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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민주동맹 한국지부 사무실에서 지난 5일 오후 7시에 열린 버마 시선 '어느 침묵하는 영혼의 집' 출판기념회.
 민족민주동맹 한국지부 사무실에서 지난 5일 오후 7시에 열린 버마 시선 '어느 침묵하는 영혼의 집' 출판기념회.
ⓒ 최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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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 일지 않는/ 재스민 향기가 넘치는/ 흠 없는 바다/ 사랑을 운반하는 것 외에/ 상륙하거나 급수한 적이 전혀 없는/ 무지개 보트/ 그 항구엔/ 미움도/ 전쟁도/ 한 때 획득하려 했던 진실도 없네/ 더 이상 진실에 대한/ 논쟁조차 없네."
-뚜카메이 라힝의 시 '항구' 중에서

"난 학생들의 지리책 속에서 읽고 있다/ ...난 무대 위의 벨벳 커튼과 액션 뒤에서 일어난 것들을 읽고 있다/ 나는 읽고 있다/ 아주 많이 읽고 있다/ 난 이런 일들을 말하려 애써왔지만/ 날 제발 용서해다오/ 어느 침묵하는 영혼처럼 다른 이들이/ 듣거나 알도록 하는데 무기력할 뿐이니."
-킨 아웅 에이의 시 '어느 침묵하는 영혼의 책' 중에서

독재자의 폭력을 세상에 고발하는 버마 민중시다. 너무나 광포하고 잔혹해서 그랬을 것이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공포, 하지만 겉은 꽃과 향기로 장식된 표리부동. 칼보다 강하다는 펜을 들고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시인의 처연함이 짙게 묻어난다. 골방의 길고 긴 한숨이 세상에 터져 나온 날 그들은 마침내 침묵을 깨고 논쟁을 시작한다.

'버마를 사랑하는 작가모임'(이하 버마모임)이 독재정권에 신음하는 버마의 아픔을 노래한 시집 하나를 내놨다. 시비평가인 마웅 타 노에가 2008년 영어로 펴낸 '버마시선집'(Burmese Verse a Selection)을 버마모임의 임동확 회장(한신대 문예창작과 교수)이 우리말로 옮긴 것. 마웅 스완 이(필명, 본명 우 윈 뻬)가 영역한 작품 몇 개를 추가했다.

"진실은 없고, 제발 용서해다오"

국내 처음으로 출간된 버마 저항시 선집 '어느 침묵하는 영혼의 책'.
 국내 처음으로 출간된 버마 저항시 선집 '어느 침묵하는 영혼의 책'.
ⓒ 최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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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번역 시집은 아니다. 소개된 킨 아웅 에이는 버마모임이 이미 작년 한국에 초대해 시낭송회를 하고 그의 시를 한국에 소개한 적이 있다. 여기 실리진 않았지만 재작년엔 망명 시인 마웅 소 챙을 초청하기도 했고. 그러니 시선집은 버마모임의 2년이 넘는 족적을 오롯이 담은 그릇이라고 봐야 한다. 옮긴이의 하얗게 지새운 밤과 각고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출판기념회는 지난 5일 오후 7시 부천에 있는 민족민주동맹한국지부(NLD코리아, 아웅 마잉 스웨 의장) 사무실에서 NLD(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정치조직)코리아와 버마모임 회원, 그리고 내빈 등 3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조촐하게 열렸다.

모임에서 버마모임 회장이자 옮긴이인 임동확 시인은 "시의 번역이 가당키나 한 일이냐"며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자괴감을 표현한 뒤, "하지만 양국, 그리고 작가들이 대화하고 소통하려는 몸짓이라도 보여줘야겠기에 시작했다"며 "조금 낯설지만 문자나 부호 뒤에 숨겨진 버마인의 '말하는 침묵, 침묵하는 말'에 귀 기울여 달라"고 말했다.

임 시인은 이어 시 하나를 낭송했다. 고인이 된 '마웅 처 네' 시인의 '물고기'라는 작품인데, 그는 낭송에 앞서 "엄청난 반전의 시"라며 번역 중 받았을 진한 감동을 표현했다. 사실 '엄청난'이라는 단어는 작가(나같은 언론인에게도 마찬가지)에게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이니까.

"내 인생 전부/ 난 결코 한 마리 물고기도 잡아본 적 없다/ 그런데 보라구/ 내가 한 마리 잡았을 때/ 그건 거대한 우주 그 자체다/ 그 걸 끌어올리면서/ 내 낚싯대는/ 무지개처럼 휘어지고/ 이번에 내가/ 낚이고 만다."

문자 뒤 숨긴 '말하는 침묵'

버마 저항시집 '어느 침묵하는 영혼의 책' 출판기념회 참석자들.
 버마 저항시집 '어느 침묵하는 영혼의 책' 출판기념회 참석자들.
ⓒ 최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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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은 14명 시인의 작품 네다섯 개씩을 모은 것이다. 따킨 꼬더 마잉(Thakhin Kodaw Hmaing), 저지(Zowgyi), 민 뚜운(Min Thuwun), 다공 따야(Dagon Taya), 띤 모(Tin Moe), 마웅 스완 이(Maung Swan Yiy), 찌 아웅(Kyiy Aung), 꼬 레이(Ko Lay), 마웅 띤 카잉(Maung Thin Khaing), 조 삐인마나(Zaw Pyinmana), 마웅 처 네(Maung Chaw Nwe), 아웅 체임(Aung Cheimt), 뚜카메이 라힝(Thukhamein Hlaing), 킨 아웅 에이(Khin Aung Aye) 등이 그 주인공.

식민지 해방 공간에서 미얀마 민족문학을 이끌었던 시인들이며 몇 분은 이미 작고했다. 남은 대부분의 시인들도 고령이며 문단의 원로들이라고 한다. 킨 아웅 에이가 1956년생으로 가장 어린 정도. 이들은 식민지 압제, 그 뒤 이어진 군부독재에 신음하는 버마인들의 아픔을 작품에 표현했다.

먼저 식민지에서 해방, 그리고 근대화 과정에서 문명의 이기와 파괴를 묘사한 따킨 꼬더 마잉(1876~1964)의 '오지의 결혼식'은 깊고 깊은 정글 속까지 파고든 개발과 환경·문화유산 파괴, 그리고 이어지는 아픔과 상처를 이렇게 표현했다.

"내 나라 오지에 지금껏 남아 있는 결혼식은/ 좋은 전통의 하나로 결코 사라지지 않는데요/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할머니가 내게 외양간을 주었죠/... 아직 나의 오랜 거점이었던 거기 오지에 있었을 때/ 키 아저씨가 빚진 수백 짜트를 갚으란 요구에, 난 말했지/...잘생기고 포동포동하며 생기에 넘친 쌍둥이 수소들을/ 사원건설업자에게 넘겨버릴 테니/ ...그걸로 충분치 않거든.../ 마을 동쪽에 있는 농토를 팔아버리세요."

이어 독재정권의 폭정에 신음하던 후배 시인들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조국이 압제자 손에 넘어가 아픔을 몸소 겪어야 했는데, 다시 어둠 속에 갇힌 사랑하는 조국을 보며 온 몸으로 흐느껴 운다. 말 한마디 글자 한 줄 잘못 썼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세상에서도 그들은 펜을 놓지 않았던 것.

"어둠의 베일이 걷히고, 너흰..."

시집 '어느 침묵하는 영혼의 책' 옮긴이
 시집 '어느 침묵하는 영혼의 책' 옮긴이
ⓒ 최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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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 처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 / 불이 꺼졌고-어둠이 밀려왔지/ 더듬거리며 난 내손을 뻗어/ 여리고, 부드럽고, 향기롭고, 가냘프며.../ 불꺼진 밤/ 순간들이 지나고, 어둠의 베일이 걷힌 후/... 너희들이 눈에 익은 것처럼 분명하게 보았던/ 그들의 위장과 등짝에/ 숨기고 도주시키는/ 고문기술자와 희생자들... /벌거숭이로 드러나고 있다."
-다공 따야의 '불꺼진 밤' 중에서

"차창 곁에서/ 춤추면서, 왔다 갔다 하는/ 조지 인형은/...조지는 요술지팡이를 틀림없이 갖고 있긴 해/ 하지만... 스프링이 작동되어 왔다갔다 할뿐/ 춤출 때조차도, 거기에/ 꼭두각시 끈이 달려/ 차 밖을 벗어날 순 없지/ 아직도 부귀와 행운을 가져온다는/ 믿음 때문에 영광된 자리에 벌서며/ 거기에 매달려 춤춰야만 하는/ 그 팔자는 그 주인 팔자이기도 하지."
-띤 모의 '조지인형' 중에서

마침내 시인들은 분노를 폭발한다. 가슴 속 깊이 간직했왔던 호통이자 소소한 반역이다. 이른바 '말없는 침묵'보다 더 무서운 '침묵의 언어'들을 뿜어낸다. '탄쉐' 정권이 그토록 무서워한다는 '이심전심'을 노리며. '8888민중항쟁', '샤프란혁명'을 향해...

"산산이 부서진 벽돌들을/ 힘껏 잡아당겼을 때 그 속에서/ 아아 석상하나 튀어 나왔네/ 누구나 그걸 보면 순종케 하는/ ...어떤 독재자가 무엇 때문에 한 인간을/ 돌로 만들어 버리는 잘못을 범하는가?/ 그리고 얌전히 손바닥을 들어올린 채/ 무릎 꿇어 경배하게 하는가?/ 언제 그 자는 그의 자유를 얻을 것인가?"
-마웅 스완 이의 '역사학자의 한마디' 중에서

"난 홀로 갈망하네/ 12월이여, 하지만 위대한 네 하늘은/ ...칼로 난도질하고/ 창으로 찌르고/ 총질을 해대건만/ 12월이여, 너의 날들은 아직 푸르네/... 저리 가벼려다오!/ 12월이여, 그리고/ 네 위대한 하늘과 함께/ 네 모든 것과 함께 사라져다오/ 난 바로 내 그리움을 견디고 있을 테니!"
-꼬 레이의 '하얀 그리움' 중에서

덧붙이는 글 | 인터넷저널에도 오릅니다.



태그:#버마, #시집, #어느 침묵하는 영혼의 책, #버마사랑작가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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