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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어둑어둑해서야 백야 김좌진 장군(1889-1930)이 순국한 '금성정미소'와 '팔로(八老: 원로) 회의실' 등을 재현해놓은 '산시 한중우의공원'에 도착했다. 저녁이 되면서 바람이 더욱 날카로워져 볼이 따끔거렸다.

 

오래된 퇴비가 불에 타는 것 같은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입을 막고 기침하는 일행도 있었다. 저녁밥 하느라 오리지널 석탄을 태우는 냄새라고 했다. 만주는 도시나 시골이나 연탄보다 석탄을 더 많이 땐단다.

 

할머니 한 분이 나오더니 서툰 우리말로 반갑게 맞았다. 박영희 시인이 "할머니 참 오래 계시네요!"라며 인사를 건넸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 "산시 기념관에 두 번 다녀갔는데, 말도 안 통하는 한족이 지키는 걸 보고 가슴 아팠다"고 했던 그 할머니인 모양이었다.

 

 ‘산시 한중우의공원’을 알리는 표지석. 글씨체와 형식은 물론 내용까지 중국 입맛에 맞게 써놓아 마음이 상했습니다.

항일 유적지임을 알리는 표지석에 한자로 '산시 중한우의광장'이라 새겨져 있었다. '창경궁'과 '창경원'이 오버랩 되면서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中'으로 시작하는 것이야 이해하겠는데 '추모 기념관'을 '광장'이라니, 아이들 놀이터도 아니고, 어이가 없었다.

 

우리는 2010년 7월 5일 해림시 산시진에 개관한 백야 장군 추모 기념관을 '김좌진 장군 기념관', 혹은 '한중우의공원'이라 부른다. 그런데 중국 측에 등록된 정식 명칭은 '산시 중한우의광장'이란다. 문화 차이로 받아들이려고 해도 생각할수록 자존심이 상했다.

 

만리장성 동쪽 기점을 압록강 변까지 확대하여 고구려가 활약했던 요동 지역을 자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속셈이 백야 기념관에서도 드러나고 있었다. 중국 정부가 비협조적이어서 도마 안중근 동상을 세우지 못한다는 얘기도 핑계가 아님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무거워진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를 자청한 (사)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 김종해 총경리의 힘차고 시원시원한 설명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총경리로 부임한 지 한 달도 채 안 된다는 그는 현역시절 근대사를 전공한 예비역 대령이라고 소개했다.

 

 백야 김좌진 장군 흉상, 중국은 한국인 독립지사 동상을 세우지 못하게 한다더군요.

 

기와를 얹은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서니까 백야의 흉상이 우리를 맞이했다. 정남향으로 대한민국을 향하고 있는 흉상 건너 들녘은 백야가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부근 조선족들에게 나눠주었던 농지라고 했다. 

 

하늘을 지붕 삼아 서 있는 한복 두루마기 차림의 흉상에서 굳센 기상과 위엄이 넘쳤다. 어둠 속에서 펄럭이는 태극기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주변 건물들 지붕은 기와 또는 초가였다. 한국인의 긍지를 보여주려고 애쓴 흔적이 엿보였다.

 

광장에 세워진 흉상을 중심으로 백야가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운영하다 설 대목이 코앞이었던 1930년 1월 24일 아침에 최후를 맞이한 정미소와 참모들과 전략을 짜던 팔로 회의실, 순국 전까지 생활하던 숙소 등을 재현해놓고 있었다.

 

 향을 피우는 박영희 시인(우측)과 인솔자 김두현(가운데), 김종해 총경리(좌측)

 

일행은 경건한 마음으로 제단에 향을 피우고 김 총경리와 함께 백야 장군과 순국선열을 위한 묵념을 올렸다. 김 총경리는 하얀 석고로 만들어져 있던 백야 흉상도 작년 7월 개관식을 앞두고서야 동으로 제작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MBC 대하사극 <주몽>에서 주몽 역할을 맡았던 탤런트 송일국과 그의 어머니 김을동 의원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면서 "특히 송일국은 자신의 출연료에서 상당액을 외증조부 되는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에 투자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김 총경리의 "흉상밖에 세우지 못했습니다"라는 설명에서 흉상 세우는데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중국 정부는 대규모 독립운동 관련 사업과 역사탐방을 예민하게 받아들인다고. 그래서 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했던 대한민국 국회의원 29명도 민간인 신분으로 방문했단다.

 

남북에서 인정받는 '양세붕 장군'

 

백야 장군 사후에 남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활발하게 펼쳤던 양세봉(1896-1934) 장군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조선족을 중심으로 '양세봉장군 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가 만들어져 장군의 항일 업적에 대해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35세(1931년)에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일본군, 또는 만주국군과 수십 차례의 전투를 치르면서 영웅으로 각인되었던 양세봉 장군은 1934년 9월 일본경찰 밀정의 계략에 빠져 대원들과 길림성(지린성) '소황구(小荒溝)'에서 일본군에 포위되어 치열한 전투 끝에 전사하였다.

 

민족주의 계통이었던 양 장군은 북한 김일성 주석이 가장 존경하는 항일투사여서 훗날 시신을 북한으로 옮겨 안장했으며, 남한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어 남북에서 동시에 인정받는 독립운동가라고.

 

백야가 순국한 정미소에서

 

 백야 장군이 최후를 맞이한 정미소. 백야 사진 앞에 비극의 현장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김종해 총경리의 설명을 듣는 일행들.

 

백야가 피살당한 정미소로 이동했다. 입구에는 좌우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좌측 안내판에는 1928년 10월 백야가 자택 서쪽에 '팔로 회의실'을 세웠고, 정해식, 이동호, 이달문, 김기석, 이덕수, 장사학, 김기철, 장기덕(한족총연합회 소속) 등 8명과 전술 등을 의논하던 장소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백야 김좌진 장군은 부근 농민들에게 편의제공과 '한족총연합회'의 자금난도 다소 해결하기 위한 취지하에 자택 앞에 있는 동청 철도회사 창고를 빌려 이 정미소를 세웠다. 처음에는 연자방아를 이용하다 1928년 여름 하얼빈에 가서 봉천(심양)산 목탄발동기 중고품을 구입해왔다. 서기 1930년 1월 24일 오전 9시경 이 정미소 앞에서 박상실의 흉탄에 서거하시었다." (정미소 앞 안내판에서)

 

재현해놓은 정미소는 평수가 그리 넓지 않았다. 시골의 농기구 창고 비슷한 정미소 오른쪽에는 곡식의 쭉정이를 골라내던 풍구가 놓여 있고, 중앙에는 비극의 장소임을 알리는 작은 표지석이 서 있었다.

 

표지석 우측에는 '白冶 金佐鎭 將軍 殉難地点'이 좌측엔 '순 국 장 소'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殉難地点'을 읽고 또 읽었다. 대한의 독립영웅이 순국한 장소를 알리는 안내문까지 중국식으로 표기해놓았기 때문이었다. 한자가 '주인공'이고, 한글이 '조연'처럼 느껴져 씁쓸했다. 다음은 김 총경리의 설명.

 

"당시 정미소 운영은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1920년대에 가장 많이 통용되던 게 만주국에서 발행되는 관첩과 일제의 엔화였습니다. 그러나 모두 일제 수탈의 도구였기 때문에 유통을 보호하고 완전한 자활을 위해 정미소를 운영하게 됩니다. 백야 장군 사후에 김종진 장군 등이 정미소를 계속 운영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김종진 장군도 이듬해(1931년) 해림시 역전에서 암살당합니다. 그 후로 북만주에서는 사실상 순수 민족주의 항일투쟁이 종말을 고하게 되지요."

 

 방앗간 구석에 외롭게 서 있는 지게. 백야의 혼이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벽에는 백야가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지고 다녔을 것으로 추측되는 지게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쓸쓸히 서 있는 지게는 80년 전 백야가 흉탄에 맞아 쓰러진 뼈아픈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능을 지키는 무석인(武石人)처럼. 

 

김 총경리는 백야가 41세의 나이로 피살당하자 교포는 물론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조문객이 참석하였고, 지역에서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렀다고 설명했다. 중국 사람들조차 '고려의 왕'이 죽었다며 애통해했다 한다.

 

백야가 별 연고도 없는 산시를 택한 이유

 

'청산리 전투'(1920년 10월)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부근 마을을 급습하여 무고한 양민 3천여 명을 학살하고 민가와 학교, 교회를 불태우는 등 만행(경신 대학살)을 저지른다. 그러자 백야는 산시로 피신하여 후일을 도모한다.

 

산시는 백야가 3-4년 머물면서 북만주 일대 동포들의 생활안정과 군자금 마련을 위해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다. 그럼 백야는 그 넓은 만주벌판에서 왜 별 연고도 없는 '산시'를 택했을까? 박영희 시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일제의 경신대학살 이후 백야는 둔전양병(屯田養兵)을 생각해냅니다. 낮에 일하고 밤에는 군사가 되어 생활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함이었지요. 두 번째는 인구 2만 5천의 작은 도시임에도 단둥, 대련까지 열차로 갈 수 있을 정도로 교통이 좋았고, 세 번째는 연길이나 용정과 달리 일제 감시가 미치지 않아 몸을 피하기 좋은 지역이었습니다." 

 

팔로들이 산시에 농지를 개간하면서 조선족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여 집단촌을 이루었으나 백야가 거주하는 몇 년은 일본군이 넘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백야가 피살되고 보름 후 쳐들어와 조선족을 보기 어려울 정도로 초토화했다고. 잔악한 일제에 벌을 내리지 않는 하늘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백야가 살았던 옛집과 팔로 회의실 등을 둘러보고 버스에 올라 곧바로 산시역으로 이동했다. 산시역에 잠시 들렀다가 숙소가 있는 목단강(牡丹江)에서 저녁을 먹기로 스케줄이 잡혀 있어서였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월 10일부터 17일까지 항일유적과 함께 하는 2011 겨울 만주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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