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농구 '최고령 선수' 이창수(창원 LG, 42)가 은퇴를 선언했다. 20일 창원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010-2011시즌 프로농구 정규리그 최종전 인천 전자랜드와의 홈 경기에 앞서 은퇴식을 치른 이창수는 올시즌을 마치면서 27년간의 선수생활을 정리할 예정이다. LG가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만큼, 이날 은퇴식을 했어도 남은 PO 경기는 모두 정상적으로 소화할 예정이다.

1969년생으로 안양 인삼공사 이상범 감독과 동기인 이창수는 프로농구 역대 선수 중 가장 오랫동안 현역에서 뛴 기록을 가지고 있다. 군산중 시절부터 농구를 시작하여 경희대와 실업 삼성전자, 상무를 거쳐 프로에서는 서울 삼성, 울산 모비스, 창원 LG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삼성과 모비스에서 총 2번의 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동료를 빛나게 하는 토종 '빅맨'

이창수는 화려한 선수는 아니다. 프로농구 통산 정규리그 527경기에 나섰지만 대부분이 벤치멤버였고, 주전이거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도 아니었다. 기록도 통산 평균 3.2점, 리바운드 2.0개 정도로 전형적인 식스맨의 수치였다. 수상 경력도 05~06시즌 식스맨상 한 차례가 전부다.

하지만 프로 출범 이후 외국인 선수들이 득세하며 토종 '빅맨'들이 고사 위기에 몰렸다. 그런 가운데 이창수는 서장훈이나 하승진같이 타고난 신체조건도, 김주성같은 폭발적인 운동능력도 없었지만, 특유의 성실함과 꾸준한 자기관리를 통하여 포지션 변경이나 플레이스타일의 변화 없이도 묵묵히 토종 빅맨으로 오랫동안 살아남은 특이한 경우다. 빅맨으로서의 기본기가 탄탄하고 자신이 돋보이기보다는 조연의 역할에 충실한 전형적인 '블루워커'형 선수였다.

서장훈을 유학 보낸 '조폭 듀오'

하지만 이창수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엇갈린다. 프로화 이후 농구를 본 팬들이라면 이창수에 대하여 화려하지는 않지만 묵묵히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여 오랫동안 장수해온 노장 빅맨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프로 출범 이전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그의 플레이를 지켜본 팬들에게 젊은 시절의 이창수는 '에이스 킬러'라는 좋지 않은 이미지도 남아있다.

이창수하면 흔히 '서장훈'을 연관 검색어로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프로 출범 이전 대학농구가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1995년 농구대잔치 당시, 이창수의 소속팀 삼성전자는 서장훈의 연세대와 8강에서 격돌했는데, 당시 시리즈는 승부가 과열 양상을 띠며 격투기를 연상시킬 만큼 격렬한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박상관(현 명지대 감독)과 함께 더블포스트를 형성했던 이창수는 골밑에서 압도적인 위용을 과시하던 서장훈을 막기 위해 거친 수비도 마다하지 않았고 위험한 플레이와 부상선수가 속출하는 부작용이 일어났다.

서장훈은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골밑 리바운드 도중 박상관의 팔꿈치에 목을 얻어맞아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서장훈의 공백을 틈타 역전승을 거두며 4강에 진출했지만 후배 선수들을 상대로 도를 넘어선 거친 플레이를 해 승부에 눈이 멀었다는 여론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이 사건은 서장훈에게도 큰 트라우마로 남아, 잠시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서장훈에게 직접 부상을 안긴 것은 박상관이었지만 이창수 역시 각종 거친 플레이와 위험한 파울로 서장훈을 비롯한 연세대 선수들을 위협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후 한동안 이창수와 박상관에게는 '조폭 듀오'라는 웃지 못할 별명이 따라다녔고, 비신사적이고 매너 없는 선수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2년간의 투병 끝에 코트로 복귀

 창원 LG 이창수 선수

창원 LG 이창수 선수 ⓒ 창원 LG

이창수의 농구 인생에 중대한 전환점이 된 것은 프로 출범이었다. 외국인 선수들의 대거 유입과 함께 토종 빅맨들이 고사 위기에 몰린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이창수는 1996년 운동선수에게는 치명적인 간염이라는 진단을 받으며 선수 생활 자체를 포기해야 할 기로에 놓였다.

하지만 이창수는 2년 가까이 운동을 중단해야 했던 위기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이창수가 프로 창단 멤버인 김병철이나 우지원보다 선배인데도 자신은 원년 멤버에 들지 못하는 것은 간염으로 투병하느라 첫 시즌을 통째로 날려야 했기 때문이다. 철저한 자기관리로 병마를 극복하고 다시 돌아온 이창수는 97~98시즌부터 현장에 복귀하여 인간 승리의 모범 사례로 떠올랐다.

프로에서의 이창수는 아마추어 시절보다 출전 시간과 비중은 줄어들었지만 성실하고 모범적인 자세를 인정받으며 새롭게 평가받기 시작했다. 비록 10분 내외의 시간 동안 상대 주득점원을 막는 백업 센터 혹은 전문 수비수가 그의 보직이었으나, 주어진 역할에 불평하지않았고 언제나 맡은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려고 노력했다.

늦깎이 스타의 명예로운 은퇴

이창수의 농구 인생은 늦깎이로 빛을 발했다. 2003년에는 무려 34세의 나이로 하얼빈에서 열린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장신의 외국 센터와 경쟁하며 한국의 준우승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2006년에는 식스맨상을 받은 것과 함께 울산 모비스의 주장으로서 팀의 정규시즌 우승에 힘을 보탰다. 그리고 2007년에는 감독 추천으로 역대 최고령 올스타에 이름을 올렸고, 주장으로서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차지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선수 생활 내내 양지보다는 음지, 주연보다는 조연의 이미지가 어울렸고 때로는 불미스러운 일로 여론의 지탄을 받기도 했지만, 수많은 스타들이 명멸하는 승부의 세계 속에서 시대적 상황과 병마라는 악재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온 이창수의 노력만큼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비록 그가 당대 최고의 선수나 레전드는 아니었을지라도, KBL의 역사를 함께해 온 베테랑으로서 명예롭게 물러날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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