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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기행 셋째 날(8.14)은 새벽 5시에 일어났다. 깊이 잠들어서인지 머리가 맑고, 몸도 가벼웠다. 온종일 멀미약을 붙이고 다녔던 아내도 컨디션이 좋다고 했다. 온종일 버스를 타야 하는데 다행이었다. 몸을 씻고 나와서 체크아웃을 하고 식권을 받아 식당으로 향했다.

텔 식당 뷔페식 아침식사. 전통 중국음식 같았습니다. 목이버섯 요리와 만두, 조 죽 맛은 지금도 뒷맛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텔 식당 뷔페식 아침식사. 전통 중국음식 같았습니다. 목이버섯 요리와 만두, 조 죽 맛은 지금도 뒷맛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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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는 뷔페식이었다. 반찬 종류는 한국과 비교할 수 없지만, 나무껍질 위에서 야생으로 자란다는 목이버섯 무침은 별미였다. 특히 다진 고기가 들어간 만두와 담백한 조(좁쌀) 죽은 음식궁합이 환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솔자는 연길에서 백두산까지는 4시간 넘게 걸린다며 식사가 끝나면 곧장 짐을 챙겨 호텔 앞에 모여 달라고 당부했다. 차를 마시며 환담할 여유도 없이 방으로 돌아가 가방을 가지고 나오니까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연길(옌지)에서 백두산 가는 길

전날 타고 다닌 버스는 팔걸이가 떨어져 불편했는데 새 차라서 좋았다. 버스가 출발하는데 시계를 보니까 8시였다. 인솔자는 백두산 천지를 둘러보고 하늘나라의 첫 동네로 불리는 '이도백하'에서 1박할 것이라고 일정을 설명했다.

출근 시간이어서인지 연길의 아침은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바쁘게 움직였다. 연변자치주만 해도 3백여 개의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어 취직이 잘 된단다. 버스는 조선족이 다니는 조양소학교를 지나 도심을 벗어났다.

용정이 가까워지니까 세전벌이 펼쳐졌다. 8월 중순인데 벼들이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연변자치주에는 큰 벌이 세 개 있는데 용정의 '세전벌', 훈춘의 '훈춘벌', 화룡시에 있는 '평강벌'이란다. 선조들이 일제의 핍박과 가난을 피해 맨손으로 정착하여 손발이 부르트도록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며 가꾼 자랑스러운 황금들녘을 보면서도 마음은 무거웠다.

세전벌을 지나니까 아시아에서 가장 크고, '사과배'를 재배한다는 '맘모 과수원'이 나타났다. 잘 다듬어진 잔디 운동장이 떠올랐다. 그곳에서 출하되는 사과배는 중국의 배 품평회에서 3년 연속 우등상을 차지했을 정도로 품질이 좋단다.

가이드는 원래 돌배나무밖에 없었는데, 조선 북청에서 이주해온 최범규라는 사람이 고향집에 갔다가 뒷산의 배나무 한그루를 가져와 접목해서 6년 만에 열매가 열렸는데 크기가 사과만 하고 햇볕을 받은 쪽이 붉어 '사과배'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선구자'와 '고향의 봄' 합창

연길-용정 사이 길목에서 본 일송정. 정자 옆에는 2003년 당시 한국 통일부가 광복절 행사를 용정시 인민정부와 함께 치르면서 백두산에서 가져다 심어놓은 애소나무가 서 있습니다.
 연길-용정 사이 길목에서 본 일송정. 정자 옆에는 2003년 당시 한국 통일부가 광복절 행사를 용정시 인민정부와 함께 치르면서 백두산에서 가져다 심어놓은 애소나무가 서 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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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속의 한국을 만든 동포들의 피땀이 서린 용정을 지나는데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더니 왼쪽을 보라고 했다. 얼른 돌아보니까 가물가물 보이는 산꼭대기에 뭔가가 하나 서 있는데, 그게 대일 항쟁 정신이 깃든 일송정이라 했다.

어른은 물론 아이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일송정이다!'를 외쳤다. 일송정은 풍류객들이 질펀하게 노는 정자가 아니고, 2m 정도 깎아지른 벼랑 위에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모습이 푸른 청기와를 얹은 것처럼 보여 부르게 되었단다. 

용정이 굽어보이는 일송정은 독립투사들이 자주 올라 항일 노래와 시를 읊으면서 회의를 했던 장소였다. 일송정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일제가 소나무 껍질을 벗겨 내고 그곳에 고춧가루와 후춧가루를 뿌린 뒤 대못을 박아 죽였다는 가이드 설명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일제의 잔악함에 한마음이 된 일행은 가곡 선구자와 고향의 봄을 합창했다.

가이드는 버스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고 하는데, 2차선이 자주 나타나고, 경운기도 다니고, 공사하는 곳이 많아 한국의 국도만도 못했다. 그래도 불평 한마디 없이 운전에만 열중하는 기사에게서 중국의 만만디 정신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휴게소 풍경

휴게소가 가까워지니까 가이드는 화장실 이용에 대해 설명했다. 칸막이가 없는 화장실 한 칸에 네다섯 명씩 들어가는데, 불편하다고 들어가지 않으면 호텔에 도착하는 저녁때까지 일을 못 본다며 옛날 고향 집 뒷간으로 생각하고 편하게 이용해달라고 당부했다.

백두산 가는 길 휴게소. 연변에는 화장실 찾기가 어려운데요. 일반 화장실은 ‘측소’(厠所), 공중화장실은 ‘공측소’(公厠所)로 표기하고 있더군요.
 백두산 가는 길 휴게소. 연변에는 화장실 찾기가 어려운데요. 일반 화장실은 ‘측소’(厠所), 공중화장실은 ‘공측소’(公厠所)로 표기하고 있더군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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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들이 공중화장실 앞에 길게 늘어서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은 필자가 어릴 때 살던 동네 공중변소 아침풍경을 떠오르게 했다. 만주에는 관광호텔 외에는 수세식 화장실이 없다고 한다. 지금도 농경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인분을 비료로 사용하는 생활환경 영향도 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길 숙소에서 휴게소까지는 1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휴게소 진열장에는 장뇌삼, 산삼, 사슴 다리, 녹각, 해구신, 백사술, 산삼술, 들쭉술, 산더덕술, 불개미술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각종 도자기와 장신구 과자 등도 팔았는데, 선물용 손수건 10개를 우리 돈 1만 5천 원에 구입했다.

선봉령(안도)으로 들어가는 길가 풍경. 가옥 구조만 다를 뿐, 겉으로 보기엔 우리 농촌과 별로 다를 게 없었습니다.
 선봉령(안도)으로 들어가는 길가 풍경. 가옥 구조만 다를 뿐, 겉으로 보기엔 우리 농촌과 별로 다를 게 없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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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게소에서 쇼핑을 끝내고 1시간 20분을 더 달려 선봉령(해발 1.400m)에 도착하니까 비가 오락가락했다. 선봉령은 지린성(길림성) 안도현 안도구 소속인데 면 단위 작은 마을이 여러 개 모여 있어서인지 소달구지와 경운기가 보였다. 보트가 있는 걸 보니까 래프팅하는 곳도 있는 모양이었다.

꿈에 그리던 백두산에 오르다

하늘 아래 첫 동네 '이도백하'(해발 1,600m)에 있는 고려식당에서 닭백숙 한정식을 먹고 30분쯤 달려 백두산(중국에서는 '장백산'이라 부름) 입구에 도착했다. 금방 비라도 내릴 것처럼 날이 잔뜩 흐렸다. 천지의 비경을 못 볼까봐 걱정됐으나 하루에도 몇 번씩 기상변화가 일어난다는 가이드 말에 희망을 걸었다.

장백산 입구. 중국은 백두산을 장백산으로 표기합니다. 지금도 백두산이 아닌 장백산에 다녀왔다고 생각하면 허탈합니다.
 장백산 입구. 중국은 백두산을 장백산으로 표기합니다. 지금도 백두산이 아닌 장백산에 다녀왔다고 생각하면 허탈합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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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솔자는 우비를 한 개씩 나눠주면서 민족의 성산 백두산은 16개의 봉우리가 병풍 모양으로 천지의 삼면을 둘러싸고 있다고 귀띔했다. 입장료가 우리 돈 3만 6천 원인데도 정상에서 오래 머물 수 없다며 아쉬워했다. 


꿈에 그리던 백두산으로 향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25분쯤 오르다, 내리니까 주차장 한쪽에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지프차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지프차 한 대에 6명(10인용도 있음)씩 나눠 타고 출발했다.

백두산 가는 길 원시림의 자작나무 숲. 흰색의 수피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공해에는 무척 약하다고 하더군요.
 백두산 가는 길 원시림의 자작나무 숲. 흰색의 수피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공해에는 무척 약하다고 하더군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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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옆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군락을 이루었고, 일행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백두산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고, 자작나무가 촘촘한 숲만 보였다. 제주도 한라산은 정상을 보면서 오르지만, 백두산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생각났다.

 관광객을 싣고 장백산(백두산)에 오르는 지프차들. S자 코스로 돌아 오르는데요. 운전이 어찌나 난폭한지 무서워 혼났습니다. 그래도 안전운전 하라고 지적하는 사람이 없더군요.
 관광객을 싣고 장백산(백두산)에 오르는 지프차들. S자 코스로 돌아 오르는데요. 운전이 어찌나 난폭한지 무서워 혼났습니다. 그래도 안전운전 하라고 지적하는 사람이 없더군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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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지고 굴곡이 심한 길을 어찌나 잘 잡아 돌리는지 커브를 돌 때마다 이리 쏠리고, 저리 쏠렸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난폭운전을 가장 잘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백두산에 오르는 중국 기사들에게는 게임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낭떠러지가 보일 때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백두산에 올랐다. 차에서 내리자 발에 밟히는 흙은 검었고 자갈, 모래가 많았다. 눈을 뜨기 어려울 정도로 모래바람이 불었다. 춥기도 했지만, 날이 맑아 다행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안내판마다 한글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이나 미국보다 한국 관광객이 훨씬 많다는 것을 중국 정부도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한글 안내판이 없다니, 우리가 중국에 무시당하고 있는 것 같아 입맛이 씁쓸했다.

내가 오른 백두산, 진짜 백두산 맞나?

신령스런 백두산 천지. 기회가 된다면 북한 땅을 밟고 올라 ‘만주도 우리 땅이었다!’를 마음껏 외쳐보고 싶습니다.
 신령스런 백두산 천지. 기회가 된다면 북한 땅을 밟고 올라 ‘만주도 우리 땅이었다!’를 마음껏 외쳐보고 싶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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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 조금 넘어 천지에 올랐다. 구름이 무리지어 춤추듯 산봉우리 사이로 떠다니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신이 아니면 누가 감히 연출해낼 수 있겠는가. 열 번 올라야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예술작품을 감상하다니 하늘이 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 같은 백두산 천지, 그 천지를 감싼 16개의 봉우리와 구름, 바람, 바위, 모래까지 신령스럽고 신비로웠다. 그러나 신비감도 잠시였다. '꿈에 그리던 백두산인데, 진짜 백두산 맞나?'라는 자문(自問)과 함께 서 있는 곳이 중국의 장백산임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천지를 중심으로 북쪽은 중국 영토임을 알면서도 직접 보고 느끼는 감정은 달랐다. 중요한 서류봉투를 차에 놓고 내린 기분이었다.

천지에서 한 시간 정도 머물렀는데 그냥 내려올 수가 없었다. 해서 '백두산 님이여! 부디 7천만 민족을 굽어살피소서!'를 기도하듯 외우고 일행들과 기념촬영을 마친 뒤 지프차에 올랐다. 차가 출발하는 순간 옆 사람 시계는 오후 2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백두산, 깎아지른 절벽 사이에서 구름이 무용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백두산, 깎아지른 절벽 사이에서 구름이 무용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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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백두산 천지는 물이 항상 지하에서 솟는다고 합니다. 중국이 말하는 가장 높은 봉우리는 장군봉(2,749m)인데 중국, 북한, 한국이 조금씩 다르다고 합니다. 동서 폭(4,85km), 남북 폭(3,35km), 둘레(13,1km), 평균 깊이(204m), 가장 깊은 곳(306m)으로 웅장함 그 자체이지요.

현지 가이드와 박영희 시인의 설명, ‘2010만주기행’ 자료집을 참고했습니다.



태그:#백두산, #천지, #장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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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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