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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마지막 날! 나는 더 없이 맑은 날에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비에이(美瑛)를 여행하였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한계 속에서도 최대한 서두르지 않고 이 자연을 즐겼다. 나는 이토록 청명한 날씨와 아름다운 녹색의 구릉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 최북단 홋카이도의 한 중앙에 자리 잡은 비에이는 추운 날씨 때문에 감자농사나 지어먹던 열악한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풍성한 산림과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언덕 위의 경작지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곳으로 변모하였다.

 

 

후라노(富良野) 팜 도미타(フア-ム 富田)를 출발한 지 40분이 지나자 비에이 역이 보였다. 비에이 역 앞에 펼쳐진 비에이 마을은 마치 동화 속의 마을 같았다. 대부분의 건물은 비에이에서 나온다는 연석(軟石)으로 지어졌고 새로운 역사를 축적하기 위해 건물 외부에는 건물이 건축된 연도가 새겨져 있다.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명성을 자랑하는 비에이의 명성은 그냥 생긴 것이 아니었다.

 

비에이의 잔잔한 구릉은 자전거를 타고 돌아보는 것이 인기가 있다. 하지만 이 더운 날에 자전거를 탔다가는 온 몸이 땀 속으로 젖어 들어갈 것만 같았다. 우리는 역 앞에서 출발하는 비에이 순환 관광버스를 타기로 했다. 비에이의 관광버스인 트윙클 버스는 시간이 많지 않은 여행자들이 짧은 시간에 비에이의 대표 경승지를 효율적으로 돌아볼 수 있도록 만든 버스이다. 성수기인 여름에 운행되는 버스이니 아무 때나 탈 수 없는 버스이기도 하다.

 

우리는 '패치워크노미치(パッチワークの路)'의 주요 풍광을 둘러보는 언덕코스행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JR 열차표를 가진 사람들은 일인당 600엔을 내고 별도의 버스 승차권을 사야 했다. 우리가 비에이 역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1시. 관광버스 시간표를 보니 오후 1시 5분에 출발하는 언덕코스행 버스가 있었다.

 

나는 아내와 딸을 데리고 기차에서 내렸다. 마음이 급했다. 우리는 기차에서 내려 비에이 마을 쪽에 자리한 비에이 역방향으로 가기 위해 철로 위의 육교를 서둘러 건넜다. 비에이 역 앞의 버스 정류소 앞에서는 거의 뛰다시피 했다. 사전예약이 필요한 버스라고 들었지만 출발시간이 거의 다 된 버스 안을 살펴보니 좌석에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버스티켓은 비에이 역에서 판다는 것이다. 나는 버스 기사 아저씨에게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하고 비에이 역으로 다시 들어섰다. 방금 전에 우리 가족을 보고 반갑게 인사하던 역무원 아저씨에게 관광버스 티켓 파는 곳을 물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은 아주 예상 밖이었다.

 

그는 아주 사무적으로 심드렁하게 대답을 한다. 그는 역 안의 관광버스 관련 업무가 자기 업무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까 역에서 나올 때 우리를 향해 반갑게 인사하던 그 역무원이 맞나 싶을 정도다.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손님들에게만 친절한 일본 사람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것 같다. 마음이 조금은 찜찜하다.

 

아무튼 버스는 '패치워크의 길'을 향해 힘차게 출발했다. 일본에서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버스를 타고 관광을 하니 마치 함께 소풍을 가는 듯한 느낌이다. '패치워크의 길'이라는 이름은 다양한 색깔의 밭들이 마치 조각천으로 패치워크한 것처럼 보이는 언덕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나라 영화배우 소지섭이 찍은 어느 카메라 회사의 광고도 이곳에서 찍은 것이다.

 

나는 출발하는 버스 속에서, 오늘의 하늘이 찌푸리지 않고 일 년에 몇 번 되지 않을 듯 싶은 화려한 햇살로 덮여 있음에 감사했다. 그 햇살 사이로 관광버스가 지나는 길은 한적한 2차선 도로였다. 도로 위에는 비에이 패치워크의 길을 둘러보려는 자동차들만 가끔 지나다니고 있었다. 버스 안의 좌석은 반을 조금 못 채웠는데 우리 가족만 한국에서 왔고 대부분 일본 가족들이었다.

 

버스의 가이드 아가씨는 지나치는 비에이 언덕의 풍경을 가리키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구릉과 나무 사이로 가이드의 간드러지는 일본어 안내가 더해지고 있었다. 일본어가 유창하면 가이드의 설명을 다 이해할 수 있으련만.

 

나는 이 아가씨가 말하는 언덕과 나무의 이름들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사전에 공부해 온 얕은 지식을 통해 가이드가 지금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만 짐작할 수 있었다. 가이드는 많은 외국 여행자들이 이용한다는 이 버스 안에서 너무나 유창하게 일본어로만 말하고 있었다. 이 일본어를 다 알아들었으면 더 풍성한 여행이 되었을 터인데 너무나 아쉬웠다. 우리는 버스 가이드가 나누어준 한글로 된 한 장 짜리 관광지 안내서를 들여다봤다.

 

 

언덕의 마을에 들어선 관광버스가 가장 먼저 멈춰 선 곳은 '겐과 메리의 나무(ケンとメリーの木)'였다. 1972년에 일본 닛산 자동차의 신모델 '스카이라이너'의 TV광고에 출연해서 유명해진 나무이다. 마치 디즈니 만화영화의 캐릭터들을 연상케 하는 이 나무의 이름, '겐과 메리'는 당시 TV광고에 출연했던 이국적인 서양배우들의 이름이다. 매 계절마다 시리즈로 선보였던 당시 그 광고에서 겐과 메리는 멀리서 이 포플러 나무를 쳐다보고 있고 두 인물의 사이에 수직형상의 포플러 나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수령 80년의 포플러 나무는 어찌 보면 평범한 나무이다. 이 정도 나이의 포플러 나무는 삿포로 홋카이도 대학의 포플러 숲에도 널려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 나무가 눈길을 끄는 것은 굽이굽이 곡선이 이어진 구릉 위에 홀로 수직형의 수형을 유감없이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겐과 메리의 나무'는 다른 포플러 나무 없이 유독 혼자 서 있어서 눈길이 집중된다. 비에이에 광활하게 펼쳐진 언덕에는 나무가 함께 심어져 있지 않고 한 그루의 나무가 홀로 서 있는 곳이 많다. 이 외로운 나무들은 농부들이 언덕에서 고된 일을 하다가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기 위해 심어진 나무들이다. 오늘같이 여름의 햇볕이 쏟아지는 날에 이 나무들은 그늘의 시원함을 선사해 준다.

 

그런데 이 비에이의 관광버스는 '겐과 메리의 나무'에서 잠시 멈췄다가 다시 출발을 한다. 승객들이 버스에서 잠깐 내려 나무를 둘러볼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다. 나무 옆의 캔과 메리 펜션에는 TV광고에 나왔던 '스카이라이너' 자동차가 전시되어 있다는데 아쉽게도 볼 수가 없었다.

 

 

아마 다른 유명 나무 앞에서 버스는 멈춰 설 것 같다. 항상 관광버스를 이용한 단체관람은 개인이 보고 싶은 것을 다 보지 못하고 제일 유명한 관광지만 찍어서 둘러보는 단점이 있다. 풍경 안에서 사색하지 못하고 여행 목적물만 향해 돌진하고 서둘러 떠나는 관광 속에 내가 있었다. 나는 출발하는 버스의 차창 너머로 '겐과 메리의 나무'를 서둘러 사진에 담았다.

 

버스는 더 할 수 없이 맑고 푸른 하늘과 녹색의 싱그러운 구릉지대를 천천히 움직여 갔다. 버스는 구릉의 전망이 시원하게 펼쳐진 한 떡갈나무 앞에서 멈춰 섰다. 관광버스의 문이 열리자 우리는 비에이의 구릉 속으로 내려갔다. '세븐스타나무(セブンスターの木)'였다. 포플러 나무보다 더 풍성한 가지가 옆으로 팔을 벌리고 있어서 그늘이 시원했다.

 

 

이 나무는 일본 '세븐스타' 담배의 1976년 포장지에 등장했던 나무이다. 웃기는 것은 이 유명한 포장지가 현재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세븐스타' 나무가 광고에 출연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지만 실제 광고출연 증거는 없는 것이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 때문에 이 나무 광고를 찍은 담배회사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이 아름다운 나무가 담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 담배회사는 비에이 구릉에 잔잔하게 홀로 서 있는 떡갈나무의 '마일드'한 이미지를 자신들이 만든 담배로 옮기고 싶었던 것이다.

 

 

아무튼 높은 구릉 위에 우뚝 선 이 나무 앞으로 비에이의 광활한 자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색깔을 맞춰 농사를 지었는지 구릉 위 밭과 밭의 경계는 색색의 조각보를 연결해 놓은 것 같이 화려하다. 아마도 아시아에서는 펼쳐지기 어려운 이국적인 경치인 것 같다. 몇 년 전 오스트리아의 시골을 지나면서 보았던 기찻길 주변의 경치와 유사했다. 유럽에서는 흔한 풍경이지만 이 풍경을 아시아 끝, 일본 최북단의 땅에서 만나니 신기할 따름이다.

 

우리는 강한 햇살에 살이 타지 않도록 얼굴과 팔에 선크림을 철저하게 발랐다. 나는 아내, 딸과 함께 끝없이 펼쳐진 구릉지대와 꽃밭을 보았다. 한적한 구릉에 쏟아지는 따가운 햇살을 느끼며 나는 잠깐 동안의 자유시간을 즐겼다. 붉은 꽃밭과 밀밭이 경계를 이으며 구릉을 넘나들고 있었다. 당산나무같이 우뚝 선 '세븐스타' 나무의 아래에는 구릉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나무 밑으로 바람이 솔솔 들어오고 있었다.

 

 

다시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앞 좌석 천장의 모니터 위에 재미있는 주의문이 붙어 있었다. '집합시간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請遵守集合時間)'. 나는 한자로 적힌 주의문을 읽다가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 주의문은 중국 여행자들이 읽으라고 붙여놓은 것이었다.

 

그 주의문이 버스 안에 항상 붙어있게 된 이유는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중국 자유여행 당시에 남을 배려하지 않는 중국인들의 시간개념 때문에 짜증났던 수많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정확히 시간 지키기를 좋아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공중도덕이 몸에 밴 일본사람들은 단체관광버스에 항상 늦게 집합하는 중국 관광객들 때문에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버스가 이동을 시작하자 버스의 가이드 아가씨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이번에도 이 아가씨는 구릉 한쪽에 자리잡은 나무들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는데 이번에는 이야기의 설정이 너무 억지스럽다. '겐과 메리의 나무'와 '세븐스타의 나무'는 주변 풍경과 어울리며 나름의 품격이 있지만 그 아가씨가 설명한 '오야코 나무(親子の木)'는 작은 사물에 이야기를 만들고 역사를 쌓아가기 좋아하는 일본적인 특징의 결정판이다.

 

 

중간에 키 작은 떡갈나무를 포함하여 나란히 3그루의 떡갈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들이 엄마나무, 아기나무, 아빠나무라는 것이다. 멀리서 보면 가족같이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그저 그럴 것이다. 수형이 아름답고 큰 나무도 아닌데 굳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데 동원된 나무 같다.

 

세월이 지나면 중간에 자리한 키 작은 나무도 키가 커서 키들이 비슷한 나무가 될 터인데 그때는 아들나무를 어떻게 구별할지 궁금했다. 웃기는 것은 시야의 동일 구릉 왼쪽 끝에 서 있는 나무가 '시어머니 나무'라는 것이다. 시어머니 나무는 아들 가족과 떨어져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인가?

 

'마일드 세븐 언덕(マイルドセブンの丘)'이 이어지고 있었다. 언덕에 길게 이어선 나무들은 언덕의 방풍림으로 만들어졌던 나무들이다. '마일드 세븐(Mild Seven)' 담배의 TV광고에 나와서 유명해진 언덕이다. 아무래도 비에이의 완만한 구릉이 부드럽고 깨끗한 느낌이 들기 때문에 담배 광고에 이용되었을 것이다.

 

 

버스는 이 관광버스의 마지막 관광 포인트인 '호쿠세이노오카 전망공원(北西の丘 展望公園)' 앞에 멈춰 섰다. 우리말로 하면 북서의 언덕 전망 공원이다. 관광버스와 여행 나온 승용차들이 언덕 위에 가지런히 줄을 맞추고 있고 언덕 정상 위에 자리한 삼각뿔 모양의 독특한 전망대 속에서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전망대에서는 홋카이도의 최고봉들이 몰려 있는 '다이세쓰산(大雪山)'이 저 멀리 보인다. 산 정상에는 구름이 걸려 있다가 내려오기도 하지만 겨울에 온산을 뒤덮는다는 눈은 정상에도 남아있지 않다. 9월 말부터 다시 눈이 내려 산 위에 눈이 쌓이면 정말 장관일 것 같다.

끝없이 이어지는 구릉과 그 사이에 점점이 박힌 목가적인 전원주택들이 여유롭다. 전망대는 한적한 자연에 파묻혀 있으면서도 그 자연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었다. 가장 높은 곳에서 멀리 내다볼수록 가슴이 탁 트인다는 단순한 진리가 다시 느껴진다. 우리는 비에이의 풍경에 빠져들고 있었다.

 

나는 마치 파노라마 사진을 이어 붙이듯이 몸을 돌려가며 사방의 사진을 찍었다. 나는 비에이의 모든 구릉을 다 카메라에 담기라도 하듯이 사진을 찍어댔다. 날씨도 워낙 맑았기에 어느 방향을 대충 찍어도 보정이 필요 없는 사진들이 저장되고 있었다. 나는 사진을 찍으면서 이 그림같은 구릉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구릉은 컴퓨터의 윈도우 바탕화면이었다. 그러나 윈도 화면의 구릉보다 이 자연스런 구릉의 원색이 더 아름답고 화려하다.

 

우리는 주차장 맞은편에 자리한 특산물 가게에 들렀다. 특산물 가게는 온통 홋카이도의 먹거리 천지였고 그 모두가 우리의 입맛을 설레게 하는 것들이었다. 라벤더 아이스크림은 신나게 먹어봤기에 우리는 다른 먹거리를 사기로 했다. 우리는 홋카이도 특산물 중의 하나인 홋카이도 옥수수를 사서 버스에 올랐다.

 

 

옥수수에 무슨 짓을 했는지 옥수수 알이 너무 찰지고 달았다. 홋카이도의 비에이와 후라노(富良野) 지역은 태양에서 쏟아지는 자외선이 우리나라의 배가 넘는 곳이다. 비에이의 옥수수, 감자, 토마토는 당도가 높고 맛도 좋다고 한다.

 

우리는 버스 뒷좌석에 앉아 옥수수 알을 한 알 한 알 씹으며 여행의 즐거움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다음에 비에이에 오면 승용차를 타고 여유 있게 다니며 산책도 하면서 이 구릉의 정경을 가슴에 담자고 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자신의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도 담길 예정입니다.


태그:#일본여행, #홋카이도, #비에이, #겐과 메리의 나무, #세븐스타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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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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