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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미국 패권이 몰락하고 있다는 얘기는 그다지 새삼스럽지도 않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한 미국이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사이, 미국식 신자유주의 모델의 모순이 부풀려놓은 미국 부동산 시장의 거품이 일시에 터지면서 미국식 모델을 따르던 전 세계의 경제는 파과적인 공황을 경험하고 있다. 또한 오랜 세월 계속된 미국의 무역적자와 재정적자 때문에 미국의 달러는 세계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위협받고 있다.

 

미국의 국채를 대량으로 구입하면서 미국의 적자를 메워주고 있던 중국, 일본, 한국 등의 동아시아 국가들도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듯하다. 정치군사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있는 나라를 패권국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유일패권국이었던 미국 제국의 몰락을 얘기하는 책들도 적지 않게 출간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기에 정작 중요한 것은 이미 현재 진행형인 미국 제국 몰락의 뒤꽁무니만을 좇는 것이 아니다. 미국 패권 몰락 이후에 세계 질서가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될 것인지를 아는 것이 오히려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최근 새로 출간된 <다극화 체제, 미국 이후의 세계>(시대의창 펴냄)의 네 명의 저자 김애화, 안영민, 임승수, 조예제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미국 일극(一極) 패권이 무너진 이후의 세계일 것이다. 현재를 통해 미래를 읽어내고 그에 맞는 준비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지금 세계는 미국 일극 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계 체제가 도래하는 격변의 시기이다. 이런 시기에 앞으로 도래할 미래의 세계상을 예측하고 그에 대비하는 일은 나라와 민족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아무리 중요성을 강조하더라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다극화 체제, 미국 이후의 세계>에서 저자들이 주장하는 미국 이후의 세계는 '다극화(多極化) 체제'다. 유럽연합(EU), 중남미국가공동체, 동아시아 공동체, 러시아와 중국의 새로운 부상 등 세계는 지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패권들이 형성되고 있는 추세이다. 한편 미국 일극 체제의 몰락은 이러한 움직임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다극화 세계로의 변동의 구체적인 모습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그것을 통해 미래를 읽는 새로운 시각을 공유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네 명의 저자들은 각각 동아시아, 중남미, 유럽, 중동의 상황을 통해 '다극화 체제'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회학과 역사학을 전공했으며 5개국어에 능통한 조예제는 국내 유수의 연구소에 몸담고 있으며, 시애틀·보스턴·도쿄·상하이·모스크바를 오가면서 동아시아 문제를 고민하는 다양한 인사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다극화 체제'의 한 축으로 동아시아의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동아시아의 경우 경제력이나 정치력이나 군사력이 날로 강해지고 있어 미국, EU와 함께 천하삼분론의 한 축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그러나 매우 밀접했던 과거에도 불구하고 제국이었던 나라들이 즐비하다는 특징과 식민-피식민의 경험 등은 유럽연합의 사례와는 다르게 동아시아 통합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와 함께 한반도를 둘러싼 복잡한 지정학적 관계도 어려움을 보태고 있다.

 

하지만 국제(國際)를 뛰어넘는 민제(民際)도 있는 법이다. 조예제는 해류를 타고 중국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흘러가 쌓이는 쓰레기를 함께 치우는 3국의 시민들에서 민제를 발견한다. 또 1996년 40여 광역지방자치단체가 연합하여 만든 동북아지방자치단체연합은 국가 간 연대가 아니라 도시 간 연대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조예제는 또 100년 전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을 다시 읽는다. 100년 전 동북아시아에서 근대를 넘어 평화를 주장했던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지금 우리에게도 매우 의미가 깊다.

 

자신을 포함한 네 명의 저자들을 한자리에 모은 임승수.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등 저자로도 친숙한 그는 이 책에서 중남미 부분을 맡았다. 자신의 저서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를 통해 중남미 베네수엘라에서 일어나는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을 국내에 소개한 임승수는 베네수엘라 방문의 경험을 통해 중남미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혁명의 분위기를 일관된 관점으로 서술한다.

 

남미의 경우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행보가 남미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차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은 베네수엘라뿐 아니라 남미 전체를 바꾸고 있다. 차베스를 따르는 남미의 새로운 정치세력들은 정치적 독립을 위해 남미국가연합을 세우고, 경제적 독립을 위해 남미은행을 세웠다. 또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맞서 미주지역을 위한 볼리바르 대안ALBA를 만들고 그동안 미국이 헐값에 퍼갔던 자원을 국유화해가고 있다. 그리고 미국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 남미안보협의회를 만들고 러시아와 군사협력을 하는 등 미국의 손을 벗어나 미국 바로 옆에서 미국의 패권에 저항하고 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절대 순조롭지는 않다. 남미 각국에서는 이런 탈미행보를 막기 위해 기존 기득권세력이 쿠데타를 시도하는 등 다양한 반대의 움직임이 있다. 하지만 여지껏 등 한번 못 펴고 살았던 남미의 민중들은 안다. 남미가 똘똘 뭉쳐 탈미를 해야만이 살 수 있음을.

 

한미 FTA 범국민운동본부의 국제연대팀장, 한국진보연대의 국제연대위원장, 그리고 민주노동당 부설 새세상연구소의 전문연구위원으로 활동하는 김애화. 오랜 기간 세계 곳곳의 진보단체 및 인사와 연대활동을 통해 국제적 시각을 가다듬어 온 그녀는 한-EU FTA에 대한 대응방안을 모색하며 유럽의 다양한 인사들과 교류를 해왔다. 그녀가 들려주는 유럽연합의 이야기는 다극화 세계의 한 축을 이해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다.

 

유럽의 경우는 EU라는 굳건한 통합체가 있어서 미국의 대항세력으로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이다. 하지만 유럽 안에서 보면 여러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것은 EU라는 것이 냉전 시기 미국이 유럽을 컨트롤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EU에서도 유럽시민이 우선이 아니라 유럽의 정치·군사·경제적 패권이 우선시된다는 현재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유럽인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한다는 유럽식 사회보장제도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오래전이나, EU는 리스본조약(미니 유럽헌법)을 통해 사회보장제도를 노골적으로 파괴하려고 하고 있다. EU에게 있어 사회보장제도란 강한 유럽을 만드는 데 별 도움도 안 되는 거추장스러운 것 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또 EU와 유럽 각국 정부의 입장 차이, EU 조직 내부의 민주주의의 결여와 관리들의 관료화는 EU가 장밋빛만이 아님을 알려준다. 하지만 유럽 각국의 시민들이 유럽이라는 하나의 생활권으로 많은 부분 통합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EU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유럽시민으로서 함께 풀어나갈 것이다.

 

전쟁의 세계화가 아니라 연대의 세계화를 꿈꾸며 국제연대운동단체인 <경계를넘어>와 <팔레스타인평화연대>에서 활동한 안영민. 중동과 한국을 오가며 축적된 지식과 경험을 통해 그가 풀어주는 중동의 이야기는, 미국의 패권에 저항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 중동의 과거, 현재, 미래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중동은 지금 미국과 전쟁중이다. 군사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어떤 통합이나 대항세력으로서의 힘은 약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중동은 전쟁에서 미국의 발목을 잡아 미국의 패권이 흔들리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미국은 석유에 대한 탐욕으로 자신의 '꼬붕' 이스라엘과 함께 중동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이 지역의 민중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미국을 중동이란 수렁 속에 빠트렸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미국은 중동에 개입할 수도 개입하지 않을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져 있다. 그리고 민중들은 계속해서 저항할 것이다.

 

세상이 진보하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세계가 더욱 평화롭고 평등하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네 명의 저자는 일치된 관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방법이 다양하듯이 네 명의 저자가 세상을 보는 시선에서는 분명 차이도 존재한다. 이런 저자들 간의 차이가 오히려 내용의 다양성과 풍부함으로 전해진다는 것이 이 책의 또 하나의 장점이라고 하겠다. 이 책의 마지막에 배치된 네 저자의 좌담회는 그러한 네 저자의 개성과 다양성을 풍부하게 담아내고 있다.

 

미국 패권이 저물고 새로운 세계질서가 요구되는 격변의 시기, 세계 각 지역의 흐름을 한 권의 책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은 분명 흔한 기회는 아닐 것이다. 미국 일극 체제가 막을 내리고 다극화 세계로 이행하는 격변의 시기에, 이 책이 독자들에게 시대와 역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유익한 도구가 될 것이다.


태그:#다극화 체제, #미국, #동아시아, #중남미,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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