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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라는 책을 통해 우리나라에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이끄는 베네수엘라의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을 알렸다. 이 책에는 베네수엘라 혁명 과정과 지도자 차베스의 투쟁 과정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하지만 항상 뭔가 아쉬웠다. 지도자 차베스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기층에서 활동하는 베네수엘라의 숨겨진 혁명가들의 목소리를 전하고 싶었던 게다.

최근 필자는 <베네수엘라 스픽스(VENEZUELA SPEAKS!)>라는 책의 번역출간을 준비 중이다. 이 책에는 베네수엘라 풀뿌리 활동가들의 생생한 인터뷰가 담겨 있다. 번역한 내용들 중 일부를 소개한다. 베네수엘라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의 생생한 속살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기자 말

알바 카로시오, 여성연구센터(카라카스)

알바 카로시오의 책꽂이는 콜론타이, 밀렛, 파이어스톤 등 급진적 여성주의자의 인명록처럼 보인다. 알바는 1970년대에 일어난 초기 베네수엘라 여성주의 운동에 이들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알바는 과거에 붙잡혀있지 않다.

알바는 베네수엘라중앙대학(Universidad Central de Venezuela)의 여성연구센터(CEM - Centro de Estudios de la Mujer)의 공동설립자이자 소장이다. 1992년에 센터가 설립됐을 때, 베네수엘라에서 그런 기관이 없었다. CEM은 단순한 연구센터역할만이 아니라 1999년에 제헌의회 기간, 그리고 차베스 집권 내내 여성운동 관련 의제를 밀고 나가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는 상황을 바꾸기 위해 연구합니다.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한 우리는 계속 연구할 겁니다." 그녀는 말한다.

베네수엘라 여성연구센터의 알바 카로시오 소장
 베네수엘라 여성연구센터의 알바 카로시오 소장
ⓒ PM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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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M의 제안으로 1999년 베네수엘라 헌법의 88조는 가사노동이 경제활동이며 주부들이 사회보장혜택을 받을 자격을 있음을 인정한다. 베네수엘라 헌법에서는 또한 성중립 언어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예컨대 모든 사람을 언급할 때 남성형과 여성형으로 동시에 사용하도록 한다. 새 헌법이 통과되자마자 차베스 대통령은 여성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국가정책을 조정하고 집행하는 국가여성원(Inamujer - Instituo Nacional de la Mujer) 설립을 지시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계속해서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조치들을 취해 나갔다. 해묵은 베네수엘라 여성의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1년 국제 여성의 날에 여성개발은행(Banmujer - Banco de Desarrollo de la Mujer)을 설립했다. 여성개발은행은 사회개발은행으로서 낮은 이자로 소액신용대출을 하고 여성들이 노동자 소유 협동조합을 만드는 것을 지원하고 교육한다. 2009년 현재 여성개발은행을 통해 지원 받은 인원은 이백만 명이 넘으며 십만 건이 넘는 대출을 제공했고 전국적으로 44만619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5년 뒤 헌법 88조에 따라 정부가 미션 마드레스 델 바리오 (빈민가의 어머니 작전)에 착수해서 베네수엘라 빈민가 어머니들이 가난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다.

이런 움직임은 계속되어 2007년에 여성폭력에 관한 새 법이 통과되고 전국에 여성폭력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법원이 설립되었다. 2008년 3월, 차베스 대통령은 국가여성원을 여성부로 확대했고, 이어서 2009년에 여성부는 여성과 성평등을 위한 인민권력부로 되었다. 이러한 발전도 있었지만 여성은 여전히 매일매일 가정과 거리, 그리고 직장에서 차별에 직면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중앙대학에 있는 알바의 사무실은 정부 정책이 목표로 삼는 빈민가의 여성들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녀는 과거와 미래, 독재와 민주주의, 학문과 실천, 여성주의 기원과 현재라는 독특한 갈림길에 있다.

알바는 흥분에 가득차서 베네수엘라에서 여성들이 이룩한 진보에 대해 얘기했다. 지금에 오기까지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는지를 생각하며. 하지만 진정한 정치적 문화적 변화는 느리게 진행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내 차분해졌다.

알바 카로이소와의 인터뷰

삶과 여성운동

제 이름은 알바 카로이소입니다. 1970년대 이래로 베네수엘라 여성운동의 일원이지요. 당시 남미원추지대(역주 - 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칠레로 이루어지는 남미의 원뿔 모양 지역)를 휩쓴 독재 시절에 아르헨티나에서 베네수엘라로 이주했습니다. 마라카이보로 가서 줄리아 대학에 있는 마라카이보 여성주의연합이라는 조직에 가입했습니다. 그 조직은 지금도 있어요. 그때가 1975년이었죠. 그리고 1982년에 나는 마라카이보 여성의집 설립에 참여했습니다. 베네수엘라 최초의 여성의집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없어졌어요.

70년대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당시의 부당한 경험들을 때문에 좌파 운동이 들풀처럼 일어났어요. 잘 알다시피 라틴아메리카는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이 심한 곳이지요. 이 운동들은 부분적으로는 쿠바 혁명과 해방 사상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60년대 7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분위기가 그랬어요. 전 세계적으로 그런 분위기였죠. 당시 미국에서도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이 있었고 평등과 평화를 추구하는 다른 운동들이 있었으니까요. 이런 식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이전에는 억눌렸던 좌파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좌파 운동에서 활동가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여성에 대한 분명한 차별이 존재합니다. 요즘에도 혁명이 일어나면 여성 차별이 사라진다고 대부분 믿고들 있어요. 하지만 결국 그런 식의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고, 바로 이 혁명운동 안에서도 많은 여성들이 심한 압박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운동에서 많은 남자들은 그저 광신적일 뿐이에요. 예를 들어서 육아에 대한 책임은 완전히 여자의 몫입니다. 이런 일은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일어나죠. 그래서 70년대 중반쯤부터 우리 내부를 돌아보기 위해 그룹을 이뤄 뭉쳤습니다.

여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자문하기 시작했죠. 남자와 구분해서 우리 스스로를 조직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 또 하나의 중요한 투쟁인가? 아니면 이 운동은 존재 이유가 없으며 우리는 단순히 보편적인 해방을 위한 투쟁에 참여하고 여성을 위한 투쟁은 잊어야 하는가? 당시 몇몇 사람들이 얘기하던 것처럼 우리는 반혁명 분자인가? 그래서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성찰하기 시작했어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양한 저작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사회주의 안에서 여성해방을 주장했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글이나 플로라 트리스탄, 그리고 유명한 책인 <성(性) 정치학>을 쓴 케이트 밀렛의 글들 말이죠. 그리고 여성주의와 혁명에 대해 얘기했던 슐라미스 파이어스톤도 역시. 우리는 이 모두를 우리 현실의 맥락 속에서 토론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는 이곳 베네수엘라에서 운동을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경험이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펴져 나갔습니다. 물론 나라마다 차이는 있죠. 어떤 나라들은 아직도 지독한 독재로 고통 받고 있으니까요. 근래에 우리는 칠레의 여성주의자 훌리에타 키르크우드 같은 라틴아메리카 사람의 저작에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훌리에타 키르크우드는 "거리의 민주주의, 집안의 민주주의, 침실의 민주주의"라는 말을 만들었죠. 이 말은 보편적인 해방투쟁과 동시에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일국 차원, 혹은 국제적 차원의 혁명을 통해 자동적으로 여성해방 또한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우리 여성의 투쟁을 유보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여성운동은 자연스럽게 대학에서 강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어요. 많은 여성들이 학생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으니까요. 좌파 정당 소속 여성들도 같은 고민을 공유하기 시작했죠. 오로지 여성주의 운동만 해온 여성들이 좌파 정당의 여성들뿐만 아니라 민주행동당(Acción Democrática)이나 COPEI(기독민주당)같은 집권당의 여성들과도 뭉치기 시작했습니다.

민법 개정

우리 모두를 뭉치게 한 첫 번째 큰 전투는 1982년의 민법 개정이었어요. 그때까지 베네수엘라에서는 남녀 간에 양육권을 분담하지 않았습니다. 사생아는 차별 대우를 받았죠. 물론 그런 차별 대우는 올바르지 않은 것입니다. 사생아는 아버지의 성을 쓰지 못하고 아버지로부터 어떤 유산이나 재정적 지원도 요구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 측에서는 사정이 완전 달랐어요. 자신이 낳은 애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아이에 대한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부과되었습니다. 이전에 결혼 제도 하에서 여자가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가지지 못했고, 그래서 부부간의 권리(Conjugal rights)도 남녀가 평등하게 공유하지 못했습니다. 결혼이라는 것이 베네수엘라 여성에게는 권리가 아니었습니다.

베네수엘라 국회에서 열린 법안 공청회에 참석한 여성들
 베네수엘라 국회에서 열린 법안 공청회에 참석한 여성들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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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여성주의' 운동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여성' 운동이 이 이슈를 중심으로 뭉쳤습니다. 이것을 말한 이유는 70년대나 80년대에는 많은 여성들이 여전히 스스로를 여성주의자라고 부르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좌익 쪽 여성들이든 우익 쪽 여성들이든 여성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안 좋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좌익 쪽 여성들은 우리를 분열주의자라고 비난했습니다. 우익 쪽 여성들은 우리를 미친 레즈비언이라고 불렀고요. 우리의 신념이 너무 유토피아적이라고 하더군요. 여자는 그저 집안일을 잘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많은 여성들이 여성의 권리를 위해 투쟁할 때도 여성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런 분위기가 좀 있긴 하지만 당시에는 대다수가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스스로를 여성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조금 조금씩 뭉치기 시작했고 좌파 쪽의 여성들을 이해시켰습니다. 당연히 여성주의는 우파보다는 좌파와 공통점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그 해방적 성격과 진정한 사회변화와 해방에 대한 헌신 때문이지요. 이것이 우리가 전략적으로 연합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자로서 우리 모두는 동일한 억압적 상황에 놓여있으니까요. 그래서 이 순간 우리는 혁명에 대해서 말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생각조차 안 하는 여성들과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

사실 민법 개정은 COPEI(역자 - 베네수엘라의 양대 보수 정당 중 하나, 우리나라의 한나라당과 비슷하다) 출신의 여성 장관 메르세데스 풀리도 데 브리세뇨(Mercedes Pulido de Briceño)가 제기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문제제기였기 때문에 우리도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참여한 다른 이유는, 여성주의가 사회적인 투쟁과정에서 가지게 된 신념 때문입니다. '상황이 완벽하게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상황은 점진적으로 개선되는 것이다' '사회 정의는 점진적으로 얻어진다' 이런 신념들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COPEI 정당 출신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사생아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는 것에 우리가 함께 하지 않을 수는 없잖아요? 여성주의자만이 아이들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여성연구센터 창립

당시 모든 그룹들이 계속 뭉쳐서 여성운동을 밀고 나가기 위해 다양한 제안을 하고 단체들을 설립했습니다. 예를 들어 여성NGO연합(CONG - Coordinadora de Organizaciones No-Gubernamentales de Mujeres)이 있었는데요. 그 조직을 만들어서 우리는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국제여성회의에 참석했습니다. 당시에 여성 문제를 다루는 많은 부서들이 생겼다가 사라지곤 했죠. 물론 예산도 아주 적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극을 주고 여성들의 투쟁에 헌신하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렇게 발전해 나가면서 1992년에 카라카스에 있는 베네수엘라중앙대학에 CEM이 설립되었습니다. 대학이라는 곳은 언제나 여성들이 들어가서 의문을 품게 되는 그런 곳이었죠. 여성들이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가질 수 있고 사상을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공부를 하면서 심각한 차별에 대해서 알게 되기 때문이죠. 우리가 열심히 공부해서, 그 중에는 종종 남자보다 더 잘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그래서 직업을 얻고 취업시장에 들어가게 되면 여성에 대한 차별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1992년에 여성 그룹들이 힘을 모아서 당시에 베네수엘라 최초로 여성문제에 집중해서 학문적 연구를 수행할 센터를 만들었습니다. 초대 소장은 마리아 델 마르 알바레즈 데 로베라(María del Mar Álvarez de Lovera)였는데 사회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어요, 항상 여성문제 관련 연구를 했습니다. 그녀는 확실히 좌파는 아니었어요. 그래도 여성의 투쟁에 대한 도덕적 윤리적 헌신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안데스 대학, 줄리아 대학, 바르끼시메토 지역의 리산드로 알바라도 대학 같은 곳에서 비슷한 제안들이 나오고 있었고요, 그래서 서로 관계를 맺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연구센터라는 측면에서 우리는 여성 문제와 여성의 투쟁에 대한 연구의 기준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네수엘라 여성의 상황에 대한 주요한 연구와 분석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연구 외에도 우리는 수업을 진행하고 여성 문제에 맞춰진 학부 과정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역 공동체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지역의 여성폭력 문제를 다룬다든지 말이죠. 우리 연구센터는 연구와 실천에서 헌신적으로 일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상황을 바꾸기 위해 연구합니다.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한 우리는 계속 연구할 겁니다. 이론과 실천의 영원한 변증법이죠.

헌법

1999년에 새로운 헌법을 만들기 위해 제헌의회가 열렸을 때 CEM의 제안이 많이 반영되었습니다. 헌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성 차이를 배려한 언어를 사용하도록 한 최초의 헌법입니다. 그 외에도 성적 권리와 생식권(sexual and reproductive rights)이 헌법에 포함되었습니다. 아이를 얼마나 낳을지 결정할 권리도 있죠. 양성 평등도 보장하고 있고요. 여성 우대 정책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역사적으로 차별을 당한 여성들에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치도 고려하고 있고요. 여성 우대 정책은 역사적으로 여성들에게 가해진 피해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죠. 헌법은 여성들의 가사노동이 사회적 경제적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은 CEM과 관련된 교수들, 그러니까 현재 가족-여성-청소년 위원회의 의장인 마렐리스 페레즈(Marelis Pérez)나 CEM의 소장을 역임했고 지금은 여성개발은행의 은행장인 노라 카스타네다(Nora Castañeda) 같은 분들이 제헌의회에 제안했습니다.

그때 이후로 CEM은 여성과 관련된 모든 일에서 계속 기여를 해왔고 지난 10년간 크게 성장했습니다. 일 자체도 중요하지만 일을 해나가는 방식도 중요합니다. 21세가 사회주의가 완전한 해방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해방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해 나가는 방식이라든지 관계를 형성해나가는 방식 말이죠. 여전히 갈 길이 멉니다. 하지만 여성주의적 사상, 그리고 그런 사상이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여성에 대한 우대 조치

헌법에 담긴 이런 사상들은 계속 개선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성의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를 평가하는 문제의 경우, 육아노동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육아노동에 관한 문제는 항상 여성주의의 개념이었습니다. 왜냐면 그것이 여성 억압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육아가 전적으로 여성의 책임이 될 경우 그 결과로 여성주의 저자들이 '가부장적 배당(patriarchal dividend)'이라고 부르는 것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가부장적 제도에 의해서 발생하는(역주 - 남성들이 얻는) 이익인데요.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사노동이나 육아노동을 전적으로 책임지면서 쏟는 힘과 에너지로부터 발생하는 이득입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사회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죠.

여성 우대 정책에서 사용하고 있는 소수 집단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이라는 개념은 어떤 사회 집단이 역사적으로 (일반적으로 사상적 이유로) 시련을 겪은 점을 이해하는 데에 기원이 있습니다. 소수 집단 우대정책은 처음에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Americans)을 위해 고안됐습니다. 소수 집단 우대정책이라는 개념은, 부정적인 차별이 존재하는 곳에 일시적으로 긍정적인 차별이나 조치를 도입해서 역사적으로 차별 당했던 집단에게 더 많은 혜택을 제공한다는 개념입니다. 예컨대 선주민(토착민)에게는 분명 이런 방식 혜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여성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성들은 수세기 동안 가부장제로 고통 받았습니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에 상관없이 수많은 일들을 짊어지어야 했으며 행동에도 많은 제약이 있었지요.

미션 마드레스 델 바리오 (빈민가의 어머니 작전)

미션 마드레스 델 바리오의 아이디어는 다음과 같은 상황을 이해하는 데서 나왔습니다. 여기 베네수엘라에서는 빈곤층의 70%가 여성이며 빈곤 가정의 다수는 여성이 가장입니다. 사실 아이를 혼자서 키워야 하는 상황은 여성을 가난으로 몰아넣는 가장 큰 요인입니다. 최근에는 좀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무책임한 아버지들이 많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부부가 육아를 분담하기 보다는 여자가 전적으로 육아를 책임지고 아버지는 책임을 회피하는 사회문화적 분위기가 강합니다. 빈곤층 여성이 혼자서 아이를 키우면 가난의 악순환에 빠집니다. 혼자서 아이 둘 셋을 키우면 일하고 돈을 벌기 힘들어지니까요. 그래서 미션 마드레스 델 바리오는 가난의 정도가 가장 심한 빈민가의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사업입니다. 일정 기간 동안 여성들에게 최소생활비를 지원해줍니다. 그래서 육아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구직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래서 미션 마드레스 델 바리오는 가난과 맞서 싸우는 사업이기도 하면서 성인지적 관점(gender perspective)의 사업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빈곤층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사람들이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업은 여성들이 경험한 역사적 개인적 좌절을 참작해서 여성주의 관점으로 가난과 맞서 싸운다는 측면에서 두 개의 희망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베네수엘라 무상교육 프로그램인 미션 로빈슨의 여성 활동가들
 베네수엘라 무상교육 프로그램인 미션 로빈슨의 여성 활동가들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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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베네수엘라는 청소년 미혼모의 비율이 매우 높아요. 이들에게는 자신의 삶과 미래에 큰 제약이 따릅니다. 이들은 대부분의 경우 교육받지 못한 경우가 많죠. 예전에는 임신한 학생들이 학교에서 쫓겨났지만 지금은 쫓아내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렇더라도 아이를 가지게 되면 공부를 계속하는 데에 큰 제약이 따릅니다.

미션 마드레스 델 바리오에 등록된 여성들에게는 직업훈련 기회가 제공되고 성적 권리와 생식권(sexual and reproductive rights)에 대한 교육이 제공됩니다. 또한 그들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사려 깊고 정확한 판단을 하게 되고 가난의 악순환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200,000명의 여성이 이 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낮은 비율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성개발은행이나 여성과 성평등을 위한 인민권력부 같은 기구들과 함께 다양한 전선에서 여성과 가난의 문제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성 평형(Gender Parity) 법률

성 평형(Gender Parity)은 사회의 절반은 남자고 절반은 여자이기 때문에 사회적 결정도 남녀의 의견이 절반씩 반영돼야 한다는 아이디어입니다. 이를테면 국회의원의 18%만이 여성이라면 명백하게 부당한 상황이라는 얘기죠. 정치활동의 측면에서 보면, 60년대 70년대에 그랬듯이 여성들은 언제나 기층에서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권력 있는 자리에서는 배제됐죠. 지금도 몇몇 공동체평의회에서 이런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 평형은 일종의 소수 집단 우대정책입니다. 이를 통해 모든 정치적 의사결정 공간에서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숫자로 구성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성 평형을 보통 선거를 치루는 모든 직위에 요구하고 있으며 국영회사의 이사진 구성뿐만 아니라 민간회사의 이사진 구성에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은 현재 의회 내의 가족-여성-청소년 위원회에서 논의 중인 성 공평과 평등에 관한 기본법(the Organic Law for Gender Equity and Equality)에 담겨 있습니다. 물론 이 법을 승인하는 사람들의 다수가 남자인데 이 법이 통과되면 이후에 의원직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통과가 쉽지는 않습니다. 이 법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성이 권력 있는 자리에 오를 기회가 그만큼 늦춰지기 때문입니다.

국가선거관리위원회(CNE)는 지난 2008년 11월 23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시의회의 후보자 명부가 남녀 동수가 돼야 한다는 행정명령을 밀어붙였습니다. 그래서 지역 차원에서 여성의 참여가 많이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그 선거에 한해서 CNE가 내린 행정명령입니다. 우리는 매 선거마다 이런 요구를 얻어내기 위해 싸워야 할 필요가 없도록 관련법을 제정하는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평등한 상황이 돼서 관련법이 필요 없어질 때까지는 계속 모든 선거를 이렇게 치러야 합니다.

차베스 대통령의 당, 그러니까 통합사회주의당(PSUV)은 베네수엘라서 유일하게 성 평형을 실시하기 위해 노력하는 정당입니다. 아직 PSUV의 당규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으며 실제로 차베스 대통령이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물론 완전한 평형은 아니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것에 매우 가깝습니다. 그리고 다른 정당들에게 모델이 되기 때문에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성과 볼리바리안 혁명

여성주의 운동의 철학은 정부 정책을 통해 퍼져나가서 지금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사실, 그러니까 진정한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여성 해방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정부 안에 여전히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이 많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확실히 우리는 엄청나게 전진했습니다. 우선 사상적으로나 대중들의 인식에서 보면, 예를 들어서, 대통령이 스스로를 여성주의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엄청난 일이지요. 물론 대통령이 실제로는 완전한 여성주의자는 아니라고 지적하면서 대통령을 비판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대통령이 그렇게 선언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면에서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졌지요. 1970년대에는 여성주의가 된다는 것의 최악 중의 최악이었지만 지금은 대통령이 "여성주의자가 아닌 사회주의자는 품이 좁다."고 선언할 정도입니다. 엄청난 차이가 있지요. 이런 성과는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는 분들에게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또한 대통령과 베네수엘라의 모든 변혁운동은 여성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여성은 모든 과정에서 참여하고 있으며 여성 참여의 중요성을 언급하지 않는 연설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몇몇 여성주의 사고방식은 이미 상식이 되었습니다. 여성해방운동은 비옥한 토지 위에 있습니다. 엄청난 가능성이 있지요.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가 있어요. 풀어내기 무척 힘든 문제인데, 현재 여성들이 더욱 활발하게 운동에 참여하고 있지만, 종종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이익과는 무관한 사회활동들에만 시간을 쏟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요구를 잊거나 미루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일화를 하나 들려드리죠. 예전에 성 문제 전문가로서 지방의회의 정책수립에 관한 워크숍에 참여했는데요. 의료문제에 관한 주제로 얘기하고 있었는데 함께 참여한 여성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모르더군요. 임신한 여자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 명백합니다. 지방의 많은 곳에서는 여성들이 정상적으로 애를 낳으려면 긴 거리를 이동해야 합니다. 이 문제는 진짜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인데 공동체 차원에서 이런 문제를 제기하면 전체 차원의 의료문제에 대한 관념적인 얘기만 하다가 이런 문제는 뒤로 밀려 버립니다. 여전히 여성이 자신들의 권리와 요구를 주장해야한다는 진정한 성 의식이 매우 부족합니다.

여성폭력

여성폭력 문제는 중요한 성과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여성폭력관련 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성폭력문제를 전담하는 법원을 설립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전통적 문화적 사상적인 믿음을 법정까지 끌고 가는 판사들이 있습니다. 어떤 판사는 범인이 취했다는 이유로 폭력을 정당화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취하면 남을 때려도 되나요? 취했다고 무죄라니요!

여전히 이런 일들이 많습니다. 물론 폭력의 피해자들에게 더 많은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서 할 일도 많고요. 예방도 중요합니다. 단순히 처벌하는 것보다 이런 일이 계속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사회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현실을 관찰할 때 성 문제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어요. 예를 들어서 우리는 폭력 피해자, 그러니까 경찰 폭력도 포함해서요, 폭력 피해자 가족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가족'이라는 단어는 완곡한 표현일 뿐입니다. 사실은 '가족'이 아니라 '여성'이에요. 교도소 수감자 가족에 대해서 얘기할 때도 사실 수감자의 95%는 남자인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면 '가족'이란 사실 수감자의 엄마나 여자 친구, 혹은 부인, 그러니까 즉 '여성'이죠.

여성운동의 미래

시급히 다뤄야 할 문제들이 여전히 많이 있습니다. 우선 빈곤과 성 사이의 관련성을 다루고 토론해야 합니다. 빈곤 퇴치를 위해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죠. 성적 권리와 생식권에 대해서도 여전히 할 일이 많습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여전히 낙태를 하면 처벌받습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여성주의 문제입니다. 처벌이 두려워서 자신의 신체에 대해 결정을 내릴 수 없다면 진정한 자립을 선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원치 않는 임신을 예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임신한 여성에게 더 많은 관심과 배려를 쏟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곧 중요한 과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성평등 개념을 공교육에 도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성이 자신 스스로를 억누르게 만드는 사회문화적 지배모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남자아이들은 자라면서 보통 지배하고 군림하기 위해 세상에 존재한다고 배우는데 여자아이들은 결정을 할 때 항상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배웁니다.

아무튼 완전히 다른 두 개의 교육이 있습니다. 이런 교육은 세상에 대한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상(想)을 제공합니다. 이런 문화에는 끊임없이 저항해야 합니다. 왜냐면 수세기동안 이어져 온 가부장제가 10년 안에 극복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엄청난 가능성의 문을 열었습니다. 여성주의와 사회주는 전보다 더 많은 부분에서 공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갈 길이 멉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월간 <민족21>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베네수엘라, #여성주의, #페미니즘, #사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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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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