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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토공사가 완료된 곳에 지어진 미군 숙소 건물
▲ 내리 언덕에서 바라보이는 대추리 들판 성토공사가 완료된 곳에 지어진 미군 숙소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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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리 언덕에서 바라본 황새울
 함정리 언덕에서 바라본 황새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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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가을(大秋)'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2007년 3월, 935일 동안 매일마다 '우리 땅을 지키기 위한 촛불 행사'를 열었던 대추리 주민들은 미군기지 확장 공사를 막아내지 못하고 마을을 떠나야 했다. 제비 떼가 날아와 흙을 물어 나르며 집을 짓고, 마늘 싹이 파랗게 돋아나던 무렵이었다.

대추리를 떠나와 살게 된 '임시이주단지'인 팽성읍 송화리 포유 빌라에서 '대추리 사람들'은 3년을 넘게 살았다. 그곳에서도 땅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손은 쉬지 않았다.

더 이상 큰 가을은 아니지만... 부지런한 대추리 사람들

미군 임대를 목적으로 지어진 빌라 곳곳에 작은 텃밭들이 생겨났다. 주민들은 화분마다 고추와 상추를 심고, 잔디밭 귀퉁이에 대파를 심었다. 공터에는 비닐하우스를 세워 버섯을 키웠다. 대추리 언덕에서 자라던 가장 키가 큰 포플러 나무를 미리 잘라서 옮겨둔 덕분에 그 나무에 버섯 종균을 심을 수 있었다. 비닐하우스에서 수확한 버섯을 주민들은 나눠 먹었다.

아무도 농사짓지 않는 수렁논을 빌려 주민들은 다 같이 벼농사를 지었다. 가을에는 허벅지까지 빠지는 논에서 낫으로 벼를 벴고, 수확한 쌀은 노인정에서 함께 나눠 먹었다. 밭을 빌려 공동으로 배추를 심어 그해 김장을 담갔다. 억척스레 일만 알고 살아온 농사꾼에게 하루하루는 너무도 길었다. 주민들은 공공근로를 다니면서 도로변에 버려진 쓰레기를 치우고, 잡초를 뽑았다. 언제 집을 지어 나갈 수 있을지 불안한 나날이었다.

그리고 2010년 가을, 팽성읍 노와리 이주단지.

마늘을 심는 방효태 할아버지
 마늘을 심는 방효태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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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효태(74) 할아버지는 20년 전에 산 자전거를 끌며 집을 나선다. 자전거 앞 바구니에는 마늘을 싣고, 짐칸에 커다란 대빗자루를 묶어 밭으로 간다. 이주단지 입주 가구 당 100평씩 텃밭을 살 수 있었고, 비로소 할아버지에게도 농사지을 '내 땅'이 생겼다. 할아버지는 올해 마늘 15접을 심는다고 했다.

"대추리 살 때, 논에 철조망이 쳐지면서 마늘 심었던 거 하나도 못 캤지. 이듬해 대추리 나오면서 또 마늘 농사 못 짓고. 마늘 농사는 작년부터 지었어. 아이들한테 보내주려고 많이 심었지."

두둑을 지어 미리 비닐을 씌운 자리에 마늘 한 쪽 씩을 박아 넣는다. 비닐 구멍 하나에 마늘 하나, 그렇게 심어서 내년 여름이 오면 그 자리에 마늘 한 통이 맺힌다. 대추리를 떠나기 전, 할아버지는 마늘밭에 덮인 짚을 걷어내고 지난 가을 심었던 마늘을 모두 캐냈다고 했다. 이사를 하고 나면 다시 마을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제 막 하얗게 뿌리가 자라난 마늘을 뽑아서 뿌리를 자르고 먹을 수 있도록 모두 빻았다. 밭에 심었던 마늘은 그렇게 할아버지와 함께 떠나왔다.

"일 끊어지면 우리 살려내라고 데모할겨"

노영희 할머니
 노영희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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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공공근로를 마친 노영희(73) 할머니 댁. 조립식으로 지어진 작고 노란 집이다. 양지바른 마당에는 씨앗이 빼곡하게 박힌 해바라기와 메주콩, 호박고지가 볕을 쬐고 있었다. 할머니는 김장 때 쓸 홍고추를 자르며 말했다.

"대추리 살 땐 가을에 할아버지랑 벼이삭 주운 것만 몇 가마가 됐어. 텃밭에 채소도 심고 감나무, 은행나무, 밤나무도 있었어. 뭐든 내가 심어서 먹다가 나오고 나니 전부 팔아서 먹어야 혀. 공공근로 안하면 할 게 없어. 일 끊어지면 우리들 살려내라고 시청 가서 데모해야혀."

이주단지에 입주한 가구 대부분은 연세가 많은 노인 분들이다. 더 이상 힘든 일을 하기 어려워 생계비 걱정이 크다. 공공근로를 나가서 버는 한 달에 90만 원 남짓한 수입이 시골에서는 적지 않은 돈이다. 대추리에서 '끝집 할머니'로 불리던 최양례(73) 할머니는 시름이 더욱 깊었다. 허리디스크를 오래 앓아온 할머니는 새로 지은 집에서 혼자 사신다.

"집터 107평 보상받아서 여기 와서 땅을 사고 나니 돈이 없어. 집도 아들이 지어 준 거야. 나는 돈 없어. '내 집은 있구나' 고거 한 가지뿐이지. 공공근로도 내년이면 끝나는데, 나이 찼다고 떼버리면 뭐 먹고 살라는 겨. 없는 사람은 맨 한 가지여."

할머니는 올해 공공근로마저 11월에 끝나고, 내년 2월부터 다시 일이 시작된다고 했다. 공공근로를 하는 짬짬이 텃밭을 일궈 김장 배추와 무, 고추를 심어 키웠고 며칠 전에는 마늘도 심었지만, 걸음걸이가 불편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다.

"여긴 차편이 불편하니 병원도 자주 못 가. 공공근로 없는 날, 토요일에 병원 가서 일주일에 한번 치료 받고 오구. 원정리에다 새로 보건소 잘 지어놨어. 대추리가 없어지니까 대추리에 있던 보건소를 원정리에 지은 겨. 보건소는 혈압 약 타러 한 달에 한 번 가. 허리랑 다리 아파서 가면 소장님이 주사도 놔주고 약도 줘."

"내 꿈이 백섬지기였는데 이젠..."

이태헌 작업 반장의 논에서 추수를 하고 있다.
▲ 벼베기 작업 마지막 날 이태헌 작업 반장의 논에서 추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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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단지 입주 가구 중에서 벼농사를 짓는 가구는 다섯 집뿐이다. 지난 10월 28일, 이태헌 아저씨 네 논을 마지막으로 벼베기 작업이 끝났다. 평택 노와리에서 두 시간 거리인 충남 서산에서 벼농사를 짓는 신종원 이장에 따르면 올해 벼 수확은 지난해 보다 15% 정도가 줄었다고 한다. 대추리에서 '지킴이 영농학교' 일일 강사로도 활동했던 송재국 할아버지도 지금은 벼농사를 짓지 않는다.

"여기 와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이유가 있어. 금리적인 계산이 맞아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데, 보상 받은 돈으로는 농사짓던 땅의 반밖에 살 수 없어. 대추리에서는 친구네 아들들이 기계로 농사짓는 김에 다른 부락보다 돈을 적게 받으면서 농사를 다 지어줬어. 젊은 사람들은 힘이 있으니, 논 사서 차 몰고 가서 농사짓고 살 수 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어려워. 이렇게 같이 한 마을로 오지 않고 다들 뿔뿔이 흩어졌다면 싼 논 찾아서 그쪽으로 이사했겠지. 그런데 나이 들어서 흩어지긴 싫고, 모여서 살고 싶으니까……."

송재국 할아버지는 "백섬지기가 꿈이었는데 그 꿈을 이뤄준 땅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농사짓던 사람이니까, 새벽 네 시면 잠이 깬다고. 그러면 옛날에 논에 가던 생각도 나고, 고생하고 피 흘리며 싸우던 생각도 나고, 옛날 생각밖에 안 나. 친구들하고 모이면 '우리가 살겠냐, 미국 놈들 쫓아내야 살지' 그래. 이런 게 다 전쟁의 여파지. 옛날 전쟁 시절엔 내가 살던 땅도 보상도 못 받고 내줬어, 기지 만든다고. 전쟁은 안 되는 일이야."

송재국 할아버지는 이제 꿈에서만 옛 논을 갈 수 있다. '대추리 사람들'의 마을은 흙속에 묻혔다. '큰 가을'도 묻혔다. 미군기지 공사가 한창인 도두리 벌에는 '대추리'에서 옮겨왔다는 소나무 여남은 그루가 서있을 뿐이다. 천연기념물 솔부엉이 서식처라는 그곳에 더 이상 솔부엉이는 날아들지 않는다.

대추리 마을이 없어지면서 "천연기념물 솔부엉이" 서식지도 옮겨졌다.
 대추리 마을이 없어지면서 "천연기념물 솔부엉이" 서식지도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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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대추리 사람들, #미군기지, #솔부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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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투쟁을 알리기 위해 가입했습니다. 평택 팽성읍 대추리와 도두리 주민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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