생심이지만, 수행이 이런 게 아닐까. 마음을 내려 놓지 않으면 배겨날 수 없다. 윤의, 병모, 선일은 그간 '밤=술, 낮=잠'으로 요약되는 생활을 해 왔다.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이 나보다 훨씬 많았지만, 장담컨대 '아들 셋'과 나의 피로도는 오늘을 기점으로 역전된다. 역전될 수 밖에 없다. 야생이 그들을 본의 아니게 끊임없이 괴롭히려 들 것이다. 힘들지 않게 여행하려면, 도시의 때를 벗어버리면 될 일이다. 너무 간단하다. 하지만 아이들이 철은 없다. 쉽게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

 

야생에선 생각을 많이 할 필요가 없다

 

두 손에 항시 휴대전화기와 아이패드를 들고 있어야만 충족감을 느끼는 게 요즘 아이들이다. 우리 '아들 셋'도 한치 오차 없는 요즘 아이들이다. 지난 일주일 동안 거의 매일 밤 강원도의 깊은 산골에나 있을 법한 야영장을 전전했다. 하지만 대자연의 심장 속에서도, '아들 셋'은 지금까지 휴대전화기와 아이패드를 내려 놓은 적이 없었다.    

 

들짐승들도 밤을 나고, 해가 뜨면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일까. 인디애나의 야영장에서 아침을 해 먹고 길을 나설 때 몸과 정신 상태는 절로 튀어 나오는 환호성을 억눌러야 할 정도로 최고 수준이었다. 이날 목표 지점은 나이아가라 폭포였다. 인디애나에서 출발, 차례로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를 거쳐 뉴욕 업스테이트에 진입하게 된다. 4개 주를 하루에 통과해야 하는 건 처음이다. 그러나 거리가 그다지 길지 않은 편이다. 800km도 채 안 되는 여정이다. 7~8시간 운전은 식은 죽 먹기다.     

 

몸도 가뿐했지만, 목적지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안도감까지 있어 더욱 좋았다. 뉴욕 주는 대서양과 접해 있다. 물론 나이아가라 폭포가 대서양 근처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이아가라 폭포까지 간다면 대륙 횡단은 물리적으로 90% 이상 끝나는 셈이다. 무엇보다 불쌍한 정도의 과적 상태로 지금까지 족히 3000km 이상을 달려 온 내 작은 차가 대견하다. 떠난 지 며칠 안돼 내려앉은 차체는 틈날 때마다 살펴봤지만 더 이상 처지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다. 주저 않는다 해도 차를 원망할 수는 없다. 잘못이 있다면 내게 있는 것이니까.  

 

그나마 '들짐승'으로 가장 빨리 변할 아들 선일이

 

"아버지 말씀대로 정말 한국과 많이 닮았네요."

 

90번 주간 고속도로를 타고 오하이오와 펜실베이니아 경계를 지나칠 즈음에 선일이가 그 전에 내가 한 말을 떠올리며 한마디 했다. 산이 그다지 높지 않을 뿐, 미국 북동부는 날씨와 식생이 북미대륙 전체에서 한국과 가장 닮았다. 선일이는 '아들 셋' 가운데 자연과 풍광에 가장 관심이 많은 편이다. 내가 보기엔 셋 중에서 들짐승으로 빨리 변화할 가능성 또한 가장 높다.    

 

북미대륙 동서횡단은 건강한 부부라면 운전대를 교대로 잡아가며, 대략 4박 5일이면 무난하게 끝낼 수 있다. 우리는 최단 거리를 택한 게 아니라, 몇 군데 포인트를 잡아 멀리멀리 돌아왔으므로 6박 7일에 뉴욕 업스테이트 도착은 스피드로만 따지면 양호한 편이다. 4박 5일이든, 6박 7일이든 대륙 횡단은 타임머신에 올라 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산과 집, 나무, 날씨 등이 달라도 그렇게 많이 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동부와 서부의 3시간이란 시차 또한 만만치 않게 느껴진다.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 감각이 반쯤 마비되는 느낌이 드는 게 정상이다.

 

"한국에서 떠나온 게 만 열흘 째인데, 날짜나 요일 감각이 전혀 없어요." 선일이와 병모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한국에서 오지 않았더라도, 이 곳 미국에 사는 사람들도 우리처럼 대륙을 자동차로 횡단하면 비슷한 기분이 들지. 내가 전에 많이 해봐서 알거든." '내가 해봐서…' 라고 말해 놓고 보니 우리나라의 높은 사람 누구를 닮아가는 듯한 느낌이다. 쓴 웃음이 나왔다. 

 

이왕 '내가 해봐서' 얘기가 나온 김에 한마디 더하면, 종단과 횡단은 전적으로 다르다. 나는 미국 북서쪽 끝인 시애틀에서 남서쪽 끝인 로스앤젤레스까지를 편도 기준으로 열대여섯 차례 차를 몬 적이 있다. 태평양 해안과 평행하게 움직이는 종단 여정이다. 자동차로 순수 주행시간만 20시간쯤 걸리는 데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느낌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 딱 한차례 식구들과 움직일 때를 빼놓고는 논스톱으로 잠을 자지 않고 달렸는데도 그랬다. 횡단과 종단의 이 묘한 차이, 연구 대상이다.   

 

나이아가라 폭포 근처의 야영장에는 오후 5시쯤 도착했다. 그랜드 캐니언에 들어간 날을 제외하곤 해 떨어지기 전에 목적지에 이른 건 처음이다. 해가 있을 때 야영을 시작하면, 심신이 훨씬 편하다. 환해서 텐트를 치기도 쉽고, 식사를 준비하기도 쉽다. '아들 셋'도 텐트 치는 일만큼은 이제 이골이 났는지, 순식간이다. 나 역시 1분의 지체도 없이 착착 밥을 하고, 간단한 반찬을 준비했다. 밥을 다 먹자마자 윤의가 "잠깐 바람 좀 쐬고 오겠다"고 했다. 그러라고 했다. 아들 셋은 저희들끼리 차를 몰고 나가 한 시간쯤 있다 캠핑 사이트로 돌아왔다. "호수 구경은 잘 했니. 수영을 하도록 허용돼 있든." "예, 잘하고 왔습니다. 수영도 가능하더라고요." 아이들은 시원스럽게 대답을 했다.

 

호수 구경한다 말하고선 술 파는 집 찾아다닌 아들

 

헌데 자동차 키를 받아 문을 열고 뒷자리를 보니, 옷더미 속에 뭔가 숨겨진 거 같았다. 옷을 들췄다. 갈색 봉투에 둘둘 말아놓은 커다란 보드카 한 병이 눈에 들어왔다. 2~3일 술을 굶더니, 호수 구경한다고 말하고선 결국 술 파는 집을 찾아 다녔던 것이었다.

 

"내가 분명히 말하마. 술 마시는 것,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알코올 도수가 센 술을 마시다가 걸리면 체포될 수 있다."

"저희들이 잘 알아서 할게요. 야영장을 대충 돌아보니 우리 말고도 술병이 있는 텐트도 있더라고요."

"좋아, 내가 다시 한번 말하는데 이건 겁주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술 마시다가 걸리면 체포될 수도 있다. 그럼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게 될 것이다. 그 돈이 5000달러 이상이 될 가능성이 커."

"아이, 왜 그러세요. 저희들이 알아서 한다니까요."

"나는 너희들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어. 보석금을 내야 하는 상황이라면 돈도 돈이지만, 한국으로 출국 일정에 차질이 올지 몰라. 미국 법원에서 출두 날짜를 느지막하게 잡아 놓을 수도 있으니까."

 

경고 효과가 있었는지, 아이들은 결국 내 권고를 받아들였다. 어둠이 완전히 내리자, 텐트 바깥의 의자식탁에서가 아니라 텐트 안에서 술병을 땄다. 나는 아이들이 술 마시는 텐트에 바로 붙여 세워 둔 다른 텐트에서 잠을 청했는데, 얼마나 유쾌하게 잘들 노는지 술 마시기 전에 경고를 준 게 무안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그러나 아들 셋의 즐거운 술자리를 더 이상 귀동냥으로 즐길 수 없었다. 들짐승, 좋게 말하면 유랑 인간으로 막 진화중인 내게 더 이상 불면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자리에 누운 지 10분도 못돼 잠에 곤하게 빠져 들었다. 종교도 없는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나온 기도문이 이날 여정을 마무리 했다. "오늘도 또 앞으로도 여행이 끝날 때까지 술로서 말썽이 일어나지 않기를…, 주여 제발 굽어 살펴 주소서." 


태그:#인종, #대륙 , #횡단, #야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