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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기전 서둘러 말끔히 벌초를 끝낸 우리가족 납골묘 (좌측에 와비, 가운데 48기용 납골묘 우측 가족납골묘 비석)
▲ 우리집 납골묘 모습 비가 내리기전 서둘러 말끔히 벌초를 끝낸 우리가족 납골묘 (좌측에 와비, 가운데 48기용 납골묘 우측 가족납골묘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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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집 벌초축제 이야기 매년 이맘때면 우리가족 납골묘에서 20여명의 가족들이 모여 벌초를 하는데 마치 벌초 축제처럼 온가족이 화기애애한 가운데 진행이 된다.
ⓒ 윤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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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벌초를 할 때면 언제나 나와 동생 그리고 사촌 동생 두 사람이 모여 고향 선산 12곳에 산재돼 잠들어 계신 조상님 묘소에서 온종일 뻘뻘 땀을 흘리며 고생을 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하루에 벌초를 다 하기 어려울 정도로 묘에 잡초가 무성했다.

풀 깎는 일도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묘가 한 곳에 모여 있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있다 보니 여기 한 곳 벌초를 끝내고 또 건너편 산 속에 있는 조상님 묘소로 이동하는 시간도 많이 걸렸다. 또 묘지를 찾아가는 길이 사람이라곤 일 년에 우리가 한 번씩 다니는 게 전부다 보니 완전히 가시덤불 숲길로 이어져 팔다리가 찢겨 피를 보는 일들이 허다했다.

또 그 시절엔 왜 그렇게 쐐기도 많았는지. 반소매 옷을 입고 방심했다간 영락없이 쐐기에 쏘여 살갗이 부르트고 그 통증이 며칠씩 계속 참기 어려울 정도로 지속됐다. 드문드문 풀과 함께 자란 나무를 깎다가 말벌 집을 건드려 벌이라도 한두 방 쏘이면 그 고통으로 자칫 혈압 있는 사람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런 힘든 상황을 겪으면서도 '아버지 어머님과 그리고 형님'들 외, 한 번 얼굴도 뵙지 못한 윗대 조상님 벌초를 위하여 고생해야만 했다.

우리집안 벌초에는 사촌 동생 두 사람이 큰 일을 다 한다. 도회지에서 온 자녀들은 모두 오촌 아저씨들이 깍을 풀이나 갈퀴로 긁어 내는것으로 일조를 한다.
▲ 벌초를 하는 모습 우리집안 벌초에는 사촌 동생 두 사람이 큰 일을 다 한다. 도회지에서 온 자녀들은 모두 오촌 아저씨들이 깍을 풀이나 갈퀴로 긁어 내는것으로 일조를 한다.
ⓒ 윤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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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는 우리야 어차피 주어진 운명이 되어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할 고생이라 치더라도 만약 우리가 노쇠하여 일 할 수 없을 땐 이 여러 곳의 조상님 묘 벌초 관리를 누가 하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낫 놓고 낫'인 줄도 모르는 아이들이 과연 우리 대를 이어 조상님 벌초를 해낼 수 있을지 늘 그것이 걱정이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생각한 것이 조상님들께 큰 결례가 될지 모르지만, 앞으로 후세들이 지속적으로 우리 집안 조상님들에 대한 묘 관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었다.

우리 집(큰집) 4형제와 (둘째) 삼촌 댁 사촌 동생 2명 그리고 (막내) 삼촌 댁 동생 3명의 동의를 얻어 고향땅 선산 곳곳에 흩어져 모신 조상님들 묘소를 개장·화장해 모셔 '우리 집안 가족 납골묘'를 설치하기로 의견일치를 본 것이다. 그런데 한창 납골묘 설치 공사 시작 단계에 이르렀는데 유감스럽게 둘째, 셋째, 삼촌네 사촌 동생들이 모두 기존에 모신 부모님 묘소를 건드리지 않고 그냥 매장으로 모시겠다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고향 어르신까지 혀를 차며 반대한 '가족 납골묘' 설치

사촌동생이 예초기로 잔디 깍는 모습을 보고 있어요
▲ 예초기로 풀깎는 모습을 주시하고 있는 가족들 사촌동생이 예초기로 잔디 깍는 모습을 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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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두 사촌 동생네를 빼고 우리 형제끼리 6대조 할아버지, 할머니 이하 조상님 납골묘를 설치하기로 하고 공사를 시작하는데 요즘 문화와 달리 그때 당시 분위기는 조상님 묘는 웬만해선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유교적 분위기가 우선하였다. 이 때문에 우리 형제들이 납골묘 설치공사를 할 때 심지어 고향마을 어르신들께서 납골묘 조성공사 현장에 와 보시고 백여 년도 넘게 무탈하게 이어져온 조상님의 묘를 함부로 건드리는 것은 '불손'이라 하시며 혀를 차기도 하셨다.

그러나 나는 어르신들께 당당하게 말씀드렸다. 지금이야 힘이 들어도 우리 형제들이 벌초하며 묘 관리를 하고 있지만 당장 10년~15년 후에는 누가 그 여러 곳 묘소를 찾아다니며 벌초를 할 것이냐고? 만약 그때까지 우리가 일할 수 있으면 몰라도 그렇지 못하고 아이들이 관리를 못하게 된다면 아이들은 아무 죄도 없이 애매하게 조상을 외면한 자식들로 낙인 찍히게 될 것이고, 자연적으로 조상님 묘는 마치 무연고 묘지처럼 관리되지 않을 것이 뻔한데 어떻게 당장 몇 년을 내다볼 수 없는 '재래식 벌초' 방식만 고집할 수 있냐?고 반문했다.

무더위에 땀 뻘뻘 흘리며 벌초를 하다 잠시 간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가족들
▲ 간식 시간 무더위에 땀 뻘뻘 흘리며 벌초를 하다 잠시 간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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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서 납골묘 조성을 추진하는 내가 조상님들께 불효막심한 후손으로 낙인찍히게 될지 모른지만, 앞으로 더 먼 미래를 내다보며 오래오래 조상님은 물론 훗날 우리 형제들이 그곳 납골묘에 묻혀 후세들의 돌봄 속에 납골묘가 잘 유지·관리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다소의 무리를 무릅쓰고 '가족 납골묘' 조성을 강행하는 것이라고 어르신들께 설명을 드렸다. 일부 어르신들은 머리를 끄덕이시는가 하면 또 어떤 종친 어르신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일침을 놓기도 하셨다.

하지만 내 생각은 변하지 않고 납골묘 조성을 강행하여 드디어 2002년 3월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마산리 용산동 선향에 '파평윤씨 남양공손 태위공파 가족납골묘(48기용)'를 건립하였다. 제일 윗대 조상님의 묘소부터 개장하여 현장에서 화장을 모셔 유골을 분쇄하고 계수나무 납골함에 안치해 모두 10분의 조상님과 나의 손위 두 분의 형님 납골을(12분) 안치하였다.

동생들과 함께 (왼쪽 필자, 가운데 손아래 동생, 우측 사촌동생)
▲ 어느덧 내가 우리 가정의 어른이 되었다 동생들과 함께 (왼쪽 필자, 가운데 손아래 동생, 우측 사촌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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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친김에 몸이 불편하신 형님께서 장손이라는 책임 때문에 건강도 안 좋으신데 조사님 10분의 기제사를 모시는 것도 현실에 맞게 개선하자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요즘 같이 바쁜 세상에 자손으로서 기제사 참여가 부담스러울 때도 있고, 여의치 않은 애로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형제들과 협의하여 매년 청명 한식 일요일 우리 가족 납골묘에서 조상님들 기제사를 모시기로 하고 실행에 옮겼다. 처음에는 내가 너무 조상님들을 가볍게 생각해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좋은 것은 더 좋게, 나쁜 것은 과감하게 개선한다'는 의지를 갖추고 강행을 했다.

힘들었던 벌초작업, 가족들 20여 명이 참석한 '잔치'로 변하다

48기를 모시는 납골묘 봉분위에 필자가 벌초를 하고 있다.
▲ 48기용 납골묘 봉분 벌초를 48기를 모시는 납골묘 봉분위에 필자가 벌초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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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납골묘를 조성하고 기제사 모시는 제례법을 개선한 것이 우리 자식들에게는 부모들이 조상을 극진히 모시는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는 체험의 현장이 되었다.

매년 4월(청명 한식) 일요일이면 조상님 기제사를 모시려고 각처에 사는 가족들 20여 명이 모이고 심지어 시집간 누이들까지 자녀와 함께 아버지, 어머니 기제사에 참석할 정도이다. 이 결과만 보아도 요즘 같은 핵가족 시대에 보기 드물게 가족 화합과 단합을 이루며 '조상님 모시기 새로운 문화' 정착에 이바지하였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한두방울씩 내리는 비를 피해 제물을 진설하고 있는데 억수같은 폭우가 내려 약식으로 잔을 올린다.
▲ 비를 피해 제사 준비를 한두방울씩 내리는 비를 피해 제물을 진설하고 있는데 억수같은 폭우가 내려 약식으로 잔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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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 가족의 새로운 조상님 섬기기 방안은 기제사 문화 개선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옛날 십여 곳이 넘는 조상님 묘소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힘들게 해 필자 자신도 기피 현상을 보였던 재래식 벌초 문화를 완전히 바꿔 놓기까지 했다.

지금은 우리 4형제 가족 전원 참여는 물론이고 사촌 형제·자매들, 출가한 누이들, 외손자 사위까지 벌초 작업에 참석하고 있어 지금은 우리 집 벌초 날이 '가족 만남의 날, 또는 벌초 잔치'로 변화했다.

핵가족 시대에 보기 드물게 대단위 가족 만남 상봉 화합의 날로 발전한 벌초는 1시간이면 모두 끝난다. 이후 온 가족이 대형 텐트에 모여앉아 고기를 구워 조상님께 먼저 '벌초제'를 지내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이어지는 새로운 우리 가족 상봉 문화는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느긋하게 이어진다.

그런데 올해는 유난히 국지성 호우가 지속됐다.지난 28일 토요일 인천, 서울, 고양에서 참석한 20여 명이 벌초를 모두 다 끝내고 조상님 제를 모실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며 얼마나 굵은 세찬 빗줄기가 사정없이 쏟아져 내리는지…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올해는 차려온 제물도 제대로 진설하지 못하고 비를 맞으며 간신히 조상님께 잔을 올렸다.

제사를 모시고 나면 따라놓은 잔을 들어 납골묘에 안취된 조상님 비문앞에서 봉분위에 술을 따라 헌주를 모시는데 이날은 비가 억수같이 내려 약식으로 진행한다.
▲ 제사를 모시고 헌주를 모시는 가족들 제사를 모시고 나면 따라놓은 잔을 들어 납골묘에 안취된 조상님 비문앞에서 봉분위에 술을 따라 헌주를 모시는데 이날은 비가 억수같이 내려 약식으로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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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서둘러 내가 우리 문중 종친회장직을 맡은 고향마을 '용산제' 재실로 이동하여 재실에서 고향마을 종친, 어르신, 형님 내외분들을 모시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점심 겸 가족회의를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우리 문중의 종손이신 형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도균이 네가 그때 납골묘 공사할 때 나도 반대를 했었는데 오늘 이렇게 너의 가족들이 하나로 단합돼 사촌, 오촌, 육촌, 칠촌, 심지어 외손자까지 참석해 너의 집안 똘똘 뭉치는 모습을 보니 상당히 인상적이다."

이와 함께 "요즘 세상에 벌초하는 날 이렇게 20여 명의 대가족이 모이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고 보기 좋다"고 하시며 앞으로는 형님댁은 물론 우리 종친들도 모두 납골묘를 조성하여 벌초문화도 개선하고 가족 단합 계기도 만들어야 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형님께서 "정말 그동안 고생 많았다"며 따라 주신 술잔은 꿀맛 같았다.

얼마나 집중 호우가 쏟아지는지 자리를 비해 재실로 이동중이다.
▲ 비를 피해 이동을 얼마나 집중 호우가 쏟아지는지 자리를 비해 재실로 이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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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이날의 우리 가족 벌초 참석자 중 제일 막내인 필자의 손자 (초등학교 3학년) 아이는 할아버지 귀에 대고 할아버지 오늘 집에 있었으면 온종일 오락하고 놀텐데 할아버지, 할머니 따라 와 너무 좋은 모습을 보고 배운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할아버지 고맙습니다"하며 뽀뽀를 해주는 손자녀석을 보며 '비록 내가 남들 앞에 내놓을 것 없는 인생'을 살았지만, '조상님 잘 모시고 가족 화합분위기 조성'하는데 만큼은 그 어디 내놔도 자랑할 수 있고 앞장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진행된 이날의 벌초 이야기는 용산제 재실에서 식사와 회의를 끝으로 모두 끝을 맺었다. 온 가족들이 모두 나에게 다가와 형, 오빠, 아저씨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5~6대의 차량에 나눠탔다. "내년에도 꼭 올게요. 안녕히 가세요"라는 인사를 나누며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쉬운 마음과 함께 무언가 해낸 듯한 뿌듯한 마음에 이제는 조상님들 앞에 결코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당당할 수 있어 흡족했다.

집중 호우를 피해 재실로 이동하여 마을 어르신들을 모신 가운데 식사를 하며 가족회의를 하는 모습
▲ 재실에서 점심을 하며 가족회의를 집중 호우를 피해 재실로 이동하여 마을 어르신들을 모신 가운데 식사를 하며 가족회의를 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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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벌초, #가족납골묘, #벌초축제, #매장묘, #가족단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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