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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하면 먼저 '전쟁'이 떠오른다. 강원도 북쪽에 위치해 있는 지역이 대체로 그렇듯이, 양구 역시 '펀치볼'이나 '피의 능선' 같이 한국전쟁 당시의 격전지들로 유명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아서, '적'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양구하면 언뜻 떠오르는 내 오래 된 기억 역시 군대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30여 년 전 군대에 강제 징집된 선배를 찾아 부대로 면회를 간 적이 있었다. 덜컹거리는 버스에 몸을 싣고 흙먼지가 뽀얗게 이는 도로를 달려 해가 질 무렵이 돼서야 겨우 도착한 양구읍, 그곳에서 마주친 황량한 풍경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도시가 온통 잿빛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삭막한 풍경으로만 남아 있던 양구도 이제는 기억에서 깨끗이 지워야 할 때가 온 모양이다. 최근에 자전거여행을 하면서 새삼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양구 역시 강원도의 다른 지역 못지않게 아름다운 풍경과 청정한 자연을 간직한 곳이었다. 30년 전에 마주했던 낯설고 어두운 풍경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박수근 미술관 전경
 박수근 미술관 전경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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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촌부를 닮은 화백, 박수근

양구읍 시외터미널에서 내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박수근 미술관이다. 읍내를 가로질러 흘러가는 서천을 건너 얼마 가지 않아 정림리라는 마을의 작은 주택들 너머로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동산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그가 태어난 집터이기도 하다.

박수근 화백
 박수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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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은 양구에서 태어나 양구 고향 마을에 묻힌, 양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예술인이다. 양구에 와서 '가장 한국적'이라는 그의 작품을 감상하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머리 위로 높이 쌓아 올린 화강암 돌담을 돌아서 들어가면, 먼저 미술관 앞뜰에 앉아 미술관을 드나드는 관람객들을 조용히 바라다보고 있는 '박수근 화백'을 만날 수 있다.

'가장 한국적'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미술관 마당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 또한 지극히 한국적이다. 고무신을 신고서 땅바닥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 모습이 이제 막 들일을 마치고 돌아온 촌부를 닮았다. 그가 그린 그림 속 주인공들을 그대로 빼닮은 모습이다.

그는 일생을 궁핍하게 살다 갔다. 그의 그림에서마저 가난이 묻어날 정도다. 그는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소한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아기 업은 소녀, 시골 장터의 아낙네들, 길가의 촌부들을 손바닥이나 다름이 없는 작은 화폭에 그려냈다.

그림은 작지만, 그가 그 작은 유화 한 점을 그려내는 데 들인 공력은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캔버스나 종이 위에 수차례 물감을 덧칠하고 말리는 과정을 거듭하면서 그림의 질감이 마을 돌담이나 황토에서 보는 것과도 같은 투박한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지극히 한국적이다.

한반도섬 근처, 고대리 마을 입구 풍경.
 한반도섬 근처, 고대리 마을 입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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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가 주변의 가난한 이웃 사람들에게 얼마나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 역시 그 시대를 살다 간 사람들과 똑 같이 전쟁을 겪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 '전쟁'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박수근은 지극히 한국적이면서 지극히 평화적인 작가였다. 그가 더 오래 살아, 최전방 양구 땅에서 더 많은 평화를 그려내지 못한 게 안타깝다.

미술관 주변으로 논과 밭이 널려 있다. 미술관을 지으면서 일부러 의도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의 작품 세계와도 잘 어울리는 풍경이다. 무엇보다 미술관 건물이 주위 풍경을 압도하지 않아서 좋다. 1층 전시관을 돌아보고 나서 2층 전망대로 올라가면, 미술관 뒷편 언덕에 자리 잡은 그의 무덤까지 걸어서 올라갈 수 있다.

한반도섬으로 건너가는 다리 입구.
 한반도섬으로 건너가는 다리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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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호, 호수 위를 거닐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수상 다리.
 파로호, 호수 위를 거닐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수상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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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보다 더 한반도다운 한반도섬

미술관을 나와서는 다시 서천을 건너 천변 자전거도로로 올라선다. 그 도로 끝에 양구를 대표하는 또 다른 상징물인 '한반도섬'이 있다. 한반도섬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전체 외곽이 '한반도'를 그대로 빼닮은 섬을 말한다. 평지에서는 그 모양을 확인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면 한반도와 똑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호숫가 솟대
 호숫가 솟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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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적으로 생겨난 섬 같으면 세상에 모를 사람이 없겠지만, 아쉽게도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섬이라 아직은 유명세를 타지는 못하고 있다. 이곳은 원래 화천댐 상류에 위치한 거대한 나대지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나대지를 무단 경작하면서 수질이 오염되는 바람에, 더 이상의 오염과 생태계 파괴를 막기 위해 인공습지를 조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서 나대지 일부를 한반도 모양으로 남겨 놓은 것이 지금의 한반도 섬이다.

자동차여행자들에겐 그다지 눈여겨볼만 한 게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이동이 비교적 자유로운 자전거여행자들로서는 그냥 지나치기 힘든 곳이다. 호수 양안에서 나무다리를 건너 섬 안으로 걸어서 들어갈 수 있다. 비록 인공섬이기는 하지만, '국토의 정중앙'이라고 하는 양구에 한반도 모양의 섬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한반도 중앙에 또 다른 한반도가 있는 셈이다.

이곳의 한반도가 특별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 안에 남과 북을 가르는 38선이나 비무장지대가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한반도를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 도는 데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다. '지리산'에서 늘어지게 한숨 쉬고 일어난 다음에, '백두산'에 올라 기념 촬영까지 마쳤는데도 겨우 10여 분이 더 걸렸을 뿐이다.

한반도섬 안의 제주도.
 한반도섬 안의 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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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로 넘어가면, 그곳에서 또 하나의 긴 다리를 건너 호수 반대편으로 올라설 수 있게 되어 있다. '지리산'과 '백두산'에 '한라산'까지, 그야말로 있을 것은 다 있는 한반도섬이다. '제주도'를 떠나기가 아쉽다. 내가 살아서 이처럼 한반도 전체를 자전거로 여행할 수 있는 날이 과연 올 수 있을까?

호숫가에서는 사진으로 보는 것 말고는 이 한반도섬이 한반도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없다. 어딘가 높은 곳에 올라서야 볼 수 있는데, 당연히 전망대가 없을 수 없다. 한반도섬 전망대는 일단 한반도섬을 지나 반대편 호숫가 자전거도로로 올라서야 한다. 그러고 나서 다시 상류 쪽을 향해 올라가다 보면, 오른편으로 호텔 건물을 돌아서 들어가는 길에 언덕을 오르는 이차선 도로가 나타난다. 그 도로 앞에 한반도섬 전망대 표지판이 서 있다.

이곳에서 전망대까지는 약 2km. 전망대를 오르는 길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오르막길이다. 오르막이 길게 이어지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가파른 편은 아니므로 미리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전망대 아래에 주차장이 있다. 이곳에 자전거를 세워두고는 전망대까지 다시 나무 계단을 걸어 오른다. 그곳에 올라서야 비로소 한반도섬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반도섬
 한반도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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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이 살아 있는 선사시대 돌조각

양구읍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자전거를 타고 박수근미술관과 한반도섬을 거쳐 이곳 전망대까지 올라오는 데 약 2시간 정도 걸린다. 거리는 약 20여km. 자전거여행치고는 비교적 짧은 거리다. 무언가 아쉬움이 남을지도 모른다.

양구는 자전거여행을 하기에 좋은 곳이다. 도로는 한적하고, 공기는 더 없이 맑다. 양구읍을 벗어나 좀 더 먼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수입천 휴양지까지 가 볼 것을 추천한다. 그곳까지 가는 데 두 개의 높은 고개를 넘어야 하는 게 조금 부담스럽기는 하다.

성덕령 오르는 길
 성덕령 오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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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고개는 비교적 낮은 편에 속하고, 두 번째 고개는 비교적 높은 편에 속한다. 하나는 산 중턱을 돌아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산 정상을 넘어가는 길이다. 이 고개엔 성덕령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이 고개들을 오르는 동안에 엄청나게 많은 땀을 흘려야 한다. 하지만 그 고개들을 넘어 유원지에 도착하고 나면, 그 땀이 그렇게 달게 느껴질 수 없다.

수입천 휴양지 또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을 보여준다. 햇살에 반짝이는, 차고 맑은 물이 산과 산 사이를 낮게 흐른다. 그 물에 몸을 적시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다. 이곳은 이 지역에서 잘 알려진 피서지 중에 하나다.

산 사이를 에돌아 흐르는 수입천
 산 사이를 에돌아 흐르는 수입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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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경치가 빼어나기는 하지만, 여행길 중간에 어디 편히 앉아서 쉬어갈 만한 곳이 마땅치 않다. 끼니를 해결하기도 힘들다. 마실 물과 간단히 요기를 할 수 있는 음식물을 미리 챙겨가는 게 바람직하다. 유원지 못 미쳐 오미리 도로변에 슈퍼를 겸한 막국수집이 하나 있다. 그 집 막국수가 춘천 막국수 못지않게 맛있다.

막국수집 나이 든 주인의 표나지 않는 마음 씀씀이가 정겹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곳이기도 하지만, 한 끼 식사를 해결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이다. 혹서기에 높은 고개를 넘는 일이 무리일 수 있다. 일사병에도 주의해야 한다. 어느 고개든 단번에 오르겠다는 생각을 접고 중간 중간 천천히 쉬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한반도섬까지 가는 길 중간, 오른쪽 도로변에 있는 선사시대 박물관도 빼놓을 수 없는 여행지 중에 하나다. 박물관 뜰에 세상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바윗돌이 하나 서 있다. 도깨비 형상의 가오작리 선돌이다. 선사시대 작품이다.

가오작리 선돌
 가오작리 선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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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보면 그저 그런 돌인가 싶어 그냥 지나치기 쉽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언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돌이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를 드러내고 양쪽 눈썹 끝을 비스듬하게 치켜 올린 모습이 들여다볼수록 매력적이다.

사악한 기운을 쫓기 위해 부러 겁을 주는 듯한 얼굴 표정을 새겨 넣은 것이 분명한데,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난 까닭인지 지금은 그 표정에 장난기마저 감돈다. 그래서 지금은 그 표정이 화를 내고 있는 건지 웃고 있는 건지 잘 알 수 없다. 표현은 단순하지만, 그 표정에서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이 느껴진다.

수천 년, 수만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그 표정이 살아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그 돌조각이 박수근의 그림에서 돌에 새긴 듯 투박한 질감으로 표현해낸 마을 사람들과 닮았다고 하면 너무 무리일까? 양구에서 박수근의 그림이 세월이 지날수록 더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를 발견하고 돌아간다.

수입천 약수터, 보호색을 띤 개구리.
 수입천 약수터, 보호색을 띤 개구리.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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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양구, #박수근, #한반도섬, #가오작리, #선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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