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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하동에 있는 쌍계사는 국보, 보물, 지방문화재 등 총 29점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고찰이다. 신라 성덕왕 21년인 722년에 대비와 삼법 두 화상이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다. 그 뒤 문성왕 2년인 840년에 진감선사가 퇴락한 삼법스님의 절터에, '옥천사'라는 가람을 중장하였고 후에 나라에서 '쌍계사' 라는 사명(寺名)을 내렸다.

 

그 뒤에는 벽암, 백암, 법훈, 만공, 용담, 고산스님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 절이다.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8번지에 자리한 쌍계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3교구의 본사로 '삼신산 쌍계사'라고 부른다. 이 쌍계사의 대웅전 동쪽 편에는 큰 암석이 놓여있는데, 그곳에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8호인 쌍계사 마애불이 조성되어 있다.

      

감실 안에 조성한 듯한 마애불

 

큼지막한 바위가 대웅전 한편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큰 암석의 한 면을 움푹 들어가게 파내고, 그 안에 불상을 돋을새김한 면도 새롭다. 흡사 감실과 같은 형태로 조성이 된 이 마애불은, 바위를 네모나게 파 들어가면서 불상을 돋을새김 한 특수한 조각기법을 쓰고 있다.

 

이 마애불은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을 높게 표현하였다. 귀는 어깨에 닿을 듯 느려졌으며, 눈은 실눈을 하고 있다. 코는 높지도 않고 평범한 모양이며, 입은 도톰하고 작게 조각을 하였다. 얼굴은 볼에 살이 올라 통통한 편이다. 얼굴은 둥근 편인데, 얼핏 보면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는 상이다.   

 

 

법의는 양편 어깨에서 가슴을 열고 흘러내렸으며, 어깨에 주름이 잡혀있어 일반적인 마애불에서 보이는 법의와는 다르다. 두 손은 배 앞에서 마주하고 있는데, 법의가 손을 가리고 있어 정확한 형태를 알기가 어렵다. 다만 두 손을 마주하고, 법의 안에서 무엇인가를 손 위에 올려놓은 듯한 형태로 보인다.

 

고려시대 마애불로 추정

 

법의는 선이 정확하지가 않다. 두 팔을 마주한 위로는 가슴 띠를 두른 듯하다. 옷 주름은 무릎부분에서 알 수가 있는데, 법의의 자락이 발을 덮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성기법 등에서 고려 때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마애불은 네모나게 파 들어간 안에 돋을새김을 하였는데, 앙 편에는 네모난 기둥처럼 각이 지게 조성을 하였다. 흡사 어느 전각 안에 들어가 좌선을 하는 형태로 보인다. 3월 2일 늦은 시간에 찾아간 쌍계사. 이 마애불 앞에 서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 도대체 왜 이렇게 마애불을 조성한 것일까? 마애불을 조각한 바위가 입상을 조각하기에는 작다, 하지만 꼭 이렇게 감실과 같은 기법을 이용한 까닭은 따로 있을 것만 같다.

 

 

부처님이라고요? 혹 스님은 아닐는지.

   

3월 초의 해는 길지가 않다. 해가 설핏 지려고 하는데, 저녁의 햇살이 마애불에 넘어가는 햇볕을 비춘다. 순간 마애불의 얼굴에 미소가 감도는 듯하다. 염화시중의 미소였을까? 점점 더 궁금해진다. 경남 지방의 마애불이나 석불에서 보는 법의나 얼굴 형태와는 다른 모습. 저 모습은 혹 스님을 조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별별 생각을 다 해본다. 어느 스님이 자신이 살아생전 영원히 부처님을 모시고 싶은 생각에, 이렇게 대웅전을 바라볼 수 있는 바위에 스스로를 조각해 놓은 것은 아니었을까? 마치 그 마애불의 모습이 작은 전각 안에서 대웅전의 부처님을 보고, 좌선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서산으로 해가지고 있는데도, 그 마애불 앞을 떠날 수가 없다. 아마도 이 마애불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이 앞에서 시간을 잊고 싶은 마음이다. 영원할 수가 없다면, 이렇게라도 부처님 곁을 지키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태그:#마애불, #쌍계사, #문화재자료, #하동, #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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