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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부 홈페이지 갈무리
 노동부 홈페이지 갈무리
ⓒ 노동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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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3년 전인 2007년 10월 8일, 한글날을 하루 앞두고 현대자동차는 "거부감이 일거나 부정적인 이미지를 담은 용어에 대한 순화운동을 벌인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동안 기업에서 사용하던 용어들을 순화하거나 누구나 쉽게 바꾸겠다는 취지였습니다. 예를 들어 '재가'는 '결재'로, '상신'은 '여쭘', '소비자'는 '고객'으로 '네고'는 '상담으로 바꿨습니다. 이 외에도 약 60여개가 넘는 단어들을 바꿨는데, 앞서 언급한대로 부정적인 이미지나 거부감이 드는 말 등이 그 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런 용어들에 섞여서 바뀐 게 있었는데 바로 '下請業體(하청업체)'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준다고 판단해서 바꿨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꾼게 바로 '協力業體(협력업체)'입니다.

하청업체는 주종관계를 의미하지만 협력업체는 동역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당연히 수많은 하청업체 대표들은 환영했습니다만, 현대자동차의 속내를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하청'에서 '협력'으로 바뀐 건 단지 '용어'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정작 '하청'업체들을 '협력'업체로 승격시켜서 그들과의 '동역자'관계를 해 나가려는 마음이 아니었고, 단지 '현대' 자신들을 향한 외부의 곱지 않은 시선을 피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던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박점규 금속노조 미조직비정규사업부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2003년부터 현대차 아산, 울산, 전주공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거센 투쟁이 일어나면서 사회적으로 사내하청 노동자의 문제가 심각해졌다. 그러자 현대자동차는 이를 은폐하기 위해 '하청'이라는 '부정적' 단어를 '협력'이라는 '긍정적' 단어로 바꿔 "사내하청 노동자는 협력업체의 정규직"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심각한 비정규직, 사내하청 노동자의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현대자동차가 벌인 '꼼수'였다" - 02.09 프레시안 칼럼

즉 '하청업체 노동자' 가 아닌 '협력업체 정규직원'으로 격상해 줬다는 뜻인데, 문제는 바뀐 용어 외에는 이들 노동자들의 복지, 인권, 급여 등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하청업체 노동자'를 '협력업체 정규직'으로... 대기업의 말장난

그런데 현대의 이 같은 말장난을 지난 5일 노동부가 했습니다. 노동부는 보도 자료를 통해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렵거나 부정적인 용어 107개를 바꾸겠다"고 했습니다. '감시적 근로자', '준고령자', '경력단절여성', '쇼셜벤처' 등을 예로 들었는데, 전문가들의 견해를 듣고 오는 5월에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특히 노동부는 '비정규직'이라는 용어도 바꾸겠다고 했는데, "비정규직'이라는 용어는 정규직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 집단이라는 부정적 가치를 확산시킨다"는 이유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박점규 부장은 "말을 바꾼다고 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비정규직 단어를 지운다고 저항이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비정규직'이라는 말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 대신 다른 용어가 생기겠지요. 그것도 '긍정적인' 이미지의 단어로 말입니다. 그게 무엇이 되든 지금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는 개선되지 않을 것입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똑 같이 출근하고 똑 같이 퇴근합니다. 그러나 급여는 두배 차이가 납니다. 이게 바로 비정규직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정부는 이 '비정규직'이라는 말을 없애려 합니다. 더 '좋은'말로 바꾸려 합니다. 무엇으로 바뀔 지 5월이면 드러나겠지만 어떤 말이든 그 본질이 바뀌지 않는 한 말장난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국민들은 말만 바꿔도 모른다(?)

이처럼 용어를 바꾸는 것은 그 '의미'를 바꾸는 것입니다. 즉 '마누라'에서 '아내'로 바꿔 부르면 상당히 긍정적인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아내'라고 부르면서 '마누라' 취급을 하는 경우는 말만 바꾼 것입니다.

'한반도 대운하'에서 '운하'를 빼고 '4대강 살리기'라는 긍정적인 용어로 바꾸자, 그 내용과는 무관하게 여론조사에서 찬성률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부작용은 대운하 때와 다를 바 없고, 예산도 더 많이 들어가고, 환경파괴의 심각성도 달라질 게 없는데도 말입니다.

박점규 부장은 또 "말과 언어가 정신세계를 조금씩 갉아먹어 진실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노동유연화'가 대표적인 말이다. 국민들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차별에는 반대하지만, 똑같은 의미인 '노동유연화'에는 찬성하고 있다. '노동유연화'라는 기막힌 말로 진실을 흐리게 만든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정부가 노리는 것입니다. 이런 '꼼수'를 써서 국민들의 뇌리에서 정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씻으려 하는 것입니다. 전형적인 독재자들의 수법입니다. 박정희 정권때 '국민교육헌장'을 만들어서 전 국민이 외우도록 했습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이 헌장은 전국의 초중고교생들에게 필수암기과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정권의 비리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회칠한 무덤 같으니라고.."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을 바꾸려면 그 '내용'도 바꿔야 합니다. 같은 시간, 같은 노동력을 제공하고도 정규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처우를 받아야 하는 그들에게 기업들은 '노동유연화'라는 알듯 모를 듯한 말장난으로 입맛대로 모가지를 잘랐습니다. '협력업체'라는 그럴 듯 한 말로 공사대금 연체와 어음결제를 수시로 자행했습니다. 이제는 이런 횡포를 아예 정부가 나서서 '용어'까지 바꿔주겠다고 합니다. 듣기 좋고, 아름답게 들리도록 말입니다. 그러면 많은 국민들은 "이제 비정규직이 없어졌구나"라며 속아 넘어갈지 모릅니다.

부정적인 용어를 없애기보다는 부정적인 내용을 없애야 옳습니다. 또 부정적인 용어를 쓰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노동자'라는 말만 해도 빨갱이라면서 없애려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스스로 거부하며 지켜냈습니다.

'노동자'들을 아무리 '직원'이라며 말을 바꿔도 기업들의 '노동착취'는 없어지지 않았다면, 천 번을 바꾼들 무슨 소용 있을까요. 신약성경에 예수는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면서 서민들을 무시했던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고 욕을 했습니다. 겉모양은 그럴싸하게 포장은 했지만 그 속은 썩어 냄새가 나는 경우를 욕한 것입니다.

이 정부가 도대체 '회칠한 무덤'을 얼마나 더 만들려고 하는 지 명절을 앞두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지금도 전국의 마트에는 하루 종일 앉지도 못한 채 계산대를 지키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번 설날에는 정규직이 차려주는 차례 상과 비정규직이 차려주는 차례 상이 왠지 다르게 보일 것 같아 왠지 '씁쓸합니다'.


태그:#노동부, #비정규직, #하청업체, #정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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