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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주인공으로 한 MBC 월화드라마 <동이>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주인공으로 한 MBC 월화드라마 <동이>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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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드라마를 볼 때 '진짜 역사도 저랬을까?'란 생각을 한 번이라도 안 해 본 사람이 있을까. 그런 점에서 2008년부터 <오마이뉴스>에 연재되고 있는 김종성 기자의 '사극으로 역사 읽기'는 독자들에게 '효자손'같은 존재다.

드라마 <이산>을 시작으로 <대왕세종> <왕과 나>에 이어 지난해 큰 인기를 끌었던 <선덕여왕>에 이르기까지, 그의 글들은 역사드라마만큼 흥미진진하다. 그랬던 그가 최근 역사 연구서 <최숙빈>이란 책을 냈다. 이 책은 얼마 전부터 방송을 시작한 MBC 드라마 <동이>의 주인공 '숙빈 최씨'를 소재로 한 역사역구서.  

지난 8일 오후 서울 영등포에서 김종성씨를 만났다. 중국사(동아시아 통상관계) 전공자인 그가 숙빈 최씨에 대한 책을 낸 이유는 뭘까? 그는 "전 세계적으로 서민의 지위가 상승하는 시기인 17~18세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숙빈 최씨가 바로 이 시기를 대표하는 하나의 샘플과 같은 존재라고 판단했기에 그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숙빈 최씨뿐만 아니라 기존 사극 등에서 '유약한 왕'으로만 표현됐던 숙종에 대해서도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김씨는 "숙종이 부인들을 통해 각 정파를 적절히 관리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숙종이 첩에게 홀려 조강지처를 버리는 등 갈팡질팡하는 어리석은 남편으로 인식되었던 것은 "김만중의 <사씨남정기> 속 유한림의 이미지가 숙종에게 덧씌워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사극으로 역사 읽기' 김종성이 본 '최 숙빈'

<최숙빈>의 저자 김종성 기자
 <최숙빈>의 저자 김종성 기자
ⓒ 김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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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씨는 '장 희빈 대 인현왕후'의 단일 대립구도로 잘 알려진 '숙종시대 여인천하'에 대해서도 조금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장 희빈과 최 숙빈의 대립구도도 동시에 존재하고 진행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두 구도를 모두 파악하는 것이 그 시대를 바르게 이해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가 이번에 낸 <최숙빈>을 읽으며 제일 흥미로웠던 부분은 궁녀가 천민이었다는 사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조선시대 언젠가는 30~50%에 이르는 사람들이 노비였다는 새로운 사실까지 알게 됐다. 아울러 "당시 노비문서로 속박돼 있던 노비들은 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직장에 매어있는 일반 샐러리맨들로 볼 수 있다"는 김씨의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다음은 조금은 흥미롭고 충격(?)적이었던 김종성씨와의 인터뷰 전문.

- 전공이 중국사인데, 어떤 계기로 숙빈 최씨에 관심을 가지게 됐나.
"(개인적으로)논문을 쓸 때도 중국사를 중심으로 하기보다는 동아시아사라는 관점을 가지고 썼다. 최 숙빈에 대한 관심은 기본적으로 동아시아사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것 같다. 내가 관심을 갖는 시기 중의 하나가 17~18세기다. 이때는 세계적으로 서민의 지위가 상승하는 시기다. 평소 서민의 지위 상승이나 시대의 변화 면에서 17~18세기를 주목했는데, 그래서 숙빈에 관심 가졌다.

(숙빈이) 조선 후기 서민의 지위 상승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상으로서, 그 당시 조선사회의 조류를 반영하는 하나의 샘플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최 숙빈에 대해 썼다고 해서 최 숙빈을 비호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개인적으로는) 장 희빈이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여기에서는 최 숙빈에게 중점을 둔 것뿐이다. 남들은 장 희빈이 사악하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의외로 최 숙빈이 더 사악하다고 해도 무리가 없는 것 같다.

숙빈 최씨에 관한 자료는 아주 적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출생, 입궁, 궁녀생활 등으로 단계를 나눈 다음 각 단계에 해당하는 사료를 찾았다. 사료가 부족하면 유추할 만한 범위에 드는 다른 사료를 찾아 참고하는 식으로 연구했다. 예컨대, 최 숙빈의 궁녀 생활에 관한 자료가 없으면, 다른 궁녀들의 생활을 바탕으로 최 숙빈의 그 당시 생활을 유추하는 식으로 연구를 했다."

숙종이 우유부단? 뭘 모르고 하는 말씀

- 최 숙빈이라는 용어도 쓰고 숙빈 최씨라는 용어도 쓰는데, 두 용어가 서로 다른 점이 있는가?
"실록에는 거의 숙빈 최씨라고 나오는데, 그 외 왕실 기록에는 최 숙빈, 최 숙원 등이 보인다. 궁궐에는 임신 과정을 다 기록한 책이 있다. 그 책 제목이 <최숙원방 호산청 일기>다. 두 용어를 병용하지 않았나 싶다. 처음에는 책 제목을 <숙빈 최씨>라고 하려고 했다. 그런데, <최숙빈>을 택한 것은, 장희빈과 맞추기 위해서다. 희빈 장씨보다는 흔히 장 희빈이라고 하지 않는가. 굳이 최 숙빈이라고 한 것은 장 희빈의 진정한 라이벌이 될 만한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어서였다."

<최숙빈> 겉그림.
 <최숙빈> 겉그림.
ⓒ 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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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은 여자에게 휘둘리는 우유부단한 남편 이미지가 강하다. 실제 숙종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숙종이 장 희빈이나 인현왕후를 통해서 정파들을 적절하게 통제했다고 생각한다. 숙종이 자기 부인이나 첩을 내치는 시기가 소속 당파의 힘이 너무 강해져 정권교체가 필요한 시점과 매번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숙종은 부인 치마폭에 싸인 무능한 군주가 아니었다. 그 시기 동아시아 삼국은 왕권이 가장 강하던 시기였는데, 숙종 역시 그런 강한 왕권을 운영하던 군주 중 하나였다.

김만중은 1680년대에서 1690년대 즈음 숙종의 정치를 절반 정도 밖에 못 보고 <사씨남정기>를 썼다. <사씨남정기>를 근거로 하면 최 숙빈이라는 사람은 그 구도에 들어가기가 힘들다. 최 숙빈이 등장하기 전에 쓴 책이라서 숙종의 진면모라든가 최 숙빈의 활동이 전혀 반영되지 못했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숙종이라든가 장 희빈을 보는 시각이 <사씨남정기>에 기초해있기 때문에, 그 책의 틀을 넘어서야만 숙종이라든가 궁중 내 장 희빈과의 관계 등도 더 정확하게 파악되리라 생각한다."

- 최 숙빈은 서인이 이용한 후궁에 불과하지 않나.
"서인 입장에서 보면 최 숙빈 말고도 카드는 많았다. (서인이) 힘도 더 세고, 지위도 더 높지 않은가. 누가 진정으로 상대방을 이용했는가 보려면 누가 자기 목적을 달성했는가, 누가 최후에 결실을 거두었는가를 봐야 한다. 그 기준으로 보면 최 숙빈은 자기 목적을 다 달성한다. 장 희빈을 몰아내고, 죽게 하고, 자기가 낳은 자식이 나중에 왕이 된다. 가장 큰 결실을 수확한 사람을 이용만 당했다고 볼 수 있을까?

숙종시대의 여인천하라고 하면 장 희빈과 인현왕후만 보는데, 나는 그 당시의 여인천하에 두 가지 구도가 동시에 공존하고 진행됐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장 희빈 대 인현왕후고, 또 하나는 장 희빈 대 최 숙빈의 구도다. 그중에서도 더 본질적인 구도는 최 숙빈 대 장 희빈이라고 생각한다. 장 희빈과 인현왕후보다는 장 희빈과 최 숙빈의 대립이 더 격렬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그 시기 여인천하의 본질을 더 정확하게 보려면 최 숙빈이 필요하다. 장 희빈이라는 코드는 한국인의 역사의식과 한국인의 대중문화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장 희빈을 똑바로 보려면 최 숙빈도 함께 봐야 더 바르게 규명되리라 생각한다. 최 숙빈을 바로 보는 것은 숙종 시기 여인천하를 바로 보고 또 그것이 우리 대중문화에 더 자세히 접목되는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시대 천민, 지금 샐러리맨들과 같았다"

- 책에서 궁녀가 천민이었다고 했다. 사람들이 궁녀를 양인으로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
"1960년대에 김용숙이라는 역사학자가 20세기 중반까지 생존한 구한말 궁녀들의 증언을 기초로 논문을 썼다. 그 분들은 자신들이 중인 출신이었다고 증언을 했고, 그 증언을 기초로 궁녀는 양반과 천민의 중간인 중인계급인 것 같았다고 썼는데, 그게 많이 확산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학자가 1980년대에 쓴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1987년)에서는 궁녀가 주로  천민이었고, 그중에 평민도 끼어 있는 것 같다고 정반대로 견해를 수정한다. 1960년대에 쓸 때에는 증언을 기초로 썼는데, 1980년대에는 예컨대 <경국대전> <대전회통> <속대전> <조선왕조실록> 같은 사료를 기초로 썼기 때문이었다.

최근에 궁궐 문제를 많이 연구하신 분이 홍순민 교수인데, 그분도 김용숙 교수의 두 번째 견해와 같다. 궁녀는 기본적으로 천민인데, 예외적으로 평민이 끼어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해 지금 학계에서 별다른 비판이 없는 상태다. 하지만, 역사학계에서 이렇게 바뀐 변화가 학계와 대중문화의 커뮤니케이션 부족으로 대중문화에 반영되지 못한 것 같다."

김종성 기자가 <오마이뉴스>에 연재중인 '사극으로 역사 읽기'
 김종성 기자가 <오마이뉴스>에 연재중인 '사극으로 역사 읽기'
ⓒ 화면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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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녀는 정5품 상궁까지 오를 수 있다. 궁녀가 천민이라면 왜 품계를 주었을까?
"조선시대 천민을 너무 별종으로 생각는데, 학계에서는 조선시대 어떤 때에는 30~50%에 이르는 사람들이 노비였다고 본다. 만약 국민의 30~50%가 노비라면 그들은 평범한 사람이다. 천민들을 낮게 평가해서 그렇지 지금의 샐러리맨들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영업자가 평민이라고 치면… 고관대작들의 노비는 평민보다 파워가 더 강했고 경제적으로도 그랬다. 대기업 이사가 길에서 장사하는 자영업자보다 부나 지위가 높을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샐러리맨이 직장에 속박되어 있듯이 노비는 노비문서라고 하는 강력한 힘으로 묶여 있었다. 노비문서와 직장… 기본적으로 속박 유형만 다를 뿐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궁녀에게 품계를 준 것은 기본적으로 왕의 노비이고 국왕 옆에 있는 특수한 이들이기에 차별화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또 왕권을 강화하려면, 이들 조직을 효율적으로 관리한 뒤 품계를 줘 체계적인 조직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왕의 노비는 고위층의 사노비와 격을 다르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궁녀에게 품계를 준 것은 그들이 자유민이거나 신분이 높아서가 아니라 왕의 권위를 세울 목적 때문이었던 것이다. 왕의 노예에게 품계를 주는 것은 동아시아에서 고대부터 있었던 관습이다. 왕의 노비나 다름없는 환관(내시)에게도 그런 품계를 부여했다."

-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최 숙빈은 출신주의 사회에서 능력을 바탕으로 성공했다. 이게 앞으로 우리가 가야할 지향점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능력주의 사회라고 믿지만, 출신주의도 상당부분 있다. 대한민국이 만약 100% 능력주의 사회로 바뀐다면 하루아침에 붕괴 되고 말 것 같다. 지금 대한민국의 지배층과 체제는 100% 능력주의를 소화할 만한 여건이 아직 미비해서다. 앞으로 100% 능력주의로 가도 지탱할 만한 지배층과 그런 사회 체제를 만드는 것이 우리 사회가 가야할 방향이라고 본다.

그래서 더 이상 최 숙빈 같은 사람이 대중에게 주목을 받지 않는 사회, 능력을 바탕으로 출세했다고 해서 더 이상 주목받지 않고 그것이 당연하게 인식이 되는 그런 사회로 가야 한다고 본다."


최숙빈 - 숙종시대 여인천하를 평정한 조선 최고의 신데렐라 숙빈 최씨

김종성 지음, 부키(2010)


태그:#최숙빈, #김종성, #장희빈, #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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