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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때 들른 마트. 배추 세 포기 한 묶음에 6000원이라는 가격표를 보고 횡재한 기분으로 카트에 주워담았다. 며칠 전부터 여름 김치를 좀 담가야겠다는 아내가 생각나서 집에 오자마자 의기도 당당하게 배추부터 풀어놓는다.

 

"배추 세 포기 6000원 주고 샀어. 거저지?"

 

으쓱한 나의 말에 아내는 시큰둥하다.

 

"아니. TV도 안 봐요? 배추밭 다 갈아엎는다잖아요? 밤마실 나갔으면 애들 사달라는 아이스크림이나 사주지, 그 무거운 걸 왜 사들고 와요? 시장에는 한 포기 1000원 하던데."

 

배추밭을 갈아엎는 농민의 하소연을 뉴스로 접하면서도, 나는 작년 김장철 배춧값이 한 단에 1만5000원을 넘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배춧값뿐이었다. 삼겹살 가격이 수입산 쇠고기보다 비싸다는 사실 앞에서, 모처럼 고기를 먹어 보자고 정육점에 선 아내는 이 기회에 쇠고기 한 번 먹어보자고 호주산 쇠고기를 선택했다. 수박 한 통은 교묘하게 천 원 하나를 뺀 1만9000원. 이걸 만 원짜리 수박이라고 해야 할지, 이만 원짜리라고 해야 할지, 참외는 세 개 담긴 포장이 4900원. 수입산 포도는 한 송이에 9000원이 넘는다.

 

한여름을 앞둔 이때 과일 값은 도대체 왜 이리 비싼 것이고 삼겹살은 왜 '금겹살'이라고 해야 하는지, 여름 배추는 한창 비싸야 할 시기에 왜 인건비도 안 빠진다고 갈아엎어야 하는지, 널뛰 듯하는 농산물 가격에 생산자인 농민이나 소비자인 도시서민이나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은 매일반인 것 같다.

 

적자 농사, 정말 농민 잘못인가

 

"지금 서울 가락시장에 배추를 보내면 3개들이 1망에 1000원 받아요. 5t 트럭에 한 차(800망) 실으면 80만 원인데, 여기에 전체 물량의 20%는 1망에 600원밖에 못 받아요. 총 수취가가 72만 원인데 여기에 취급수수료 6%(4만3200원), 운임비 50만 원, 상차 작업비 45만 원, 1개당 140원(총 11만2000원) 하는 망값 등을 공제하면 얼마 적자 나는지 한번 계산해 보세요. 인건비는 고사하고 9900㎡의 배추밭에 묘종 값 100만 원, 멀칭비닐 값 33만 원, 비료 값 100만 원 등을 합치면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적자 나는 농사가 농민 잘못입니까, 정부 잘못입니까."

- <농민신문> 2011. 6. 1.

 

인근 마트에서 500포기 팔아주겠다고 해서 트럭으로 싣고 갔더니 2만 원을 주더라고 전한 배추밭 주인 제씨의 하소연에는 정부의 일관성 없는 정책에 대한 원망이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었다.

 

적자 나는 배추농사. 그것은 단지 농민의 우매함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작년 배춧값 폭등 때를 생각해서 뭉칫돈 한 번 만져보겠다는 생각에 너도나도 배추농사에 뛰어든 농민들의 과욕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대통령의 말대로 '어떻게 하면 정부보조를 더 받을까'하는 사고방식에 젖어 자립심을 상실한 농민들의 구태의연한 농사법의 필연적 결과라고 손가락질하고 외면해도 좋은 것일까?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21일 '농어촌의 새로운 희망을 선도하는 전국 농수산 공직자 격려오찬'에서 "농민들은 매번 정부보조를 받아서 살아간다, 이것 갖고는 농촌의 발전은 없다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정부보조를 더 받느냐, 보상을 더 받느냐 하는 사고에 젖어서는 세계와 경쟁할 수 없으며 자동차와 반도체 산업의 예를 들어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가 됐을 때 우리 국민은 비싸도 품질이 보장되고 맛있는 것을 사먹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우만 보더라도 일부의 국민들은 비싸도 사먹고 있음을 볼 때 인식을 전환해 새로운 것을 개발해 고품질 전략으로 가야 된다고 역설했다고 한다(<뷰스앤뉴스> 2011. 6. 21).

 

"농업문제는 복지문제"라던 사람들이 누군데

 

배추밭을 갈아엎고, 구제역 때문에 수백 마리의 가축을 끌어묻고 농장 문을 닫은 농민들에게 대통령의 격려와 조언이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 궁금하다.

 

재고미를 북한에 지원해서라도 쌀값 안정을 도모해야 된다는 농민단체와 야당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군량미로 전용될 우려가 있다며 재고미를 가축 사료용으로 처분하겠다며 논란만 키운 정부. 미국산 쇠고기는 맛있고 안전하다며 기자들을 불러놓고 미국산 쇠고기 시식회를 한 정치권. 이런 정부의 수반이자 한나라당 태생의 대통령이 농민들의 정부보조 의존성을 질타하고 자립성을 요구했다니 참 어처구니없고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농업을 국가의 식량안보 차원에서 고민하기보다는 보조금으로 사탕발림하려는 이들은, 오히려 '돈 버는 농어촌, 살맛나는 농어촌'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던 이명박 정부의 고위관리들이었다.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의 주장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의 첫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강만수 전 장관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열린 경제장관회의에서 "농업이란 말은 그만하자! 농업 문제는 복지 차원에서 풀면 된다"고 말했으며, 이는 '농업문제는 농민들에게 생활보조금이나 대주면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프레시안> 2011. 2. 3.).

 

차 한 대 팔면 얼마나 남는데 그깟 귤 농사, 쌀 농사 때문에 FTA를 미뤄야 되겠느냐는 논리. 그것이 이명박 정권 농업정책의 근간이었고, '농업 문제를 복지 문제로 풀자'는 말은, 명분 없는 개방정책(FTA 등)을 위해서라면 보조금이라도 줄 수 있다는 '당근'에 불과했다.

 

그런 당근을 손에 들고 농민의 생존권은 안중에 없이 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관리들은 농민들을 '다방농민'이라 불렀다. 다방에서 공무원들과 어울려 정부보조금을 탐내는 농민들이 있다며 도덕적 해이를 질타한 사람, 그 사람은 다름 아닌 'FTA 신봉자' 김종훈 외교부 통상교섭본부장이었다.

 

그뿐인가? 구제역 파동으로 온 나라가 비상시국에 들어간 지난 겨울,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집주인이 도둑을 잡을 마음이 없다"며 축산농가 책임을 거론했다. 그들에게 농업은 개방 정책을 위해서는 당연히 희생되어야 할 산업이었고, 농민은 비전도 성실함도 없이 다방에 앉아서 정부보조금만 쳐다보는 천덕꾸러기 같은 존재였다.

 

널뛰기 물가 대책이나 제대로 세워라

 

그러나 따지고 보면 농민들을 다방농민으로 만든 것도, 배춧값이 폭락해 배추밭을 갈아 엎는 것도 정부의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 힘들다. 또 김장철에 배추 한 포기가 만 원을 넘어가고, 여름 과일인 수박 한 통에 2만 원을 넘나드는 현실. 쇠고기보다 삼겹살이 더 비싼 현재의 농수산물 가격의 책임은 물가관리를 입으로만 해온 정부에게 있다고 하겠다.

 

물가관리도 농업문제도 어느 하나에도 정확한 예측이나 장기적 전망을 가지지 못한 채 즉흥적으로 쏟아내는 정책들이 농민들의 호주머니를 비게 만들고 도시 서민들의 장바구니를 비게 만드는 것이다.

 

농지 소유로만 본다면 '농민 출신' 장차관이 어느 때보다 많은 이명박 정부. 집권 4년을 넘어서는 지금 농민은 배추밭을 갈아엎고 도시 서민들을 2만 원을 호가하는 수박 가격 앞에서 혀를 내두르고 있다. 이 파국이 진정된다고 해도 또 어느 때 수박밭을 갈아엎고 배춧값이 금값이 될지 모를 일이다.

 

농민도 도시서민도 예측할 수 없는 삶 앞에서 불안하다. 배추밭 갈아엎는 걸 보면서 배추 한 포기 500원, 1000원에 산다고 좋아할 서민들은 많지 않다. 또 수박 값 2만~3만 원 한다고 농민들이 금방 부자 되는 것도 아니다.

 

물가 잡는다는 말이 입버릇처럼 된 정부 관료들. 제발이지 예측 가능한 삶을 살도록 해주었으면 좋겠다. 농민 보조금 운운하기 전에, 보조금 안 받고도 농사지어 살아갈 수 있는 농촌을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 다방농민 말하기 전에, 땅값 올리려고 농민의 이름을 단 가짜 농민 고위 관료들의 땅이라도 진짜 농민들에게 돌아갔으면 좋겠다.


태그:#농민 보조금, #물가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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