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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을 옮겨 다닐 때 화성시에서 여러모로 도움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병원에서 욕창을 방치하여 환부 사이로 뼈가보일 정도로 심해 욕창만 치료하는데도 1년이 걸린다고 한다. 오랜 병상 탓에 핏기없는 다리가 앙상하다.
▲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이금란씨(가명) 시설을 옮겨 다닐 때 화성시에서 여러모로 도움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병원에서 욕창을 방치하여 환부 사이로 뼈가보일 정도로 심해 욕창만 치료하는데도 1년이 걸린다고 한다. 오랜 병상 탓에 핏기없는 다리가 앙상하다.
ⓒ 전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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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30도를 웃도는 찜통더위가 물러갈 기색을 안 보이고, 숨이 턱턱 막히던 지난 여름 어느 날 오후, 경기도의 한 작은 요양병원을 찾았다.

1986년부터 1991년까지 10명의 목숨을 앗아간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화성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기 9년 전, 같은 장소에서 화성연쇄살인의 그것과 비슷한 수법으로 인생을 빼앗긴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할 것이다. 당시 피해 가족의 요청에 따라 외부에 안 알려진 채 여전히 모진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생존자가 거기 있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 발생 9년 전에도 피해자 있었다

병실 침대 발치 인식표. 54세, 이금란(가명)

뇌수술을 받느라 머리는 깎였고, 하반신 마비라 대소변을 가릴 수 없어 기저귀를 차고 있었다. 하루 종일 누워있어야 하는 처지라 피곤한지 연신 하품을 하는 그녀의 입속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서울 시설에 수용되어 있다가 최근 욕창이 심하여 이곳 일반 요양병원으로 옮긴 지 얼마 안 되었단다. 가려워 긁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두 손은 양말을 씌워 묶어 놨다. 의식도 있었고 대화도 가능한 상태였지만 인터뷰를 하러 찾아간 것이 아니었기에 이것저것 물을 처지가 아니었다.

"식사는 잘 하세요?"
"네."
"........힘드시지요....."
"........."

당사자에게 그 끔찍한 기억을 다시 불러낼 용기가 내게 없었음이기도 하려니와 함께 근무하는 동료의 친언니였기에 그러할 자리도 아니어서 우물쭈물하다 떤 미련퉁이었다.

어찌 안 힘들 수 있겠나.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이 고통스러워 보였다.
욕창패드를 가느라 휠체어로 잠시 옮겼는데 등허리에 통증이 오나 보다. 무척 괴로워하신다.

1977년 7월, 실종과 반죽음...악몽의 시작

1977년 7월 하순, 6명의 친구들이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가재리 한 어린이집으로 놀러갔던 그날 그 저녁. 외박은 절대로 안 된다는 아버지의 불호령 때문에 이금란씨는 늦은 밤 친구들을 남겨놓고 혼자 돌아오다가 실종됐다.

그녀는 이튿날 과수원 근처 개울창에서 발견됐다.  알몸인 상태로 아카시아 나무에 덮인 채. 손가락 마디마디와 머리, 음부가 돌로 뭉개져 있었고, 이도 다 뽑힌 채 턱도 으깨져 있었다. 그녀는 발견 후 수원의 한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의사들 모두 가망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병원에서 조차 받아주려 하지 않은 것을 가족들이 매달렸다. 죽어도 좋으니 치료받게 해달라고.

그녀의 나이 스무살, 꽃다운 시절이었다.

그 후, 1년 넘게 치료를 받고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그녀에게 불행은 그것이 시작이었다.
몇 년 뒤부터 화성연쇄살인사건이 계속 터졌고, 전국이 떠들썩한 가운데, 때마다 찾아온 형사들로부터 그 끔찍한 순간을 다시금 떠올려야 했다.  때문에 주변 이웃들조차도 이씨를 화성연쇄살인사건의 피해자 중 한 명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금란씨가 사고를 당했던 화성(군) 팔탄면 가재리는 11년 후인 1988년, 화성연쇄살인사건의 7번째 피해자가 발생한 곳이기도 했다. 그렇게, 이씨는 끊임없이 악몽에 시달려야 했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다.

망가진 결혼생활, 이어 닥친 불행 또 불행

5년 뒤, 그녀에게도 짧은 봄날이 있었다. 모든 일들을 뒤로 하고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신혼의 꿈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남편과 시댁에서 그 일을 눈치 챘고, 정상적인 가정을 꾸릴 수 없게 됐다. 이혼만 면한 채 생활비조차 받지 못한 그녀는 파출부며 폐지수집 등으로 살림을 꾸려나가야 했다. 고된 일상이 오히려 잡다한 상념을 가시게 했지만 행복이란 먼 나라 남의 이야기였다.

1996년 추석날 새벽, 곤히 자던 그녀에게 이번엔 화마가 닥친다. 부엌 베란다에 있던 보일러가 폭발한 것. 집은 아수라장이 됐고, 전신 화상을 입은 그녀는 다시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그렇게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대의 고통을 겪은 그녀에게 신은 너무나 가혹했다.

2006년 어느 날 새벽, 그녀는 화장실에서 뇌출혈로 다시 쓰러졌다. 이날 변기에 부딪히면서 1977년 사고 이후 해넣었던 의치도 모두 박살났다. 모두들 죽는다고 했을 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애써보자고 나선 것이 막내여동생이었다. 어렵게 마련한 수술비로 겨우 생명을 연장시켰으나, 그 후 제때 치료를 못 받아 병세가 악화되어 복지시설을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했다. 지난 6월에는 가톨릭 복지시설에서 연락이 왔다. 의식도 가뭇하고 중증이라 더 이상 수용하기 어려우니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그날 막내 동생이 글썽였단다.

"언니.... 미안해... 그때 내가 그냥 죽게 나뒀으면 지금 고통 안 받고 편안히 누워 있을 텐데. 미안해 언니..."
".......나..... 살고....싶어...."

세월이 가도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현 요양시설 원장은 치료를 못 받아서 그렇지 지금이라도 재활치료를 받으면 걸을 수 있는 상태란다. 남은 가족들은 하루 이틀도 아니고 간병인비며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다.

죽을 뻔한 육체적·정신적 사고를 당했음에도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그 큰 고통을 이씨 개인에게만 맡겨야 할까. 혹시 이씨가 정말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첫번째 희생자인 건 아닐까.

누가 세월이 가면 상처가 아문다 했나.
누가 세월 가면 잊힌다 했나.

"우리 언니는 참으로 힘든 세월을 살아왔음에도 누구에게 기댄다거나, 남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는 일 없이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 언니인데.... 이렇게 힘든 인생을 살아가는 언니를 보면 정말 안타깝고 가엽기 그지 없어요. 재활훈련으로 남은 인생을  걸을 수 있게만 된다면,  그래서 오래 전에 약속했었던 세자매 여행이라도 한 번 같이 갈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퇴근 후 언니 병수발을 도맡은 막내 여동생의 소박한 바람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는다.


태그:#화성연쇄살인사건, #생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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