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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곡하는 날이면 온 가족이 총출동을 한다. 이때는 족답식 탈곡기가 사용되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인력을 들여야만 움직여 힘이 많이 들었다. 그러니 쌀 한 톨이라도 어찌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었을까?…짚으로 삼태기를 짜고 있다. 손재주가 얼마나 좋은지 짚으로 만들지 못할 물건이 없어 보였다(1972년)…마을에서는 계를 조직해 크고 작은 일을 치를 때마다 서로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다. 그중 혼례는 마을의 가장 큰 잔치로, 혼례를 치를 집에 소쿠리 한가득 곡물을 실어 나르는 아주머니들의 뒷모습이 푸근해 보인다.…모내기로 바쁜 부모님 대신 동생을 돌보고 있는 아이들. 막내에게 맏이는 아버지, 어머니의 다른 이름이었다(1977년)….-<그리운 한국마을> 일부 사진 설명 중에서

<그리운 한국마을> 겉그림
 <그리운 한국마을> 겉그림
ⓒ 일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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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한국마을>(일조각 펴냄)에는 1970년대 우리나라 한 농촌의 풍경과 사람들, 생활 모습들을 담은 사진과 이야기들이 풍성하다. 

저자는 일본인 이토 아비토 교수. 그는 일본에서 한국 연구로 단연 손꼽히는 문화인류학자다. 책속의 사진들은 몇 년 전에 정년퇴임한 그가 젊은 청년 시절인 1970년대 우리나라의 진도와 안동 , 제주도 등에 머물며 찍은 것들로 눈길을 붙잡는 사진들이 많다.

위는 저자가 몇 장의 사진에 붙인 설명들이다. 진도와 안동이 배경이지만, 내 어린 시절의 풍경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1970년대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은 이런 설명만으로 어떤 풍경을 담은 사진인지 쉽게 가늠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아마도 어린 시절의 수많은 풍경들을, 그 풍경 속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을 떠올리리라.

이 사진들뿐이랴. 흙 담 앞에서 환하고 웃고 있는 아이들, 기둥에 걸어놓은 수숫단, 아무렇게나 마루 위에 쌓아둔 호박, 잠이 든 동생을 업고 고무신 뒤축을 꺾어 슬리퍼처럼 신고 가는 어린 소녀, 당시 마을마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서 있던 새마을규약과 간첩신고에 대한 안내문 등 낯익은 풍경들이 많아 쉽게 책을 놓지 못했다.

그 무렵 마을에는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모두 호롱불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식생활도 평소에는 자급자족이었고, 음식을 사서 먹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정기시장이 서는 장터까지 마을에서 걸어서 40~50분까지 걸리는데, 거기에서 매달 4일과 10일에 장이 섭니다.…초승달이 뜨는 밤에 날이라도 흐려지면 별빛조차 없는 새까만 밤이 되어 정말 손으로 더듬어 가며 생활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날이면 길을 걸을 때에도 길가에 핀 코스모스에 비치는 가녀린 흰 빛을 따라 논에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아주 천천히 걸어야 했습니다. 반면에, 읍내에는 전기가 들어와 빛을 밝히고 있었고, 식당이나 다방, 당구장, 극장도 있었습니다. 진도에서는 야간통행금지가 없었으므로 심야에도 사람을 볼 수 있었습니다.-<그리운 한국마을>에서

사진뿐만이 아니다. 이처럼 우리의 70년대 농촌과 생활을 되돌아 볼 수 있는 부분들 또한 많다. 배경이 진도라지만 곡창지대인 호남지역에서 자란 내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운 한국마을> 표지에 넓은 책띠로 있는 사진으로, 전혀 모르는 얼굴들이지만 낯익은 표정들이라 뒤의 남자아이들 사진과 함께 잘라 붙여두고 자주 보고 있다.
 <그리운 한국마을> 표지에 넓은 책띠로 있는 사진으로, 전혀 모르는 얼굴들이지만 낯익은 표정들이라 뒤의 남자아이들 사진과 함께 잘라 붙여두고 자주 보고 있다.
ⓒ 이토 아비토(일조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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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업고 있는 여자아이. 당시에는 이렇게 바쁜 부모를 대신해 형제자매가 어린 동생들을 돌보는 일이 흔했다. 사진 정면에 울창하게 보이는 것이 천연기념물인 비자나무' 이런 설명이 붙어있는 사진으로 우리 아이들이 흥미를 보인 사진 중 하나다.
 '아기를 업고 있는 여자아이. 당시에는 이렇게 바쁜 부모를 대신해 형제자매가 어린 동생들을 돌보는 일이 흔했다. 사진 정면에 울창하게 보이는 것이 천연기념물인 비자나무' 이런 설명이 붙어있는 사진으로 우리 아이들이 흥미를 보인 사진 중 하나다.
ⓒ 이토 아비토(일조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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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을 돌보는 일에는 남자아이라도 예외가 없었다. 형님 등에 업혀 잠들어 있는 아기의 모습이 편안해 보인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동생을 돌보는 일에는 남자아이라도 예외가 없었다. 형님 등에 업혀 잠들어 있는 아기의 모습이 편안해 보인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 이토 아비토(일조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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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진도에 살던 당시에 아예 마을에 집을 짓고 살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땅이라면 얼마든지 있고, 다들 함께 도와가며 산에서 나무를 잘라오면 목수는 이웃에서 부를 수 있으니까 혼자서 살 정도의 집이면 4~5만 원정도로 간단히 지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하숙비는 당시 마을에는 초등학교 교사가 가끔 하숙하는 경우도 있어서 그에 준하여 쌀의 양으로 계산되었습니다. 쌀을 하루에 3홉 먹으니까 1개월이면 9되,1되는 500원이었으므로 한 달에 4500원, 반찬값은 계산하지 않고 500원을 더하여 한 달에 5000원씩을 냈습니다. -<그리운 한국마을>에서

이런 부분들도 솔깃하게 읽었다. 집과 땅이 돈벌이 수단이 된지 오래이며 이웃에 누가 살고 있는지 모르고 살기 예사인 요즘인지라, 집에 목매달고 살아가는 소시민인지라 더욱 특별하게 와 닿았나 보다. 

저자는 이어 끓인 물을 아껴 써야만 했던 겨울날 아침 세수를 하던 풍경과 여름날의 목욕, 시골마을 어느 집이나 가축들을 많이 키웠기 때문에 거의 온종일 가축들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던 마을 분위기와 당연하게 부모님의 농사 일손을 도와야만 했던 시골 아이들 이야기, 술, 제사, 굿판 등의 이야기들을 조근조근 들려준다. 

책은 이처럼 글로든 사진으로든 우리들이 미처 기록하지 않은 지난날 우리의 생활사를 풍성하게 담고 있는지라 아슴아슴한 어린 시절의 추억들과 기억들을 떠올리며 푹 빠져 읽었다. 그리하여 시골에서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 줄 때마다 눈을 반짝 빛내며 "서울에서 자랐기 때문에 시골 아이들만큼 다양한 추억이 없다"고 말하던 3살 연배의 친구에게 이 책의 존재를 알려줬다. 그런데 그는 다소 부정적으로 책을 받아들였다.

1970년대 우리의 농촌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던, 아이들이 동생들을 업거나 안고 엄마가 젖을 물릴 수 있는 새참이나 점심때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1970년대 우리의 농촌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던, 아이들이 동생들을 업거나 안고 엄마가 젖을 물릴 수 있는 새참이나 점심때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 이토 아비토(일조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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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답식 탈곡기를 이용한 탈곡 모습으로 1970년대 홀테와 더불어 많이 쓰이던 기계이며 흔하게 볼 수 있던 모습이다.
 족답식 탈곡기를 이용한 탈곡 모습으로 1970년대 홀테와 더불어 많이 쓰이던 기계이며 흔하게 볼 수 있던 모습이다.
ⓒ 이토 아비토(일조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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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인 저자가 당시 우리 땅 어딘가에 머무르며 조사하고 연구한 것들이 독도 문제처럼 우리의 뒤통수를 치(려)는 자료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유야 어떻든 조사 연구자가 일본인이라는 사실만으로 내 친구처럼 이 책의 면면을 알기에 앞서 일종의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솔직히 나도 처음에는 그랬으니까.

솔직히, 대지진으로 엄청난 인명을 잃은 그들이 인간적으로 안 됐다는 생각이 들지만, 와중에도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우기며 우리의 과학기지건설에 하지 말아야 할 참견을 하는 일본과는 어떤 경우에든 화해는 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다. 또한, 한 전시회에서 본 이후로 결코 잊히지 않고 틈틈이 떠오르는, 식민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고자 우리나라 사람들을 마치 곤충 채집하듯 부위별로 찍어 기록한 그들의 유리건판 사진들도 떠올랐다.

이런지라 솔직히 이 책이 100% 순수하게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하지만 저자가 여러 민족의 생활이나 풍습, 문화 등을 관찰 조사하여 인간의 본질을 밝혀내는 문화인류학자라는 것, 저자의 이런 현지조사는 문화인류학만의 독특한 연구 방법이라는 것을 우선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생각하면 책에 대한 이해가 훨씬 쉬울 것 같다.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볼 때 친일인가 반일인가의 여부에 따라 이분법적으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한국인이 일본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은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역사를 생각하면 한국인 누구나가 반일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한편으로 일본인은 과거의 일을 돌아보지도 않고 한국인이 자신들을 미워하고 있다. 원망하고 있다고 단순하게 생각하여 피하려고만 합니다. 즉 반성은 하지 않고 스스로 후퇴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그리운 한국마을> 중에서

2006년에 일본에서 출간된 <그리운 한국마을> 원서인 <한국몽환>
 2006년에 일본에서 출간된 <그리운 한국마을> 원서인 <한국몽환>
ⓒ 新宿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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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와 같은 글로 책을 마친다. 이 책은 원래 저자가 정년퇴임을 하며 그동안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보답하고자 쓴 책으로 2006년에 일본에서 먼저 출간되었다. 원제는 <한국몽환(韓國夢幻)>, 저자가 고심하여 지은 제목이란다.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이 한국이라는 나라와 머물면서 한상에서 밥을 먹고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정을 나눈 사람들은 그에게 언제나 아련한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지내야 하는 환경이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정이 우선 기우는지라 그런 것들은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는, 마음이 늘 달려가기 일쑤인 고향처럼 말이다.

반공방첩 교육이 불타올랐던 1970년대 당시 간첩으로 오해받아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받았었다는 저자는 언제 어떤 계기로 문화인류학을 일생의 연구과제로 선택하게 되었는지, 수많은 나라 중 하필 한국, 그 중에서도 진도 상만리나 안동과 어떻게 인연이 시작되었는지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1970년대 진도와 안동의 다양한 풍경과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정겹게 들려준다.

우리의 지난날 혹은 1970년대 농촌은 어땠을까?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들은 무엇일까? 지난 날 우리는 무엇 때문에 웃고 울었을까? 그때는 있었지만 지금은 볼 수 없는 것들은 무엇이며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은 언제 우리 곁에 왔을까? 일본인인 그가 꿈속에서까지 그리워한 한국마을과 한국인들은?

이런 것들을 140여 컷의 사진과 글로 조근 조근 들려주고 있는 이 책은, 저자가 일본인이라는 사실 그 편견을 버리고 대하면 주인인 우리가 미처 담아내지 못한 것들을 이방인의 눈으로 우리의 지난날을 충실하게 담아 기록해 우리에게 돌려준 아주 좋은 자료란 생각이다.

  당시 일본인들의 우리에 대한 생각은?
 제가 한국과 관계를 맺기 시작할 무렵의 한국은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독재정권시대였고, 일본의 매스컴들은 그 체제하의 인권억압을 다루면서 마치 지금의 북한을 대하는 것처럼 어두운 면만을 강조하였습니다. 당시의 일본 지식인들 중에는 이러한 정권의 잘못을 비난함으로써 한국사회 자체와 얽히는 것을 피하고자 하는 자세를 보이는 사람이 상당수 있었습니다. 도쿄대학과 같은 곳에서조차 한국연구를 하는 것이 마치 한국의 독재체제를 인정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듯한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상대의 잘못을 책망하면서 스스로의 책임을 회피하고, 교묘하게 관계되는 것을 피하는 것이 일본인의 사고구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무릇 학자란 보통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것을 기초로 하여 그 견식을 보여주는 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게을리 한다면 학자가 하는 일이란 결국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마치 자기 의견인 양 꾸며대는 것일 뿐입니다. 타인의 연구를 인용하고 있으면 마치 자신도 창의적인 연구를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쉬운데, 결국은 남의 학설을 작시 것인 양 팔아먹는 것이 됩니다. 스스로 경험한 현실을 어떻게 살려낼지가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살려내야만 하는 것은 현장에서 관찰을 통해 발견한 것들인데, 그것은 지금의 일본인처럼 생활 감각이 결핍된다면 한계가 드러날 것이 분명합니다.-<그리운 한국마을> 저자 이토 아비토

※저자가 현지조사 차 한국에 머물던 당시 일본의 우리에 대한 생각이 잘 드러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연구지로 선택했던 저자의 학문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는 부분이라 덧붙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 <그리운 한국마을>|저자:이토 아비토|옮긴이:임경택|출판사:일조각|출간일:2010-12-22|값 :16,000원



그리운 한국마을 - 일본 문화인류학자의 눈에 담긴 1970년대 진도.안동의 정경

이토 아비토 지음, 임경택 옮김, 일조각(2010)


태그:#진도 상만리, #문화인류학, #한국몽환, #이토 아비토, #일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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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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