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어떤 갤러리에서 하는 사진 전시회에 구경을 갔었다. 유명한 사진가는 아니지만 오로지 나무만을 찍는 그의 노력과 뚝심 그리고 사진의 분위기가 좋아서 찾아갔는데 뜻박에 그 사진작가를 직접 보게 됐다.

전시회가 자기 인생에서 처음 가져보는 것이라고 말하는 나이 지긋한 중년의 남자는 그만 중간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진하디 진하게 느껴지는 한 사진가의 눈물. 그가 살아온 50여 년의 시간이 이 찰나의 예술속에 녹아드는 감동적인 순간이었고, 인간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 시간이었다.

영화 <블랙스완>은 가장 높은 수준의 완벽한 예술성을 구현하기 위해, 자신의 삶 뿐만 아니라 죽음까지도 바치려 하는 한 예술가의 비극을 그려내고 있다. 그 주인공은 잊기 힘든 영화 <레옹>에서 참으로 인상적인 아역 연기를 펼쳤던 '마틸다'의 나탈리 포트만. 굳이 주인공을 강조하는 건 그녀가 아름답고 완벽한 발레 연기를 추구하면서도 늘 무언가에, 혹은 어딘가에 갇힌 인물을 너무나도 잘 표현했다는 것 때문이다.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수도승처럼, 완벽한 예술을 위해 작디 작은 발레복에 몸을 끼워 맞추어 앙상하기 그지없게 된 주인공 니나의 애처로운 몸이 아직도 눈 앞에 생생하다. 성공과 완벽에 대한 혼돈에 찬 불안한 눈빛과 꿈을 이루려다 강박에 빠지고 만 니나의 슬픈 표정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을 향해 내달리는 현대인을, 아니 나를 보는 것 같아 불편하면서도 몰입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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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just want to be perfect.

나의 그림자는 우리 인간이 전향적인 면과 똑같은 만큼의 비뚤어진 면을 가진 존재이다. 우리가 선량하고 우수하며 완벽한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림자 쪽에서는 어둡고 비뚤어지고 파괴적으로 되려는 의지가 뚜렷해진다. 인간이 스스로의 용량을 뛰어넘어 완전해지고자 할 때, 내 그림자는 지옥으로 내려가 악마가 된다. 왜냐하면 이 자연계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 이상의 존재가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 이하의 존재가 된다는 것과 똑같은 만큼의 깊은 죄악이기 때문이다.
- 카를 융 ;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1875~1961)

"I just want to be perfect"  영화속 갓 20대 초반의 주인공 발레리나의 이 맹랑한 외침에 단장이자 발레 코치는 완벽함이란 컨트롤 (control) 할 수 있는 게 아닌 흘러가게 두는 것 (letting go) 이라고 말해준다. 완벽함에 대한 감독의 통찰과 철학이 담겨있는 대사다. 결국 주인공 니나는 죽음의 늪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홀로 속삭인다 "That was perfect"

우리나라의 옛 예술가들은 그들의 작품속에 실수라고 하기엔 이해할 수 없는 허술한 점을 꼭 남겼다고 한다. 일제 치하 또는 현대의 예술인들도 그런 점을 들어 한국인은 마무리가 치밀하지 못한 민족성을 가졌다라고 비하하기도 했다(70년대 나의 국민학교 시절 이 얘기를 선생님들한테 많이도 들었었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위의 '카를 융' 박사처럼 굳이 이론적으로 묘사하지 않아도 '완벽이라는 불경함'을 유전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완벽함을 위해 서서히 미쳐가는 주인공 니나의 모습이 악마로 변하는 장면은 마치 카프카의 '변신'을 보는 듯한 충격을 준다. 완벽주의는 일반인 사이에서는 어떤 정신적인 증세로 간주되지만 현대 예술가에게는 직업적인 일상이다.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정말 완벽해야만 진정한 예술을 할 수 있는걸까? 그런데 예술에 있어서 완벽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판단하고 인정하는 것일까.

비단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돈과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인생이 완벽해질 수 있다는 속삭임이 사방에서 특히 TV의 전 채널을 통해 들려온다. 한국의 수많은 니나들은 아름다운 외모를 위해 서슴없이 얼굴과 몸에 칼을 대고, 성공을 위해 성(SEX)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렇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불행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 나의 무능력으로 변질된다.

내 꿈은 정말 나의 꿈이 맞는가?

"당신이 누군지 아직 말 안 해줬어요." "난 댄서예요." "아니, 당신 이름 말이예요."

우연히 술집에서 어울리게 된 낯선 청년이 주인공 니나에게 묻는 장면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니나는 즉각 자신의 이름을 답으로 떠올리지 않는다. 그녀의 끝없는 결핍과 강박의 원천이 여기에 있는 듯하다. 급기야 상상과 꿈속의 자아를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을 파괴하는 사태가 온다.

원치 않은 임신으로 발레리나의 꿈을 접어야 했던 니나의 어머니는 딸이 자신과 같은 길을 걷기 원하지 않기에 딸의 외출을 막고, 심지어 딸을 찾아온 친구까지 문전박대한다. 자신의 꿈을 딸에게 과도하게 투사하여 딸 니나를 감시하고 목죈다. 마치 우리나라의 알파맘처럼.. 영화속에서 주인공은 오직 꿈을 이루기 위한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다른 무리속에 속하지 못하고 친구도 한 명 없어 보인다.

아직 초등학생인 어린 조카에게 네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국제 변호사'란다. 세상은 꿈과 야망을 가지라고 말한다. 그래야 그 꿈의 성공 가능성이 커진단다. 하지만 꿈을 꾸기 전에 꼭 명심해야할 말이 있다.

"내 꿈은 정말 나의 꿈이 맞는가?"

블랙 스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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